제 발로 들어온 빈델에게 감사를 건넨 카사노는 텁텁텁- 원숭이마냥 사다리를 짚고 올라가는 빈델을 뒤쫓았다. 많이 벌어졌던 간격은 점점 좁혀져갔고 조급해진 빈델은 발을 헛디디거나 손을 잘못 짚는 등 실수까지 저질렀기에 카사노와 빈델은 점점 가까워졌다.
벌컥-
하지만 벌어졌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카사노를 피해 수로 뚜껑을 열고 탈출한 빈델은 줄줄 흐르는 침을 닦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곤 발치에 널린 돌들을 하나씩 챙겨 그대로 뚜껑 위에 얹었다.
텅- 텅- 텅- 텅-
철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숲에 퍼졌지만 빈델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을 날랐다. 빼곡히 쌓인 돌탑을 보며 숨을 돌리는 순간 터엉- 돌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벌어졌지만 수로 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후우, 후우, 후우!”
완전히 막진 못해도 임시방편으론 충분하다 생각한 빈델은 서둘러 평원을 향해 달렸다. 제대로 된 방향도 모르는채 숲으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을게 뻔했기에 평원으로 달려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아…”
폐부를 단검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질끈 눈을 감은 빈델은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풍경에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빈델은 저택 근처 평원임을 확인하고 제국 수도의 반대 방향으로 행선지를 정한 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잠시도 머뭇거리면 잡힐게 뻔해, 남작이라면 주변에 병사들을 풀어 놨을게…’
“빈델?”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혹사하며 겨우겨우 생각이란 걸 이어 나가던 빈델은 자신을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에 후읍- 숨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설마 남작이?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보행하는 로망의 위에서 내려온 페리샤는 여기저기 긁힌데다 땀에 젖어 추레해진 빈델의 뒷모습을 보며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빈델,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엉망이 돼서는…”
말끝을 흐리며 빈델의 몰골을 훑어본 페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페리샤의 속내를 모르는 빈델은 천스치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손을 보곤 깜짝 놀라 그대로 손을 휘둘러 쳐 냈다.
짜악!
“아읏! 비, 빈델…?”
“아가, 아가씨…”
당황한 페리샤의 비명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단 사실에 놀란 빈델은 이를 빠득 깨물며 다리를 움직였지만 달려가기 직전 페리샤의 손에 어깨가 붙들려 도망치지 못했다
“놔주세요.”
“대체 무슨 일이예요. 제대로 대답도 안 하고 잔뜩 겁먹어선… 응?”
안쓰러운 모습에 편하게 질문한 페리샤는 맑은 눈망울로 대답을 종용했지만 몇 명인지 모를 추적자들에 대한 생각에 조급해진 빈델은 이를 갈며 페리샤의 손에서 벗어나곤 소리 질렀다.
“가봐야 합니다!”
“빈데엘- 무슨 일인지 말을 해 줘야 내가 해결을-“
해결? 또 사람 속도 모르고 해맑게, 아니 아무렇게 말하는 페리샤의 대답에 여태껏 지하수로부터 지금까지 억눌렀던 모든 분노의 둑을 터뜨린 빈델은 몸을 돌려 작은 체구의 페리샤를 향해 그대로 쏟아 냈다.
“씨발!!! 놓으라고, 내가 말을 했잖아!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거야!”
“뭐엇, 뭐, 뭐야. 빈델?”
귀를 찣는 듯한 호통에 화들짝 놀란 페리샤는 뒷걸음질 치며 툭- 나무에 부딪혀 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빈델에게 내몰렸다.
빈델은 빈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로 그저 질문만 하며 자신을 의심조차 안 하는 페리샤의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다. 남작에게 무언가를 들었을 텐데, 그저 우연히 여기서 만났을리가 없었기에 페리샤가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확신한 빈델은 무너진 둑에서 흘러나오는 분노를 전부 내뱉었다.
