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19화 (119/395)

쿵! 박살 난 나무문이 바닥에 내리꽂히며 먼지와 나무 조각을 사방에 흩뿌렸다. 문을 짓밟는 강철 부츠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침대 한쪽 삐져나온 이불을 냅다 들어 엎드려있는 레미아의위에 덮은 뒤 발기한 자지를 덜렁이며 뒤돌았다.

“누구야?”

사실 다른 사람이 머무는 방에 쳐들어가 본 적은 있어도 내가 습격당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당황했다. 방 한구석에 세워둔 검을 흘겨보며 한 걸음씩 전진하니 문을 짓밟고 서 있던 기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날 제지했다.

“그, 그만! 오지 마라! 다가오지 마!”

“다짜고짜 쳐들어와 놓고 무슨...”

“이익...! 오, 옷부터 걸쳐라! 이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

자기가 쳐들어와 놓고 옷을 입으라니, 미친년 아닌가? 순순히 입는 동안 뒤통수칠지 누가 알고... 의심쩍은 눈초리로 노려보며 한걸음 물러서자 투구가리개를 손으로 가리며 나를 힐끗 쳐다본 기사가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옷을 걸치고 심문하겠다! 빨리 옷을 입어라...!”

갑옷 안에서 울려 삐져나온 목소리는 마치 울먹이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불 안에서 꿈틀거리는 레미아의 등을 토닥인 나는 걸어둔 옷을 대충 입고 슬금슬금 벽에 세워둔 검을 집으러 움직였다.

“그만! 이쪽으로 팔을 벌리고 다가와라!”

“아니, 무슨 죄를 지었다고 다짜고짜 명령입니까?”

얌전히 따르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억울해 소리치는 기사를 다그치며 노려봤다. 가리개를 덮은 손을 치우고 꼿꼿하게 서 있던 기사가 철컥- 뽑았던 검을 허리에 찬 뒤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찰 중 여관주인의 증언이 그걸 증명할 것이다.”

시발, 내가 뭘 했다고. 이를 갈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기사를 노려보는데 쿠당탕 탕 요란한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쿵쿵쿵 계단이 울리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와 함께 푸짐한 뱃살의 주인장과 종자로 보이는 멀끔한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니아님, 같이 올라가자 말씀드렸는데...!”

“왔구나! 지크, 자- 얼른 수상한 사람들을 포박한 뒤 심문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게, 나리...”

우물쭈물하는 지크라는 종자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여관주인이 박살 난 문과 노려보는 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더니 푹-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 진짜 수상한 자들인지는 모릅니다, 그냥 수상해 보인다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이렇게 기물까지 부숴버리시면...”

“무슨 소리인가, 먼저 수상한 자들이 머물고 있다고 내게 말한 건 자네 아닌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로 파들거리는 주인의 어깨를 두들기는 기사,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종자가 저벅, 기사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 농담처럼 수상한 자들이 머물고 있다고 대화나 나누려고 꺼낸 얘기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혹시 협박당하고 있는 건가?”

철컹- 고개를 돌리며 나를 노려보는 기사, 가리개 너머 파도 같은 푸른 눈동자가 얼핏 엿보였지만 나는 살기 가득한 눈빛을 피하며 푸들푸들 떨고 있는 여관 주인을 노려봤다.

“히익...!”

설마 순찰 나온 기사가 수상한 자들을 보지 못했냐는 질문에 보긴 봤습죠- 방금 막 올라갔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 건 아니겠지. 나는 따분한 내 상상을 부정하며 여관주인을 노려봤다.

“그게- 그냥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길래, 수상해 보였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런, 그런-”

“이번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상황 파악이 끝난 나는 어리바리한 기사 나리에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가 코앞 거리에서 멈춰 선 뒤 당당하게 말했다. 제대로 된 전후 사정도 파악하지 않고 달려들다니, 아무 권한 없는 내가 직접 따질 수는 없지만 지금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숨어있는 레미아가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여관 주인과 기사님이 소통이 잘 안 된 모양입니다. 부디 이해해주시죠.”

