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62화 (162/395)

“아가씨, 아가씨.”

흔들흔들- 고저 없는 평온한 목소리가 잠든 정신을 흔들었다. 누군가 자물쇠로 잠가둔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뜬 페리샤의 시야에 제일 먼저 비친 건 자신의 전속 시종 카트라였다.

“으응, 응, 카트라...”

자신이 내뱉고도 놀라울 만큼 탁하고 찢어지는 목소리에 툭- 목을 짚어본 페리샤였지만 겨울공기와 밤새 울부짖은 신음탓에 갈라졌을뿐 문제없다는걸 금방 깨달았다.

“괜찮으신가요?”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목을 짚으며 더듬거리는 모습에 카트라는 걱정이 샘솟아 텁- 가냘픈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감기는 눈을 겨우 부릅뜬 페리샤는 애써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네, 네. 괜찮아요. 카트라. 아. 어머님은...”

“그게...”

복슬복슬한 실내화를 신고 욕실로 향하려던 페리샤는 순간 잊었던 어머님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카트라에게 물었지만 대답하는 카트라의 얼굴은 도리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페리샤가 왜 그러냐 물으려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됐다. 자기 관리 하나 못해 약속까지 어길 줄이야.”

“어머님...!”

“약속 한번 안 어기던 아이가 오지도 않길래 아픈 줄 알았건만... 이 시간이 다되도록 널브러져 자기나 하다니.”

번개가 내리친 것만 같은 오싹한 꾸중에 쭈뼛- 쭈뼛-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남작 부인에게 다가간 페리샤는 꾸욱- 주름진 잠옷만 움켜쥐며 죄지은 아이처럼 바닥을 바라봤다.

뭐라 꾸짖으려던 남작 부인은 가냘픈 손이 새하얘질 때까지 잠옷을 움켜쥐는 페리샤의 모습에 꾸욱- 애꿎은 입술을 한차례 깨물곤 그대로 일어났다.

벌컥- 문을 열어 남작 부인을 배웅한 카트라는 덜덜- 가냘픈 몸을 떨며 바닥만 내려다보는 페리샤의 등을 살포시 끌어안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괜찮습니다. 사모님께서도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실 겁니다.”

“네, 네, 고마워요...”

꽈악- 페리샤의 등과 카트라의 가슴이 맞닿자 서로의 고동이 두근두근- 전해졌다.

‘따뜻해...’

항상 자랑스러운 딸로 있고 싶었던 페리샤에게는 남작부인의 싸늘한 꾸중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절망적인 상황, 머리를 헤집는 부정적인 생각에 잡아먹힐 뻔했지만, 등에서 울려 퍼지는 일정한 고동에 겨우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후웁-

온몸을 휘감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숨을 들이킨 페리샤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그대로 내뱉었다. 몸에 피가 마르는 감각과 함께 목울대에 힘이 몰렸지만 끌어모은 숨을 전부 내뱉을 때까지 페리샤는 멈추지 않았다.

후우우-

모든 걸 내뱉은 것만 같은 개운함에 고개를 치켜든 페리샤는 텁-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카트라의 팔을 풀고 웃는 낯으로 욕실로 향했다.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네.”

촤아악-

온몸을 적시는 따뜻한 물줄기가 차갑게 식은 몸을 데우기 시작했다. 노곤한 감각에 몸을 내던진 페리샤는 부드럽게 몸을 씻기는 카트라의 손길을 즐기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제라도 정신 차리는 거야.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카사노님에겐 더 찾아가지 말자.’

‘그 남자를 만나고 이상해졌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그 감각에 휘둘리면 안 돼.’

‘그 남자가 오기 전처럼, 어머님과 아버님이 자랑할만한 결점 없는 딸로 돌아가자.’

퐁당-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와 함께 욕조에 얼굴을 담군 페리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핥고 지나가는 따뜻한 흐름을 느끼며 새하얀 욕조벽과 투명한 물만이 가득한 욕조를 둘러보며 생각을 마저 정리하던 페리샤는 텁- 발목을 잡는 삐뚤어진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자위나 음탕한 행동에 정신 팔려선 안 돼, 일상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곤란한데 늦잠까지 자다니.’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면 나는? 내 행복은 어떻게 되는 거지.“

촤아아악-

점점 노선이 틀어지는 잡생각에 페리샤는 곧바로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선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오늘 겪었기에 할 수 있는 결단이었다.

탈탈탈-

목욕이 주는 개운함을 만끽하는 페리샤의 머리를 털기 시작한 카트라, 단장의 명령으로 아가씨의 곁에 있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생각한 그녀는 아가씨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말리며 자신의 실수를 책망했다.

