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56화 (156/395)

“그으윽...”

간만에 열심히 움직인 탓인지 이곳저곳 삐걱이는 몸을 가볍게 풀어 준 나는 슬쩍 옆에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창고 안을 둘러봤다.

덜컹- 끼익- 드르르륵-

창고 안을 가득 메운 경비병과 뒷짐 진 채 창고를 둘러보는 휘슬 남작, 그리고 그 뒤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남작의 눈치를 살피는 빈델까지.

어떻게든 잡아내라고 맡겼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단 사실에 분개한 남작이 창고에 갑자기 들이닥쳐 빈델의 호출에 끌려온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고를 둘러보는 남작이 조금 두려워졌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단 말이지.’

그렇다고 시간을 더 주십사- 한다 해도 이미 성에 안 차 찾아온 남작이 쉽게 들어 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에 머리를 굴릴 무렵 목소리를 내리깐 남작이 손을 휘저으며 경비병들을 물렀다.

“그만.”

후우- 탁한 한숨 소리와 함께 몸을 돌린 남작이 빈델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금이 며칠째지? 쥐 새끼를 잡아내긴 커녕 물건이나 계속 도둑맞다니, 머리가 아프군.”

““죄송합니다.””

겹치는 사과에 눈썹을 꿈틀거린 남작은 먼저 내게 한걸음 성큼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주절주절 잔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시에라양과 계약한 분량은 한 달에 다섯상자였지, 하지만 친우의 딸이기에 편의를 봐줬건만 이러면 곤란해.”

편의는 지랄- 월광석 다섯상자도 충분히 많은 분량이었지만 행밀 백작쪽 영향력을 휘어잡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남작은 그걸 알고 시에라에게 무리하게 물량을 추가로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 덕에 시에라가 쫓겨나듯 하루아침에 히네라 마을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남작은 편의라는 포장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남은 기간 내에 남작님 앞에 무릎 꿇려 대령하겠습니다.”

“기대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래,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니 무조건 내 앞에 데려오겠지? 이만 물러나보게.”

꾸벅- 허리를 숙여가며 비위를 맞춘 나는 한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굳은 얼굴의 빈델이 한걸음 나섰고 나와 빈델을 번갈아 보던 남작은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며 축객령을 내뱉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벗어나던 나는 나가기 전 괜한 마음에 창고 안을 한번 들여다봤다. 남작은 익숙하다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목을 돌리며 빈델을 죽일 기세로 노려봤고 들개 앞에 놓인 토끼처럼 목을 내뺀 빈델은 굳은 얼굴로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커다란 문이 닫히고 짜악- 짜악- 짜악- 미약한 파공음이 들려왔지만 밖을 둘러보던 경비병이던 남작과 항상 붙어 있던 늙은 집사던 아무도 남작의 체벌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억 한 켠에 파묻힌 빈델의 문서를 떠올린 나는 짜악- 짜악- 따귀 소리를 들을수록 쥐 새끼의 정체에 가까워지고 있단 확신을 얻은 후 운디네와 페리샤의 다과회를 위해 조용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벅- 저벅- 저벅-

제일 좋은 건 빈델이 물건을 담는 순간을 덮치는 거겠지만 몇 달을 대담하게 털면서 한 번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걸 보면 쉽진 않을 듯했다. 방심시켜야 할지 최대한 상황을 유도해서 덮쳐야할지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남작을 설득시킬 근거는 확실했다. 팔아넘긴 장물들로 번 돈을 어디서 썼는진 몰라도 원인 하나만큼은 확실하니까. 남작에 대한 보복으로 훔쳤을 거란 의혹 하나면 빈델이 어디에 숨던 남작은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빈델을 찾아낼게 분명했다.

저런 부류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대들면 불에 데인 것보다 더 온몸을 뒤틀며 발작하기 마련이었다. 계획을 정리하며 이젠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찰나 저 멀리 저택 앞 공터에서 운디네가 나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아.”

빈델을 낚을 만한 미끼가 저기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운디네 뒤에 서 쭈뼛거리는 페리샤를 발견한 나는 진한 미소를 띠며 둘에게 성큼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

착- 내 품에 엉겨 붙은 운디네는 차가운 몸을 이곳저곳 문지르며 장난치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푸욱-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 숙인 페리샤는 조그마한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필시 어제 일 때문이겠지. 괜히 찔러보지 말고 곱게 보내줄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페리샤에게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다과회는 어쩌시고요.”

“카사노님을 기다리자고 하니... 운디네가 마중을 나가자고 하더라고요.”

확인차를 위해 페리샤의 뒤를 지키는 카트라를 바라보자 끄덕- 그렇다는 호응을 받아 낸 나는 품속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을 요구했다.

[응, 다 같이 즐겨야지- 얼른 가자-!]

“제가 끼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세분이서 오붓하게...”

괜히 같이 있었다가 어색해하는 페리샤가 거리를 더 벌릴걸 우려한 나는 운디네를 놔주며 다과회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꾸욱- 내 소매를 붙잡는 손길에 그대로 멈춰 섰다.

“아, 아뇨. 괜찮답니다.”

꾸우욱- 그렇게 세진 않지만 떠나진 못하게 잡아당기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나는 궁금하단 표정을 띄우고 페리샤를 바라봤다. 스윽- 푹 숙인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춘 페리샤의 미소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붙잡은 이유를 알아냈다.