“눈치가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씨발, 무슨 일이냐고? 왜 이러냐고? 알면서 쳐묻기는!!! 시종따위한테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아무 생각 없잖아! 그냥 놔달라고! 알아들어!!!”
히끅-
모든 분노를 내뱉었을 때 남은 건 허무였다. 텅 빈 속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에 빈델은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내쉬며 눈앞의 페리샤를 바라봤다.
히끅, 히익-
딸꾹질과 함께 그렁그렁한 눈물방울,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을 가리는 물방울에 허무함을 뒤엎고 새로 자리 잡는 죄악감과 후회를 느끼는 순간-
파스락-
파스락-
파스락-
미세하던 수풀 헤집는 소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리던 풀 소리는 어느새 귀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울렸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밟히는 소리가 페리샤의 울음소리에 뒤섞여 빈델의 귓가에 맴돌았다.
까득- 주륵…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핏방울이 흘렀지만 빈델은 지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남작부인에게 혼났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며 덜덜 떠는 페리샤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빈델은 도망치는 바퀴벌레처럼 자세를 낮추고 저 멀리 목표로 해 둔 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파삭- 파사삭- 콰득-
빈델의 알 수없는 욕설과 분노에 겁먹은 페리샤는 서럽게 우는 와중 눈앞의 수풀이 파스스 흔들리다가 이윽고 부러지는 소리까지 내자 꾸욱- 입술을 앞니로 깨물며 숨을 참았다. 그 탓에 히끅- 귀여운 딸꾹질이 새어 나왔지만 페리샤는 숨죽이며 수풀을 바라봤다.
“아가씨.”
파스스- 파스슷-
쓰게 웃으며 손에 쥔 나뭇가지를 흔든 카사노는 파스스- 소리와 함께 떨어진 나뭇잎을 짓밟으며 조용히 페리샤에게 다가 갔다.
“참 못된 인간이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에게 그런-“
전후 사정을 알기에 페리샤에게 작업을 치려던 카사노는 보고 느낀 점을 내뱉으며 울먹이는 페리샤에게 다가갔지만 끝까지 말하진 못했다.
“카사노히-“
아이처럼 울먹이며 눈가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을 그대로 보여 주며 다가오는 페리샤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은 카사노는 그대로 팔을 벌려 포옥- 자그마한 페리샤의 몸을 한입에 잡아먹듯이 품어 버렸다.
“흐윽, 흐읏, 흐으, 흐윽, 후읏, 흐아앙-“
자신을 온전히 품어 주는 커다란 품에 얼굴을 파묻은 페리샤는 꾸욱- 자신을 강하게 껴안는 팔과 온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진득한 카사노의 체향에 코를 킁킁이며 꾸욱- 두꺼운 그의 허리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좋아, 온몸을 막아주는 것만 같아…’
이대로 안겨 있으면 처음 겪었던 증오로 점칠된 욕설마저 막아줄 것만 같은 착각에 페리샤는 흘러나오는 눈물과 콧물을 전부 카사노의 품에 닦아내며 꾸욱- 더욱 강하게 팔을 조였다.
“울지마요, 뭐 하거 그딴 놈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일에 슬퍼할 필요 따위 전혀 없습니다.”
“흐읏, 아무것도, 아니야…?”
크흥- 자연스럽게 옷소매를 검지와 엄지로 움켜쥔 카사노는 그대로 빨갛게 물든 페리샤의 코에 내밀었다. 폭- 코를 감싸는 소매에 자기도 모르게 코를 푼 페리샤는 새빨간 볼을 다시 품에 묻으며 조용히 되물었다.
“당연하죠, 아가씨 생각도 안 하는 그런 머저리 때문에 슬퍼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건 그냥 사고예요. 없던 일로 치고 잊으면 됩니다.”
