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43화 (143/395)

어째선지 말이 없어진 페리샤와 그런 아가씨를 흘겨보는 카트라와 함께한 귀갓길은 싸늘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괜히 무리해 입을 열기도 그런 게 입술을 앙다문 채 고민에 잠겨있는 페리샤의 모습을 보니 괜히 말을 걸었다가 더 파국으로 치솟을 것만 같았다.

다그닥- 다그닥-

가시방석 같은 자리도 잠시, 한시도 다리를 멈추지 않은 말들 덕에 금방 저택 근방까지 도착했다. 연신 코를 움찔거리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내릴 준비를 하던 나는 의문의 남성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잠시 멈춰 섰다.

“빈델!”

선두에 서있던 페리샤가 숲이 울릴 정도로 크게 눈앞 남자의 이름을 외치며 말에서 떨어지듯 내렸다. 이마를 붙잡은 카트라는 익숙하다는 듯 백마의 투레질을 지켜보고 목을 쓰다듬으며 두 마리의 말을 이끌고 저택으로 향하려다 나에게 다가왔다.

“마침 담당 집사님께서 오셨군요. 제가 손님의 말까지 이끌 테니 남아서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시면 될 거 같습니다.

꾸벅 인사를 건넨 나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연신 종달새처럼 쫑알거리며 빈델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는 페리샤와 무뚝뚝하게 받아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냥 따라갈걸. 후회가 됐었다.

“반갑습니다, 남작님께 창고 의뢰를 받은 카사노입니다.”

후회는 후회로 남기고 인사는 해야 하기에 억지로 둘에게 다가갔다. 대화를 방해받았다. 생각했는지 페리샤는 불퉁한 얼굴로 땅을 부츠 앞굽으로 긁으며 나를 바라봤고 빈델은 오히려 감사하단 미소로 나를 반겼다.

“아! 반갑습니다. 창고 물자 관리를 맡은 빈델입니다. 아직 정식 집사가 아니라... 하하하.”

“그랬나요? 저는 영락없이 집사님인 줄 알고.”

“그렇나요?! 확실히 저희 빈델이 늠름하고 어른스럽기도-”

“아가씨.”

내 칭찬에 우쭐한 페리샤가 한 발짝 나서 작은 체구로 빈델을 가리며 내게 다가왔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 대한 칭찬을 한껏 떠벌리려던 페리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고는 헤헤- 하는 미소와 함께 다시 한걸음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손님 앞에서 추태를...”

“아닙니다, 추태 축에도 못 끼는 모습인걸요, 친해 보이셔서 오히려 보기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내 변호에 처쳐있던 페리샤의 어깨가 한껏 치솟았다. 참 보는 그대로인 여자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왔다. 은은한 미소를 띠며 페리샤를 보고 있을 무렵 저벅- 한 발짝 다가온 빈델이 나를 올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페리샤 또래라고 들었는데 나와 큰 차이 없는 키를 보니 신기했다.

“이런, 이야기가 자꾸 새서 죄송합니다. 남작님이 창고에 드나든 도둑을 잡아달라 의뢰하셨다고...?”

말끝을 흐리는 빈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툭 치며 물었다.

“네, 그런데 마냥 도둑이 있다고 하셔서 조금 고민이네요. 어떻게 처리해야 할인지도 모르겠고.”

“가장 좋은 건 도둑을 잡는 거지만... 저도 몇 달째 잡지 못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몇 달째 잡지 못했다니, 적폐인가? 뭉게뭉게 샘솟는 실없는 생각을 애써 흘린 나는 옆에서 빈델을 다독이는 페리샤를 힐끔 바라봤다.

“빈델이 잘못한 게 아닌걸요! 저희 남작가의 창고에 몇 달째 몰래 들어와 하나둘씩 물품을 훔쳐 가는 그 도둑이 잘못된 거죠!”

조목조목 정리할수록 그의 실책임이 틀림없는 사실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위로 같은 부관참시를 애써 흘려넘긴 나는 일단 궁금한 점을 그에게 물었다.

“경비가 있습니까?”

“당직으로 경비를 세우고 교대하며 맡고 있습니다. 저도 중간중간 교대자들이 가져가는 게 아닌가 확인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남작에게 명령받아 경비 서는 경비들이 훔쳐 갈 리는 없을 테고, 그럼 외부인뿐인가? 사실 창고의 보안을 맡는 경비를 의심할수록 오히려 도난품만 늘어날 게 뻔했다. 밤낮을 번갈아 가며 지키는데 오히려 도둑으로 의심한다면 누가 열심히 경비를 설까?

“들은걸론 경비들이 범인일 린 없다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부인의 행적이 아닐까 확신이 들고 있고요.”

“도둑이 드는 주기는 혹시...?”

내 질문에 약간 울상이 된 빈델이 하아-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주기적으로 오진 않습니다. 연달아 물품을 훔쳐 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을 조용히 보내다가 털어갈 때도 있습니다.”

