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페리샤는 솔직히 말해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와 붉어진 얼굴, 얼마나 앙다물었는지 핏기가 가신 입술과 부어오른 눈가는 그녀가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알 수 있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괜찮으십니까?”
상처 입은 강아지처럼 우울함 가득한 눈망울을 그렁그렁 물들이는 모습에 나는 결국 페리샤에게 괜찮냐는 안부를 물었다. 먼저 방에서 기다리겠다는 시에라를 보내고 할 것도 없어 산책이나 즐기려고 저택 주변을 돌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의 페리샤를 발견할 줄이야.
“괜찮, 아요...”
툭- 손을 뻗어 눈가를 닦는 손수건을 치워낸 페리샤는 애써 괜찮다며 대답했지만,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파들거리는 입술과 움찔거리는 눈가,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연신 히끅- 딸꾹질 하듯 숨을 고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실연당한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썩 편하진 않군요.”
“흡, 왜, 안 편한 건가요?”
뭔가 페리샤의 역린이라도 건드린 걸까? 내 손을 밀어낸다거나 한걸음 물러나며 밀어내던 페리샤는 걱정이 된다는 내 말에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편의를 봐주고 손님 대접을 해주신 분이니까요.”
“제 가치가 그것뿐인가요? 그저 남작가의 아가씨로서 챙겨준 사람이기에 은혜를 갚기 위한 수단일 뿐?”
선로를 벗어난 폭주 기관차처럼 내게 달려든 페리샤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갈 곳 잃은 분노를 전부 내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온갖 설움과 갈 곳 잃은 분노를 타인에게 향하게 하는 사람들은 몇 번이고 봐왔기에 제법 익숙했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페리샤의 공격을 가볍게 흘렸다.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뭐라 할 말도 없고요.”
“하, 그래요, 그렇겠죠! 친절하고 배려 깊은 건 그저 아버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가만히 서서 서럽게 우는 사람을 위로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에요.”
“......”
계속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서 전해주자 잔뜩 성을 내며 나를 쏘아붙이던 페리샤의 언성이 일순간 뚝- 멎어버렸다. 마취라도 당한 듯 싸늘하게 굳어버린 페리샤를 내려다보며 나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가씨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던 자유지만 저는 그저 힘들어 보이는 아가씨를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
또륵- 그렇게 펑펑 울고도 흘릴 눈물이 남은 걸까? 토실토실한 페리샤의 볼 위로 가느다란 눈물이 주륵 흘러 말없이 손수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준 나는 한걸음 물러나 등을 돌리며 한 번 더 페리샤에게 말했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원래 대화를 나눠야 뭐든 다 아는 법입니다.”
“속에 담아만 두지 마시고 힘든 고민이나 곰곰이 쌓아둔 생각을 한 번쯤은 표출하세요.”
팔랑- 페리샤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이 쌀쌀한 저녁 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하얀 손수건을 꽉 움켜쥔 페리샤는 고개를 숙이거나 틀지도 않고 꼿곳이 목을 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은 전부 전해서 그런가? 괜히 개운해진 나는 멍하니 서 있는 페리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처음엔 마냥 철없고 밝아 보이는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있다니 조금 놀랐네. 귀여워 보이기만 했던 페리샤가 악을 쓰며 내게 달려들고 비난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어차피 남작가에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손대볼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카페트가 깔린 나무 계단을 한층 한층 여유롭게 올랐다. 힐끔거리는 사용인들을 지나쳐 방 앞까지 왔을 때쯤 내 방앞에 익숙한 여인이 서 있는걸 발견해 나는 그대로 걸음을 서둘러 다가갔다.
“일찍 왔네요.”
“뭐야, 어디 갔다 왔어요? 몇 번이나 노크했는데.”
새하얗지만 드문 드문 강렬한 장미 자수가 박힌 가운을 걸친 시에라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아무래도 내가 있을 거라 생각해 그대로 방에서 나온 모양인데, 얼굴이 붉은 걸 보니 복도를 지나치는 사용인들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나 보다.