“잊으면, 되는 걸까요…”
꾸우욱- 가냘픈 어깨와 등을 팔로 조이며 쪽- 페리샤의 땀에 젖은 정수리에 카사노가 키스하자 팡- 작은 손을 휘두르며 제지하는 페리샤였지만 이윽고 쏟아지는 그의 장난에 결국 꺄르르 웃으며 눈물을 그치곤 포옥-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네, 그저 지금의 행복을 즐기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행복…”
꾸우욱- 카사노의 대답에 페리샤는 손바닥 안에 잡힌 카사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아이처럼 되뇌었다. 그런 모습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사노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면 제가 싫으신가요?”
짓궂은 질문에 화들짝 놀란 페리샤는 동그랗게 뜬눈으로 바라보며 붕붕붕-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예요! 카사노가 있어, 흐윽, 카사노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예요오…”
다급하게 대답했지만, 그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하는 순간 방금 전 증오 어린 욕설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자신을 떠올린 페리샤는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리며 그대로 카사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저도 아가씨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울지마세요. 그런 쓰레기 때문에 운다는 자체가 아깝습니다.”
“흐윽, 흐윽, 후읏…”
꽈악-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느껴주세요.”
“따뜻하고… 후읏, 고마워요…”
이 말만은 해야겠단 생각에 페리샤는 카사노의 품에서 고개를 들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향해 대답했지만 미소를 짓고 있던 카사노는 갑작스레 푸흡-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주우욱-
“히익!”
왜 웃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기다란 콧물이 대롱거리며 흐르는걸 목격한 페리샤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옷과 코를 이어 주는 콧물이 부끄러웠던 페리샤는 미안 하지만 카사노의 옷에 콧물을 닦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오…’
콧물이 조금 남아 있으면서도 순진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초한 페리샤의 미소에 이 얼굴을 천박하게 더럽히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카사노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쪼옥- 입술을 포갰다.
“쮸웃, 쯉, 후읏, 츄웁, 츄릅, 후움, 파핫, 흐응♥”
다정하게 위로할 땐 언제고, 저열한 탐욕을 내비치며 자기 입술을 게걸스레 덮는 카사노의 입술에 페리샤는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감각을 느끼며 휙- 두터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쪽쪽쪽- 그의 입술을 똑같이 탐했다.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평원에서 몇 분이나 진득한 키스를 나눈 둘은 가쁜 숨을 천천히 내쉬며 여운을 즐겼다. 물론 카사노는 더욱 즐기고 싶었지만, 소심하게 팔로 X자를 그리며 반대하는 페리샤탓에 포기했다.
“아으, 밖이니까, 나중에… 네?”
쪽쪽쪽- 새처럼 자기 목덜미를 쪼아대는 카사노의 머리를 쓰다듬은 페리샤는 수긍하며 입을 떼는 카사노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곤 조용히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남작께서 하던 일을 마무리하시고 돌아오실 시간이니…”
“네? 아버님께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페리샤의 모습에 할짝- 입술을 핥은 카사노는 고민하다 결국, 그녀에게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네헷? 빈, 빈델이 창고에 손댄 그 도둑이라니…”
덜덜덜- 진동하듯 떨리는 두 눈에 혀를 내두른 카사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인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런척하는 능구렁이 인 걸까- 쓸데없는 생각하며 페리샤의 귀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걱정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끝난 일이니까요. 얼른 돌아갑시다.”
“…네…”
빈델의 정체를 알고 급격히 말이 없어진 페리샤였지만 그렇다고 카사노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자연스레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로망 위에 태워주는 카사노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페리샤의 모습에 카사노는 찰싹- 새하얀 로망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히이잉-
투레질과 울음소리를 내며 다그닥- 다그닥- 걷기 시작하는 로망, 그리고 고삐를 움켜쥔 채 인형처럼 들썩이며 고민을 이어 나가는 페리샤까지.
‘이제 마지막 매듭만 지으면 끝이군.’
차근차근 정리되는 상황과 이야기에 만족한 카사노는 조금씩 빨라지는 백마, 로망의 고삐를 같이 잡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리샤와 눈을 한번 맞춘 후 조용히 저택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