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듣고 있어요?”
“네, 듣고 있다니까요.”
앙칼진 목소리로 꾸짖는 시에라에게 어영부영 대답한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페리샤를 바라봤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오호호호- 하는 웃음소리를 내던 페리샤는 내 시선을 눈치채곤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곤 시에라만을 바라보며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달그락
“후릅...”
시에라와의 섹스를 페리샤에게 들킨 지 일주일이 지났다. 페리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시에라에게 양해를 구해 오전 일정을 같이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페리샤와의 거리감은 좁혀지긴커녕 더욱 벌어졌다.
일주일 전과 똑같이 쑥스러워하며 나를 피하는 그녀의 반응은 조금 상처였지만 외간 남자에게 자위했단 사실을 들켰으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긴 힘들겠지.
“차, 차는 입에 맞나요?”
카트라가 타준 홍차의 향을 음미하는 그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툭 나를 두드렸다. 검지로 자신의 손등을 문지르며 꼼지락거리던 페리샤가 내 눈을 피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네, 향기롭고 따뜻하네요. 쌓인 피로를 녹여주는 포근함이 느껴지네요.”
“그런가요...”
예의 있게 표현했다고 생각했지만 페리샤는 툭 대화를 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신 앞의 찻잔을 들어 똑같이 한 모금 들이켰다. 찻잔을 어찌나 기울였는지 자그마한 얼굴을 찻잔으로 덮는 수준이 됐을 때 툭툭- 내 옆의 시에라가 나를 건드리며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스륵
“혹시 아가씨께 무슨 무례한 짓을 저질렀어요?”
눈치 빠른 시에라가 보기에도 페리샤의 반응은 뭔가 석연치 않았는지 곧바로 용의자인 내게 질문하는 그녀의 유능함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비밀이라고만 말했고 탐탁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노려보던 시에라는 쿡- 구두 굽으로 내 발을 밟곤 흥- 하는 귀여운 제스처와 함께 몸을 돌렸다.
“후아... 그, 카사노님은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인가요?”
페리샤의 질문에 슬쩍 고개를 돌려 응접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초침과 자리 잡은 분침을 보니 창고에 가 빈델에게 오늘의 보고를 들을 시간이었다. 내가 갈 시간을 외우고 있다니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페리샤를 향해 인사했다.
“아가씨 덕에 늦지 않게 가겠군요.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럼 조심히 가시길...”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똑같이 꾸벅 인사를 건네는 페리샤, 몸을 돌린 나는 새침한 눈으로 흘겨보는 시에라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그대로 방에서 나왔다.
**
페리샤의 압박 아닌 압박에 응접실을 떠나는 카사노를 지켜보던 시에라는 톡- 자신의 손등을 두드리는 작은 울림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페리샤가 입을 앙다물고는 무척이나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질문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제 눈치 볼 것 없이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으셔도 좋답니다.”
일주일간 수많은 티타임과 잡담을 나눈 사이기에 어느 정도 편해졌지만, 아직까진 서로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그게 어색했던 시에라는 지금처럼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페리샤의 행동이 고맙기만 해 무슨 질문을 하든 적극적으로 대답해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이내 페리샤의 조그마한 입에서 뱉어진 질문은 조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 시에라님은 카사노님과 어느 정도까지 맺어지셨나요?”
돌려 말하지만 누가 봐도 의도가 다분한 질문, 깜짝 놀란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페리샤의 뒤에 서 있던 카트라를 바라봤고 주인의 질문을 해석한 후 어느 정도 수위가 적당할까 결론을 내린 카트라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고 시에라에게 신호를 줬다.
‘하지만 그런 게 더 곤란한데요...’
좋을 대로 말하라 해도 이 아가씨한테 수위 높은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고민하는 그때 새빨간 사과처럼 얼굴을 푹 익힌 페리샤가 꾸물거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엮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서, 성교한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답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해주셔도 상관없어요.”
“아가씨.”