벌벌 떠는 여관주인과 멍하니 절그럭- 갑옷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는 기사를 뒤로하고 고개를 푹 숙인 종자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내게 사과했다. 툭툭- 이불에서 뻗어 나온 흰 손이 내 허벅지를 두들겼기에 한숨을 내쉰 나는 손을 휙 저으며 그들을 쫓아냈다.

“일단 알겠습니다. 나가주시죠.”

“죄송합니다, 저희 기사님께서 나쁜 뜻으로 저지른 게 아니라 론델라가 요즘 흉흉한 일이 많아 예방하는 차원에서...”

“지크 그만하도록. 내, 내가 사과하겠다.

-철컥

부서진 문과 흉흉한 내 눈빛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던 여관주인은 이미 내려갔고 지크라는 종자만이 기사의 만류에 한걸음 물러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기사를 노려보자 투구를 벗은 기사는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뽐내며 이내 허리를 굽히고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제대로 사정도 파악하지 않고 손해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과하지...”

폭포수처럼 찰랑거리며 흘러내리는 주황빛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 후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파도 같은 푸른 눈동자가 땅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쓱 올라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까 낮에 검문했던 그 기사님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행동에 아는척하며 말을 걸자 쭈뼛거리던 기사는 이내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이고 쥐구멍에 기어들어 갈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그, 항의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의욕이 너무 과해 벌어진 일이니 부디 용서를...”

“후우...”

그만 내보내라는 듯 허벅지를 찰싹이는 레미아와 쭈뼛거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어쩔 줄 모르는 기사. 둘을 번갈아 본 나는 방황하는 기사의 건틀릿을 꽉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그녀를 용서했다.

“괜찮습니다. 들어보니 여관 주인이 오해할만한 말을 한 듯하니, 이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런가, 고맙다. 론델라에 계속 머문다면 내 한번 대접하지, 내 이름은 소니아다...!”

찾아가겠냐고, 울컥 차오르는 짜증에 뭐라 한마디 내뱉고 싶었지만 괜찮다는 말에 과하게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강하게 나가기도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 저희도 나갈 준비를 해야 하니 이제 나가주시죠 소니아님.”

“아, 아 그렇지! 미안하다. 그으, 가자 지크. 내 나중에 사례하겠다. 혹시 이름이?”

“카사노입니다.”

“그, 그래. 카사노. 오늘 일은 정말 미안했다...!”

-철컥 철컥 콰삭! 철컥

강철 부츠를 들썩이며 부서진 문을 한 번 더 짓밟고 떠나가는 소니아, 어이없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머리를 긁던 지크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건네준 뒤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미숙하십니다. 부디 용서하시고 약소한 사례이니 넘어가 주십사...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며 떠나는 지크, 웅성거리던 복도가 잠잠해지고 이내 여관이 조용해진 걸 알아챈 나는 서둘러 로브를 문에 걸쳐 대충 가려둔 뒤 이불을 들춰내 레미아를 꺼냈다.

“갑갑했죠?”

“뭐야, 뭐야 저년은, 응? 미친년 아니야...!”

새하얀 알궁둥이를 드러낸 채 바들바들 떨던 레미아는 내 손길에 하악질하는 고양이처럼 훅! 튕겨 오르더니 내 멱살을 붙들고 짤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나도 당황했지만 제일 당황한 건 후배위 자세로 받아달라 조르던 걸 그대로 보여준 레미아일테지. 이해한 나는 부드러운 레미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잖아요.”

용병단 막내 생활을 하며 저것보다 더한 추태를 부렸던 입장에서 저 정도면 귀여웠다. 아니 사실 귀엽진 않았다. 이제 막 행위를 시작하려는 커플이 머무는 방의 문을 부수고 진입한다? 글로만 읽어도 어지러운 문장이었다.