카트라의 생각을 모르는 페리샤는 그저 눈을 감고 그녀의 손길을 즐기며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정치, 역사학, 오늘은 두 가지뿐이니까 수업이 마치면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복습해야겠어.’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 페리샤는 카트라가 입혀준 연하늘빛 드레스를 팔랑이며 거울을 바라봤다. 피곤한 탓에 눈 밑이 저금 거뭇해 보였지만 티가 나진 않았다. 카트라에게도 물어 괜찮다는 확답을 받은 후 방문을 연 페리샤는 몇 번이고 되묻는 카트라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안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단장의 명령으로 창고를 살펴봐야 하는 카트라의 입장으로선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아가씨의 명령이 반가웠지만, 아가씨를 모시는 시종 카트라로선 위태로워 보이는 아가씨를 옆에서 돌봐주고 싶었다.

정을 너무 많이 준걸까?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카트라였지만 페리샤는 고개를 저을 뿐 밝은 미소를 지으며 툭툭-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카트라도 바쁘니까요! 혼자서도 충분하니 걱정 마세요!”

탕-

애써 밝은척하며 닫은 탓에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신이 저질러놓고 어깨를 움츠린 페리샤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허리를 펴고 정치학 가정교사가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탈선하려는 생각을 정리해서 그런 걸까? 자신이 새로워진 것만 같은 생각에 신난 페리샤는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하루의 시작은 최악이였지만 페리샤의 새로운 시작은 최고였다.

아니, 최고였었다.

“하앗...”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아가씨.”

응접실이 있는 층으로 향하자마자 카사노와 마주친 페리샤는 뱀앞에 놓인 개구리의 기분으로 꿀꺽- 입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냥,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괜히 어젯밤 그의 품에 안겨 악기처럼 조율 당한 그 기억이 떠오른 페리샤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 페리샤의 반응에 카사노는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다가오는 발걸음에 맞춰 물러난 페리샤는 턱- 계단 손잡이에 맞닥뜨렸다. 더 물러날 곳이 없어진 페리샤는 데굴데굴 연하늘빛 눈동자를 굴리다가 꾸욱- 눈을 감고 성큼성큼 카사노에게 다가갔다.

‘잊자, 없던 일로 하고 더 이 남자한테 엮이지 말자. 난 휘슬남작가의 장녀로서 이뤄야 할 게 많아.’

‘그럼 내 행복은?’

‘쾌락이 행복은 아니잖아. 아버님 어머님이 만족할만한 딸이 되면 분명 행복해질 거야.’

‘정말 그럴까? 귀족 생활의 장기말인 인생이 행복해져? 직위를 이용해 여인을 품는 아버님과 그에 맞서 외도를 저지르는 어머님 밑에서 행복해진다고?’

휙- 휙- 카사노와 만났을뿐인데 잊고 싶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페리샤는 꾸욱- 드레스를 움켜쥐며 부정적인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한번 불붙은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빈델과 뛰놀다가 발견한 별장에서 아버님의 외도를 목격했잖아. 돌아가서 어머님에게 말한 후 두 분은 싸웠고 어머님은 그 후 외도를 저지르셨잖아.’

‘입방정으로 부모님이 싸운 걸 알고 자책하면서 반성의 의미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됐잖아.’

‘이까짓 일탈쯤은 저질러도 되잖아. 왜 완벽해야 해, 나도 사랑받고 싶은데-’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페리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엉킨 실뭉치 같은 생각을 겨우 정리하고 고개를 든 페리샤는 어느새 성큼 다가온 카사노를 발견했다.

“고민이 많으신가 보군요.”

탁한 눈동자와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새하얀 입술,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과 공허한 표정 모든 게 페리샤의 마음이 아프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지금이 페리샤의 마음을 흔들 기회임을 알아챈 카사노는 스윽-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을 잡아당긴 후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금 식은 손등의 온기가 입술에서 느껴지자 카사노는 입술을 얹은 채 미소를 지으며 페리샤에게 물었다.

“고민을 제가 덜어드리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

‘당신이 내 고민의 주범인데-’

왜 저 얼굴을 쳐내지 못하는 걸까? 페리샤는 꽈악- 자신의 손을 움켜쥔 커다란 손과 손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점찍었다는 듯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원한다- 라는 감정이 훤히 드러나, 오로지 날 바라보는 저 눈이...’

부모님이 원하는 완벽한 딸로 살기보다 그저 한 명의 여자로 보는 저 남자의 품에 안겨있을 때가 행복하단 걸 자각하지 못한 페리샤는 자신을 지배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저항할 뿐 카사노의 얼굴을 쳐내진 못했다.

쪽-

입술소리와 함께 떨어진 카사노는 흔들리는 눈빛에서 감정을 읽고 한걸음 물러나면서 홱- 페리샤를 잡아당겼다.