성교라는 단어에 카트라는 눈을 부릅뜨며 주의를 줬다. 휘슬 남작가의 장녀 입에서 사담으로 나올 단어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업 관계로 엮인 상단주에게 그런 짓궂은 질문은 매우 곤란했다. 하지만 카트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힌 시에라가 역으로 카트라를 제지하며 페리샤에게 물었다.
“그, 말씀은 드릴 수 있지만... 혹시 궁금해하시는 이유를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분명 첫날이나 그 후에도 풋풋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페리샤였다.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연애에 관심이 짙어 보이더니 기어코 이런 질문까지 자신에게 던졌다. 조금씩 연결되는 단서에 맞춰 카사노를 꺼리던 것까지 떠올린 시에라는 기어코 무례를 저질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페리샤의 대답을 듣고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으응, 그게... 사이 좋아 보이는 두 분을 보니 저도 그렇게 되고 싶고... 서로 숨김없이 사랑한다는 감정을 전하는 거 같아서요...”
살랑이는 금빛 머리칼을 움켜쥔 페리샤가 양쪽으로 교차하며 자신의 입을 가리곤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인형처럼 귀여운 모습에 어머어머- 작게 탄식한 시에라는 되도록 선정적인 표현을 자르고 잘라 생각을 정리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랑 처음 만난 건 일 때문에 만났어요. 이후에 그 남자의 요청으로 계속 만나게 됐고... 그, 그러고 따라와달라는 부탁에 그 남자를 따라다니고 있어요.”
자신의 몸을 달라고 부탁하던 뻔뻔한 얼굴이 떠올라 조금 열이 오른 시에라였지만 바람처럼 불어오는 기억을 하나하나 곱씹을 때마다 카사노에 대한 짜증이 금세 가라앉았다. 자세히 설명하기엔 카사노의 쓰레기 짓으로 점칠 된 만남이었기에 두루뭉술 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페리샤의 반응을 보니 상관없는 듯 보였다.
“와아, 카사노님이 자신을 따라와달라고 부탁했나요? 그럼 두 분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신 거군요.”
감정보단 육욕, 성욕이라고 봐야 하나? 페리샤의 순수한 질문에 골머리를 앓던 시에라는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넘겼다.
“저도, 그런 서로를 위한 사랑을 하고 싶어요...”
“아가씨도 사랑하는 분이 계신가요?”
이런 질문을 했단 것 자체가 이미 임자가 있다는 신호겠지만 시에라는 혹시나 해 질문을 던졌다. 슬쩍 고개를 돌린 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는 카트라의 허락에 살짝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곤 드문드문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희 남작가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릴 적부터 같이 지냈고... 저를 계속 챙겨주고 아껴줬답니다...”
부끄러워하는 페리샤가 던진 단서를 단숨에 조립한 시에라는 창고 물자 정리를 맡았다던 빈델을 떠올렸다. 이제야 당찬 아가씨처럼 굴던 모습이 이해된 시에라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페리샤를바라봤다.
“혹시 누군지 맞춰도 될까요?”
수염처럼 머리칼로 입을 덮은 페리샤에게 물은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카트라가 대신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큼큼- 헛기침을 뱉은 시에라는 잔뜩 숙인 페리샤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곤 속삭이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빈델이라는 집사, 맞나요?”
“네헤에...”
무뚝뚝한 그에 대한 서러움을 전부 잊은 페리샤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수줍게 대답했다. 잔뜩 수줍어하는 아이 같은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시에라는 아예 건너가 페리샤의 옆에 앉고는 여린 그녀의 몸을 살짝 끌어안고 질문을 던졌다.
“뭔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은 있었는데 정말이었네요. 언제부터 좋아하셨나요? 네?”
“그게, 어릴 적부터 저를 챙겨주고... 덜렁이 같은 저를 이끌고 매번 도와준 게 빈델이여서...”
분명 먼저 질문을 던진 건 페리샤였지만 역전된 질문 관계는 몇 번의 문답이 오갈 때까지 되돌아오지 않았다. 주로 어떤 점이 좋았나, 아직도 그런 마음이 큰가, 연인이 되고 싶은가 여러 질문을 던졌음에도 페리샤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매번 저를 다정하게 챙겨주고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점이 가장 좋았답니다...”