밤낮으로 경비를 제치고 본인이 원하는 주기마다 창고에 침입해 물품을 훔쳐 가는 외부인인 도둑이라... 골치 아픈 의뢰에 이마를 손톱으로 긁으며 고민하고 있을 무렵 빈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남작님께서도 대량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 이상 너무 기를 쓰고 잡으려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밀 백작님께 드릴 선물까지 없어지면 어쩌냐고 고민하시더군요.”

아- 선물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빈델의 얼굴이 굳었다. 정식 집사도 아닌데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면 목이 날아갈 게 뻔하니 그렇겠지. 그에 대한 언급은 들은 바가 없었는지 싸늘하게 굳은 얼굴의 그를 보고 있자 하니 조금 불쌍했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실책으로 손해가 막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따로 창고에 불시로 검사한다거나 흔적이 없는지 살펴볼까 하는데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제가 찾은 흔적이나 물품 목록을 정리해서 전해드릴 테니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음, 그리고...”

내가 전한 말이 조금 충격이었는지 도둑을 잡는데 진심이 된듯한 빈델과 대화를 나누는 중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페리샤는 옆에서 계속되는 업무 대화에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기에 다른 누군가임이 분명했다.

“뭐야, 다른 사용인들은 다 돌아왔던데 당신은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시에라.”

남작이나 다른 사람들도 없으니 경칭은 생략해도 되겠지? 단정해 보이는 검정색 천치마와 조금 커다란 흰색 셔츠를 걸치고 다가온 그녀에게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그거 제 옷 아니에요?”

바로 옆에 다가온 시에라를 보고 나서야 그녀가 걸치고 있는 셔츠가 내 것임을 알아챈 나는 지나가지 않고 언급했다. 소매를 몇 번이나 접고 기다란 셔츠 자락을 치마 안에 밀어 넣은 모습이 귀여워 언급했지만, 시에라는 부끄러웠는지 확 붉어진 얼굴로 부정했다.

“뭐래요? 자의식 과잉인가 봐, 셔츠가 다 셔츠죠 하 참- 아 더워-”

펄럭펄럭-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는 시에라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빈델의 뒤에 서있던 페리샤가 부럽다는 눈으로 시에라를 바라보다가 빈델을 힐끔 바라봤다. 애타 보이는 모습에 페리샤가 말한 남자가 빈델임을 확신한 나는 이제야 그녀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무는 이유를 알아냈다.

“저희 아가씨도 왔으니 일단 내일마저 이야기하죠. 해도 지고 있으니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방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 그래요. 카사노님! 그럼 이만 가볼 테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하, 아가씨께서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런!”

펑-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돌아가는 페리샤와 어색한 미소를 띠며 그런 그녀를 따라가는 빈델을 가만히 바라봤다. 둘이 뒤돌아 걷는 순간 쭈뼛거리는 시에라를 품으로 잡아당긴 나는 탱고 추듯 시에라를 끌어안은 채 발걸음을 맞추며 저택으로 향했다.

“그럼 저희도 돌아가 볼까요?”

“뭐야, 이럴 거면 가, 같이 가지 그랬어요?”

“하하- 내꺼가 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이건 당신 셔츠가 아니라니까요? 제꺼거든요? 제가 사준 거잖아요?”

그런 논리인가? 하긴 꼬질꼬질한 내 옷들을 보고 전부 내다 버리라며 새 옷을 사다 준 시에라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거 말고요.”

“그, 그럼 뭔데요.”

“네가 내꺼잖아.”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시에라를 붙잡고 발그레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몸부림치던 시에라는 내 속삭임에 얌전해지더니 꾸욱- 팔을 둘러 나를 끌어안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래- 그, 헤- 아니- 와아-”

어이없다는 말투로 여러 소리를 내며 부정하는 듯한 시에라였지만 그 밑에 깔린 감정은 기쁨이었다. 귀여운 반응을 보이며 새빨개진 얼굴로 기뻐하는 시에라의 말캉이는 볼에 쪼옥- 키스한 나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내 방으로 올래?”

“...네에-”

얌전한 고양이 같은 그녀의 셔츠에 손을 밀어 넣은 나는 살짝 뜨거운 그녀의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희롱하며 걷다가 저 앞에서 슬쩍 뒤돌아 우리를 바라보던 페리샤와 눈이 맞았다. 화들짝- 느낌표가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펄쩍 뛴 페리샤는 더욱더 빨라진 걸음으로 빈델을 붙잡고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귀엽네?”

운디네같은 날것 그대로의 반응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순간 몸을 움츠리며 시에라를 바라봤지만, 자신한테 하는 칭찬이라 생각했는지 꼼지락거리며 내 품 깊숙이 얼굴을 파묻는 시에라를 확인한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페리샤의 뒷모습을 뒤쫓아 바라봤다.

**

‘미쳤어- 미쳤어- 미쳐써!’

언제나 도도하고 기품있는 아가씨로서 살아왔다고 자신하는 페리샤였지만 방금 목격한 광경을 보고는 도저히 냉정하게 지낼 수 없었다. 아버님께 들은 바로는 몰락 귀족이지만 그 품위와 천재성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극찬한 시에라님인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인은 그런 존재가 아닌 단순한 사랑에 빠진 아가씨였다.

‘무척이나 달콤하고, 애절한 눈빛...’