텁-

“앗!”

강한 힘에 휘둘려 그대로 넘어진 페리샤는 곧바로 카사노의 품에 안겼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넓은 가슴과 꽈악- 강하게 끌어안은 팔에서 자신을 원한다는 감정을 읽은 페리샤는 모든 걸 잊고 카사노의 품에 안겼다.

완벽한 딸을 바라는 부모님도 잊고

어린 시절 옆에서 지켜줬지만, 지금은 거리를 두는 빈델도

언제나 곁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카트라도.

전부 잊은 페리샤는 뺨에서 느껴지는 카사노의 온기만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가 툭- 그를 밀쳤다.

꽈악-

“흐응...!”

하지만 곧바로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는 손아귀에 페리샤는 벗어나지 못했다. 쭙- 쮸릅- 쮸웁- 시종들이 돌아다니는 확 트인 복도에서 카사노의 품에 안긴 채 키스를 나눈 페리샤는 분홍빛 립스틱이 번지는 것도 모르고 강압적인 카사노의 혀를 받아들이며 꾸욱- 그의 발을 밟았다.

주륵-

은빛 실이 늘어나다 끊기며 페리샤의 턱에 달라붙었다. 온몸을 휘감는 열기와 함께 품에서 벗어난 페리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응접실로 달려갔다.

스윽- 입가에 묻은 립스틱을 닦은 카사노는 흔들리던 페리샤의 눈빛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보다 보니 페리샤가 마음에 들어 일은 벌였지만 할 일이 많았다. 저택의 도둑도 잡아야 하고 페리샤의 마음속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빈델의 싹을 완전히 잘라야 페리샤를 온전히 취할 수 있었다.

언뜻 보면 페리샤가 거의 넘어온 것 같지만 시간의 벽은 생각보다 두터울 게 뻔했다. 어제만 해도 처녀막이 신경 쓰여 손가락을 거부하던 페리샤였다. 자신이 주는 쾌락은 좋지만, 몸은 허락 안 한다는 욕심쟁이였기에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페리샤의 뒷모습이 멀어지기 전에 전해야 했기에 카사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페리샤만이 들을 수 있게 조절해 외쳤다.

“오늘 밤에도 찾아오셔도 됩니다.”

카사노의 짓궂은 대답에 페리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벌컥- 응접실 문을 열었다. 수염이 지긋하게 자란 교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페리샤에게 말했다.

“이런, 급하게 오셨나 보군요. 여기...”

교사는 말을 끊으며 거울을 건넸다.

거울속 페리샤는 번진 립스틱과 흐트러진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상기된 볼과 살짝 벌어진 입술을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두 눈은 음탕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

짧게 입 맞췄을 뿐인데, 카트라의 손길로 완벽하게 꾸민 외모가 한순간의 음탕한 여자로 변해버렸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페리샤의 눈엔 그저 음탕한 여자가 거울속에 서 있었다.

‘그냥 즐기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되잖아? 사냥하듯이.’

‘평소에는 완벽한 딸로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되는 거야.’

‘그리고-’

**

[아가씨가 올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팡-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진 카사노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페리샤가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해 보여 미끼를 던졌지만 정말 찾아올까? 결국 참아내면 여태 쏟은 노력도 물거품이고 한번 점찍은 페리샤도 어처구니없이 빈델에게 향할 수도 있다.

팡-

괜히 열 받은 카사노는 이불을 두들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귀족 아가씨라 한몫 잡으려는 생각이었지만 계속 겪어보니 놓치기 아까운 여자였다.

세상일이 어찌 될 줄도 모르고 알 수 없는 예언도 있는 와중 페리샤같은 귀족 아가씨는 그에게 큰 힘이 될 게 뻔했기에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머리 아파?]

“아니, 그냥 너무 대책 없이 저지른 거 같아서.”

카사노는 아무리 생각해도 글렀다는 결론을 내리고 팔로 얼굴을 덮었다. 아무리 페리샤가 음탕하다 해도 입에 발린 소리와 키스 한번 했을 뿐인데 찾아올 리가-

똑똑-

조용히 퍼지는 노크 소리에 팡- 이불을 두드린 카사노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똑똑-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울리는 노크소리. 카사노는 조용히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곤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하하.”

‘한 번만, 한 번만이니까.’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신 찾아오진 않는 거야-‘

페리샤는 한 번만, 한 번만 더 알고 싶을 뿐이니까- 라는 변명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쩍 벌린 뱀아가리에 깊숙이, 깊숙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눈앞의 쾌락을 쫓는 페리샤의 모습에 카사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아가리를 닫으며 페리샤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쿵-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에 문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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