“사실 빈델을 제외하면 또래가 아무도 없고, 친하다고 할만한 사람이 카트라뿐이라... 네. 빈델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연인이 되고 싶지만, 빈델은 저에 대한 마음이 없는 거 같아서...”
“그런,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마음이 없다고요?!”
히네라 마을에서 매일같이 아낙네 같은 대화를 나누는 레이첼과 하루나의 화법이 전염된 것처럼 굴던 시에라는 자신이 너무 들떴단 사실을 깨닫고 헛기침과 함께 들뜬 감정을 조금 가라앉힌 후 자신이 알고 있는 남성의 특징을 정리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빈델이란 집사분은 조금 무뚝뚝해 보이던걸요, 맞나요?”
콩깍지 씐 사람의 대답은 도움이 안 됐기에 페리샤의 뒤에 서 있던 카트라에게 질문을 던진 시에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트라의 행동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챙겨주고 지금도 챙기고 도와주지만, 매번 무뚝뚝하게 구는 남자, 분명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할 텐데...
“남자라는 족속들은 마음이 없으면 행동하지도 않아요. 분명 아가씨에 대한 마음이 있을 거예요.”
“그런, 가요. 그렇지만 그... 얼마 전 제가 같이 돌아가자 해도 먼저 가라고만 하고... 저를 밀어냈어요.”
일이 있다면 자신을 밀어낸 빈델을 떠올린 페리샤는 그가 보인 야속함에 다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러움에 몸부림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어...”
자기도 모르게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던 카사노를 떠올린 페리샤는 고개를 붕붕 흔들고 박제처럼 남은 그의 얼굴을 애써 흩트렸다. 지금은 빈델에 대한 상담이었을 텐데 카사노의 얼굴이 왜 떠오른 걸까? 자기도 모르게 남은 카사노의 잔향을 떠나보내기도 전에 시에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나이대 남자들은 다 그래요, 무뚝뚝하고 표현도 잘 안 하고... 내 마음도 모르고 자기들 좋은 대로 행동하죠.”
그 나이대 남자라고 해봤자 호위기사와 카사노밖에 경험해본 적 없는 시에라지만 허세를 덧붙여페리샤에게 떵떵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허세 섞인 대답은 페리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 충분했다.
“저, 정말인가요? 저를 사랑해도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나요...?”
“그, 그게...”
경험한 연인이라곤 카사노밖에 없는 머리를 팽팽하게 굴린 시에라는 이미 주사위는 내던졌단 생각과 함께 여태 겪은 카사노의 행동을 전부 되새기고 분석하길 반복하다 겨우 쥐어 짜낸 결론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페리샤에게 대답했다.
“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무뚝뚝하다면 분명 커다란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게 뻔해요. 이럴 땐 여인 된 도리로서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된답니다.”
“그런가요!”
"그리고 그렇게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가 곁에서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답니다."
"아... 그건, 그런거 같아요..."
"그렇죠? 후훗, 그남자도 매번 무뚝뚝한 얼굴로 있는 주제에 엉겨붙거나 필요할땐 위로해주고 할건 다 한답니다."
"와아, 시에라님은 그런 면에 반한건가요?"
그것보단 성욕에 굴복한게 좀 더 컸지만 시에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틀어버리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줍어하는 미소와 새빨개진 시에라의 얼굴을 살핀 페리샤는 카사노의 침실에서 목격한 시에라의 치부를 떠올리곤 똑같이 고개를 푹 숙인채 침묵을 유지했다.
스윽- 조금 어지러운 여인들의 문답을 듣던 카트라는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소파에 딱 붙어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아가씨를 내려다봤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이 들어도 이상한 조언이었지만 아가씨가 만족했으니 시종 된 도리로서 넘겨야겠단 다짐과 함께 아가씨들의 티타임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