“그럼 시발 노크를 하던가! 미친년 아니야! 아아악!”

부서진 문 덕에 복도에는 레미아의 앙칼진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텁- 오물거리는 레미아의 입술을 틀어막은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면서 널브러진 옷들을 주워다가 그녀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파하- 아직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이 정도 하고 그냥 술이나 먹으러 갑시다.”

“...솔직히 더 할 기분이 아니야, 아니 당분간 생각도 안 날 것 같아. 부끄러워서 미칠 것만 같아.”

“저도 그래요.”

“너는 꼬추나 덜렁거리다가 가린 게 끝이지만 난 다르잖아!”

-짜악

작은 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후려갈긴 레미아는 대충 입혔던 옷들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주름을 펴고 단장을 마친 뒤 후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지친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레미아에게 건네줬다.

“안필래, 싫어.”

“그래요. 그럼 술이나 먹으러 갑시다. 이제 볼일도 없겠죠. 뭐.”

내밀었던 담배를 품에 넣고 짐까지 챙긴 나는 끼익- 끼익- 낡은 소리를 내는 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뚱한 얼굴로 내 뒤를 따르던 레미아는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니야, 왠지 계속 얽힐 것만 같아. 제발 안 만났으면 소원이 없겠네.”

질색하며 분노로 가득 찬 레미아를 달래고 주점에 들어가 가게가 닫을 때까지 술을 퍼먹은 나는 다음 날 아침 레미아의 예언이 들어맞았음에 어이가 없어 이마를 착- 후려갈겼다.

“갑작스럽지만 론델라의 자비로운 영주, 핀델 백작님의 의뢰로 론델라 주변 마물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산맥과 평원 곳곳을 정리할 예정이고 백작님의 자비 덕에 지원도 받았으니 오후까지 준비 마치고 집합하도록!”

“““네!”””

턱을 쓰다듬으며 용병단을 둘러보고 돌아서는 백작과 검문할 때 봤던 화려한 갑옷의 기사단장이 그 뒤를 따랐다. 백작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이 전부 물러갔음에도 지원 왔다는 기사 다섯 명만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맨 끝에 익숙한 투구와 익숙한 갑옷,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체구의 기사가 맨 끝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우 머리야, 언제 또 이런 의뢰를 받아왔데...”

“누나, 저쪽 좀 봐요.”

“뭔데, 단장이 아침부터 지랄이라도 어머 씨발!”

숙취에 끙끙거리며 내 뒤를 따르던 레미아는 로브에 손을 집어넣어 배를 긁던 와중 내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퉁- 튀어 오르고는 찰싹- 내 등을 후려갈겼다.

“아, 왜 나를 때려요.”

“아침부터 재수 없게 하니까 그러지. 아니 왜 하필 쟤야?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은데!”

“아까 간단하게 정리할 때 들었는데 잔당이랑 무리 지은 놈들은 고블린이랑 오크뿐이래요. 고블린 변종도 없는 고블린 무리랑 부락이 없는 떠돌이 오크들이니까 신입들을 세워두고 간 거겠죠.”

“단장한테 뭐라고 좀 해야겠어. 씨발롬!”

걸걸하게 욕을 내뱉으며 지원 온 기사 대표와 떠들고 있는 단장을 향해 뛰어가는 레미아, 자리를 지키던 기사들이 하나둘 떠나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에도 소니아는 쭈뼛거리는 지크의 앞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흐음...”

괜한 흥미가 샘솟아 소니아에게 다가가자 힐끔 나를 바라보던 소니아가 한번 휘청이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설픈 행동에 픽- 웃은 나는 소니아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했다.

“해도 쨍쨍한데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그늘로 가시죠.”

“괜찮다, 주군의 명령으로 지원 나온 몸인데 나 하나 편하게 하자고 기강을 흐트러지게 할 순 없다.”

“...다른 기사 나리들은 전부 쉬고 있습니다. 토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쉬시죠.”