무심한 듯한 남자의 품에 안겨든 시에라는 그의 뜨거운 손길과 달콤한 속삭임에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흐물흐물 그의 품에서 흘러내렸다. 불타는듯한 뜨거운 눈빛과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달달한 숨결을 엿보던 페리샤는 그 광경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완전 완전이야. 이상한 사람...’

아까도 그랬다.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의 남자였지만 자신의 머리에 떨어진 나뭇잎을 떨어준다거나 숲을 거닐다가 넘어질 뻔한 카트라를 붙잡아 일으켜준다든지 여자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다. 자연스럽게 여자를 위하는 모습은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빈델, 얼른 와요- 왜 이렇게 뒤처져 있나요!”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요. 아가씨, 먼저 들어가세요.”

나름 그의 배려지만 알 턱이 없었던 페리샤는 자신을 쳐내기 바쁜 빈델의 대답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왔고 그만큼 서로에 관한 생각도 깊었을 텐데, 요즈음 들어선 자신만 빈델에게 다가가며 솔직한 감정을 서슴없이 표현했고 빈델은 오히려 표현이 인색해지더니 아예 무뚝뚝하게 자신을 대하기 시작했다.

‘조금 서러워, 아니 많이 서운해...’

어머님과 아버님에겐 항상 똑 부러지고 기품있는 아가씨여야 했다. 어릴 적 유모와 카트라에게 들었던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그냥 귀여운 아가씨면 된다고 들었기에 빈델에게는 숨김없이 다가갔지만, 그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하지만 그 둘은...’

힐끔- 한껏 멀어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둘을 집중해서 훔쳐본 페리샤는 여전히 강하게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둘의 모습에 애절한 한숨을 하아- 내쉬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뜨겁고 다정하면서 예전 아버님의...

‘하앗...!’

어릴 적 빈델과 엿봤던 적나라한 정사를 떠올린 페리샤는 확 붉어진 얼굴을 애써 손바닥으로 덮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둘도 그런 끈적하고 음탕한 나날을 보내는 걸까? 애써 기억의 저편에 묻어놨던 정사를 떠올린 페리샤는 활활 달아오른 몸을 꿈틀거리며 조용히 음란한 숨결을 하아- 내보냈다.

“빈델...”

“아가씨, 저는 창고에 들러봐야 해서 마중은 여기까지밖에 못하겠네요. 죄송합니다.”

달아오른 몸을 그가 식혀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녹아내려 나라는 여자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흘러내리게 만들어줬다면- 사랑과 애욕이란 감정에 들뜬 몸을 그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아 줬으면 해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무심한 대답이었다.

“아... 그렇죠, 그렇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잡아줘, 지금이라도 손을 붙잡고 저들처럼 내게 사랑을 속삭여줘, 당신의 감정을 내게 불어넣어 당신만의 여인으로 만들어줘-

“네, 방까지 마중 못가 죄송합니다. 나중에 꼭 시간을 낼 테니까...”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이 멀어졌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 자갈과 돌을 짓밟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살짝 숙인 고개 너머로 엿보이는 하늘은 이미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싸늘한 저녁 공기가 땀에 조금 젖었던 사냥복을 휘감자 오싹한 감각이 페리샤를 어루만지고 그대로 흩어졌다.

투둑- 투둑- 방울진 서러움이 그대로 자갈을 적셨다. 물방울에 젖어 자갈과 돌들의 색이 번질수록 그녀의 슬픔도 그대로 번져갔다. 왜 나만 이런 걸까, 아버님과 어머님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해서 그들의 기호에 맞춰도 돌아오는 칭찬은 적었다. 기대감은 무겁고 사랑은 가벼웠다. 내 가치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훈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

한껏 부풀어 오른 우울감이 페리샤의 슬픔과 만나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행복한 연인을 엿볼수록 처량한 자신의 처지가 더욱더 서글펐다. 발아래 자갈들을 까맣게 적셔 갈 때쯤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조금씩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페리샤는 기대했다. 되돌아온 걸까? 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가오는 발걸음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게 하기 충분했다. 찾아온 희망은 뭉게구름처럼 찾아온 우울감을 그대로 흩어지게 했다. 저벅 저벅- 자갈을 가로지른 발소리가 멎어 갈 때쯤 자신의 발치 앞 커다란 발이 툭- 멈춰 섰다.

한껏 광냈지만, 숲을 돌아다닌 탓에 그 광은 조금 바래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검은색 부츠가 움찔거리는 순간 스윽- 새하얀 손수건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왔다.

톡- 톡- 톡- 조심스러운 손길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흐려진 시야가 맑아지고 축축했던 뺨이 뽀송뽀송해졌다. 상기된 뺨이 달아오르자 남았던 물기가 그대로 훨훨 날아간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면, 실망할 것만 같아서 쉽게 고개를 못 드는 페리샤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떠나지 않는 부츠의 주인 탓에 페리샤는 결국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아...”

자신의 선물했던 부츠를 신고 무심해 보이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성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사랑하던 사람에게 듣고 싶었던 다정한 안부는 낯선 남자의 입에서 툭- 내뱉어져 그대로 자신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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