“미안해요, 잠시 관심 생기는 일이 생겨서.”
“하, 당신이 관심이라 해봤자 여자겠죠. 맞죠?”
“오...”
“맞아?”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며 말끝을 흐리자 곧바로 냉혹한 목소리가 푹- 내 귓가를 찔렀다. 생각보다 무서운 반응에 일단 두 손을 들고 시에라를 진정시킨 뒤 이실직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아가씨가 밖에서 울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손수건만 건네주고 왔어요.”
“흐응, 진짜? 손수건만 건네주고 왔다고?”
본인 딴엔 꽃피는 의혹 탓에 압박하기 위해 반말을 하면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반말을 건네며 나에게 다가오는 시에라는 한껏 관능적이었다. 약간 젖은 촉촉한 갈색 머리칼과 막 씻고 온 탓에 뽀얀 피부와는 상반되는 싸늘한 표정과 틱틱대는 말투, 나는 피어오르는 흥분감에 스윽- 얇은 허리에 팔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됐고, 일단 방으로 들어갈까요?”
툭- 차가운 손이 내 가슴팍에 얹혔다. 헤릅- 촉촉해 보이는 분홍빛 혀가 도톰한 붉은 입술을 한차례 핥고 그대로 숨어버렸다. 음탕한 초록빛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던 시에라는 벽을 기어 다니는 뱀처럼 손끝으로 내 가슴을 쓰다듬더니 덜컥- 문고리를 돌리곤 내게 말했다.
“더 자세한 건 침대에서 물어볼 테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
어느새 탁한 회색빛 연기 같던 하늘이 완전히 새까매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고민을 겨우 정리한 페리샤는 고이 접은 손수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슥- 끌어당겨 오똑한 코에 얹고 그대로 냄새를 맡았다.
‘뭔가 진정돼...’
그 남자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줄 때부터 미약하게 풍기던 향기가 폐부를 타고 온몸을 휘젓자 안도감이 조금 생겨났다. 알 수 없는 기분을 애써 떨쳐낸 페리샤는 손수건을 귀중품 모시듯 주머니에 넣고 팡팡- 한차례 두들기고 나서야 한참을 서 있던 자리에서 떠날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택으로 향하는 길바닥을 구르는 자갈들을 밟으며 퍼지는 돌 소리에 맞춰 통통 튀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했다. 주로 무시한 생각은 왜 갑자기 북받쳐서 탓하는 말을 했냐와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떼쓸 이유가 필요했냐였지만 페리샤는 무시했다고 생각하면서 한 번 더 떠올리는 것만으로 과거의 자신을 혼내주고 싶었다.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펑펑 울기에 다가와서 위로를 해준 것뿐인데 아버지한테 잘 보이기 위해 이러는 거냐는 둥 필요 없다며 악을 쓰고 달려들다니, 예의가 없어도 한참이나 없었다.
자신을 지원해주지만 모든 교육의 경과를 조잘거리며 떠들 때마다 보고서를 받아넘기듯 무심한 태도로 대하는 아버지와 언제나 남작가를 대표하는 장녀이니 품위를 잊지 말라며 자신을 다그치는 어머니, 그리고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한다며 깊은 애정표현을 한 번도 하지 않는 빈델까지. 그들에게 받은 상처를 카사노에게 전부 쏟아내 버렸다.
‘그렇지만...’
카사노는 전부 받아줬다. 그렇게 생각하려면 생각하라고,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 건 그저 위로받기 위한 사람이 울고 있어서 말은 건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모두의 기대와 믿음보다 더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페리샤는 생각했다.
‘사과, 해야겠지...’
끝까지 자신에게 사과를 듣지 않고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떠나던 카사노를 떠올린 페리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심장이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생각과 고민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철부지처럼 군 자신이 오히려 평민이고 여유롭게 받아넘긴 카사노가 귀족의 의무를 다한 것만 같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만큼은 실천하고 싶었는데...!’