짝사랑한다는 빈델이 아닌 오로지 눈앞의 나한테 보이는 여자로서의 얼굴, 준비된 암컷의 기대감 어린 미소에 숨겨진 뜻을 파악한 나는 성큼- 한걸음 다가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네, 그으- 카트라! 오늘은 어디에 준비했죠?”

“오늘은 아가씨 전용 응접실에 준비해놨습니다.”

“그래요! 오, 오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로즈티랍니다-”

타다닥- 아가씨- 하며 부르는 카트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페리샤는 재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까르륵- 미소를 띤 운디네도 하늘을 날며 페리샤의 잔영을 뒤쫓았다.

**

[나도 언니처럼 이런 방 갖고 싶어-]

“후훗, 운디네가 내 동생이 되면 이것보다 더 큰 방도 줄 수 있는걸?”

[정말? 언니 한 명 정돈 더 늘어나도 상관없는 거지?]

휙- 나를 돌아보며 뼈있는 말을 던지는 운디네의 질문에 농담이겠지? 하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봤지만 진심 그 자체인 눈망울에 땀을 삐질 흘린 나는 말없이 촉촉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대답을 피했다.

“아가씨.”

그런 운디네를 귀엽다는 듯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지켜보는 페리샤에게 카트라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곤 속닥속닥 귓속말을 전했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무려는 순간 페리샤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하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또륵- 눈동자를 굴린 카트라는 페리샤와 나를 번갈아 보곤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예, 잠시 확인해야 할게 있어 아가씨께 말씀드리고 먼저 가보려 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꾸벅- 가볍게 인사를 건넨 카트라는 망설임 없이 응접실을 벗어났다. 텅 빈 접시와 싸늘하게 식은 차 주전자를 보며 어떻게 치울지 가늠하고 있을 무렵 꾸우욱- 옷소매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음? 아가씨?”

쭈욱- 쭈욱- 장난치듯 몇 번이고 잡아당기며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던 페리샤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커다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 기껏 권해줬는데 거절한 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요-”

그 표정은 결심의 결과였구나. 흘러나오는 진한 미소를 주체하지못한 나는 저절로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나를 올려다보는 페리샤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더군요. 아가씨께 무례를 저지른 게 아닌가...”

“카사노님은 제가 몇 번이나 지켜본걸 알고 계셨죠...?”

텁- 텁- 자신 몫의 과자를 집어먹는 운디네였지만 쫑긋이는 귀는 여실히 나와 페리샤의 대화에 집중한다는 증거였다. 나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운디네에게 보내고 눈앞의 페리샤에게 집중했다.

“네, 하지만 아가씨 나잇대 숙녀분들께는 흔한 일이기에 아무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요.”

“......”

“......”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연하늘빛의 탁 트인 눈동자는 맑게 개인 초원의 하늘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가만히 바라볼 수록 갖고 싶어지는 눈동자의 마력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초대해도 될까요?”

“초대라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나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흐으...”

데굴- 데굴- 데굴- 사랑하는 법이란 문장에 연하늘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긴장한 걸까? 입술이 말랐는지 분홍빛 혀로 자기 입술을 몇 번이나 축인 페리샤는 한참의 고민 끝에 촉촉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부탁해도 될까요...?”

스륵- 내 소매를 붙잡은 페리샤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텁-

가볍게 붙잡은 나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페리샤의 손등을 천천히 내 입술을 향해 들어 올렸다.

쪽-

단둘만의 대화로 가득 찬 응접실에 입술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잘 짜인 거미줄처럼 손가락을 쫙 펴낸 페리샤는 내 입술이 맞닿은 손등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손을 거둔 페리샤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다 천천히 손등을 자기 입술을 향해 끌어당겼다.

"후으..."

쪽...♥

내 초대장 위에 페리샤의 인장이 조용히 맞닿았다.

[그럼 같이 가는 거야?]

페리샤의 수락에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운디네는 잔뜩 들떴는지 거꾸로 앉은 의자를 마구 들썩이며 페리샤에게 물었다.

"...응..."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웠는지 새하얀 페리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이처럼 들뜬 운디네만이같이 간다며 의자를 들썩이기 시작했고 페리샤는 자기 선택이 곧바로 후회됐는지 작은 입술을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텁-

"아..."

부드러운 페리샤의 턱을 엄지로 쓰다듬은 나는 그대로 잡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보다 탁해진 듯한 연하늘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저는 아가씨가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렸으면 합니다."

"...네, 잘못된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럼 저희 방으로 가기 전 간단한 것부터 가르쳐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벼운...?"

의문 어린 페리샤의 목소리를 들으며 꾸욱- 붙잡은 턱을 살짝 당기기 시작한 나는 방황하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들여다 봤다.

하아-

하아--

달콤한 로즈티 향이 내 코끝을 맴돌았다. 스읍-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로즈티의 향과 들뜬 아가씨의 향기가 뒤섞이는 기분을 만끽한 나는 살짝 벌어진 입술에 그대로 입술을 덮었다.

쪼옥...

츕-

누군가 봤다면 실수로 한 게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그대로 떨어졌다. 주륵- 촉촉한 페리샤의 입술에서 늘어난 투명한 실이 툭 끊기며 페리샤의 턱과 내 손등에 달라붙었다.

끊긴 침줄기처럼 페리샤가 배움이라는 거미줄을 끊고 내게서 벗어날수 있을지 궁금해진 나는 말없이 페리샤와 운디네의 등을 떠밀며 그녀들을 일으켰다.

황홀한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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