교양 수업을 들을 때 처음 배웠던 사상, 자신의 영혼을 관통한듯한 영롱한 울림에 매혹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것만, 자기 관리가 서툴러 마음의 빈틈이 생긴 오늘 결국 스스로 어겨버리고 말았다.
저벅 저벅 저벅-
열정적으로 인사하는 사용인들을 지나치며 손님방이 모인 복도에 올라선 페리샤는 흐읍-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음을 정리한 후 살금살금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카사노의 방에 향했다.
“응...?”
늦은 밤이 돼가기에 복도의 불은 전부 꺼져있었다. 사용인에게 괜찮다고 일렀기에 길게 뻗은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달빛이 비치는 창문이 아니었다면 무저갱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미세하게 새어 나온 불빛이 칠흑 같은 복도를 달빛과 함께 밝혀주었다.
쿵- 쿵- 쿵-
이상하리만큼 크게 뛰는 심장과 온몸을 지배하는 짜릿한 육감에 페리샤는 나중에 다시 찾아올까 라는 고민을 잊어버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카페트 위를 거닐며 살짝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핑핑 도는 머리와 다르게 그 어느 걸음보다 느리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페리샤는 창고에 드나드는 도둑은 몽유병에 걸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하아...”
뭐에 홀린 듯 원치 않아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향해 발을 움직이던 페리샤는 점점 문에 가까워질수록 복도에 깔린 침묵을 뚫고 자신의 귀를 자극하는 미약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읏, 흐... 아... 호.... 흥...”
꿀을 잔뜩 담아 흩뿌리는 것처럼 끈덕지고 질척이는 음성이 자신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꿀꺽- 입안 가득 고인 호기심을 삼킨 페리샤는 더욱 숨을 죽여 불빛과 신음이 새어 나오는 문에 확실히 다가갔다.
“흐응, 후으, 후윽, 하아앙...! 조아, 후읍, 그흐으응...!”
때로는 간드러지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마지막은 애절하게 목 끝을 긁으며 음탕한 신음을 내뱉는 여인의 목소리에 페리샤의 몸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짚고 시야를 낮춘 페리샤는 살짝 열린 문틈 사이에 홀린 듯이 눈을 가까이 댔다.
-찌걱 찌걱 찌걱 찌걱
“후으, 으흐응, 시러엇, 흐그윽, 가슴, 음탕한 가슴을 잔뜩 괴롭혀엇...!”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두툼한 손가락이 탄력 있는 가슴 끝을 잔뜩 희롱하고 있었다.
“저는 음탕한 암캐입니다, 주인님의 손길이 아니면 혼자 절정하지도 못하는 칠칠맞은 암캐입니다. 라고 해보세요.”
울고 있는 사람을 지나칠 수 있겠냐며 자신을 위로하던 낮으면서도 다정한 그 목소리는 자신의 손에 헐떡이며 엉겨 붙는 여인을 희롱하기 바빴다.
“주인니히임, 흐응, 호오오옷...!”
촤아악- 단단한 광석 같은 그의 몸이 부드러운 여체에 부딪힐 때마다 시에라의 음부에서 투명한 물줄기와 끈적한 꿀물이 서로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만이 하는 행위라고 배웠던 페리샤는 둘의 사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애써 위안했다. 그들의 사생활이기에 지켜줘야 했고 더 엿보는 건 귀족으로서의 수치라고 페리샤는 생각했다.
텁-
문과 바닥을 짚고 몸을 좀 더 방 쪽으로 기울인 페리샤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가가 뻑뻑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불편함을 해소할 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흐으응...”
어릴 적 잊으려도 잊을 수 없던 음탕한 추억이 새로운 기억에 덮어씌워 지기 시작했다. 떠나지 못하던 소녀는 여인이 됐고 난생 두 번째로 보는 음탕한 광경을 목도한 여인은 소녀일 적처럼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연인의 사랑에 남몰래 승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