“용병분 말이 맞습니다. 소니아님, 해도 뜨거우니 그늘에 가시죠.”

“으읏...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뒤를 따르겠다.”

이미 투구까지 벗고 그늘에 늘어져 용병들과 떠드는 기사를 지켜보던 소니아가 나와 종자의 설득에 마지못해 간다는 듯 우리의 뒤를 따랐지만, 그 목소리엔 행복이 느껴졌다.

“후우우-”

뜨거운 해를 피해 그늘에 숨은 소니아는 철컹 이는 갑옷 채로 바닥에 주저앉고는 나무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 걸쳐본 입장에선 저런 중장비로 땡볕에 서 있는단 건 큰 고통임을 알았기에 기뻐하는 소니와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물이라도 드시죠.”

어설프고 멍청한 모습을 보다 보니 괜히 챙겨주고 싶었기에 갖고 있던 수통을 소니아에게 내밀었다. 자리를 지키던 종자는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종자의 눈길을 피했다.

“이런, 고맙다. 호의를 받아들이지.”

싱글벙글 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신나 보이는 소니와의 음색과 함께 묵직한 투구가 벗겨졌다. 얼굴에 달라붙은 가느다란 주황색 머리칼과 줄줄 흐르는 땀 줄기, 묘하게 색기 있어 보이는 얼굴로 환하게 미소지은 소니아는 체통도 잊고 수통을 쭙- 물고 꿀꺽꿀꺽- 맛나게 마시기 시작했다.

“푸하- 으음, 고맙다. 사실 조금 힘겨웠었거든.”

“아닙니다. 저는 그럼 이만 준비할 게 많아서 가보겠습니다.”

솔솔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정리하던 소니아가 떠난다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붙잡았다.

“더 쉬다 가도록 해라, 아직 시간이 멀었다면서 그대는 왜 벌써 일어서는 건가?”

“저는 용병단 막내라서요, 준비할 게 많아 미리미리 움직여야 합니다.”

“아 그런가, 그대도 신입이군!”

“네,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들어온 순으론 내가 확실한 막내였지만 이미 레미아가 아낀다는 소문도 돌고 다른 부사수들보다 월등한 실력이라고 평가받은 덕에 잡일은 줄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나도 같이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소니아가 붙잡은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꾸벅-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 나도 다른 선배들보다 늦게 기사가 됐지. 우리 둘은 비슷하구나.”

“그렇네요.”

“며칠간 잘 부탁하지.”

힘들었던 걸까? 피곤함에 찌들었던 소니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기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좋게 지내면 나쁠 게 없다고 판단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짐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떠나기 전 나를 노려보는 종자의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기가 모시는 기사와 사이좋게 지내는 게 불만일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별생각 없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무거운 나무 상자들을 열심히 쌓는 나와 다른 용병들을 뒤로하고 호쾌한 웃음소리가 야영지에 퍼지기 시작했다. 진중하고 무거운 이미지의 기사들과 달리 유쾌한 백작의 기사들이 단장과 간부들에게 붙들려 떠드는 소리였다.

“저 새끼들은 종일 술 먹고 떠들고 있냐.”

“기사 나리들이잖아, 어차피 내일이 토벌인데 오늘 하루 놀겠다 그거겠지.”

“어휴 시발, 야! 카사노 그쪽 다 끝났냐?”

“네, 끝났어요.”

뿌드득거리는 허리를 펴며 자세를 바로잡은 나는 똑같이 뻘뻘 땀을 흘리는 선임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필수품들 위에 걸터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선임은 잔을 부딪쳐가며 웃고 떠드는 기사와 간부들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하러 가면 뭣 하러 왔냐고 또 따지겠지. 씨발.”

“제가 갔다 올게요.”

“진짜? 고맙다 야.”

고맙지도 않으면서 뭘, 애초에 말을 꺼낸 것부터가 한 소리 듣기 싫으니 네가 가라 이런 의도임을 느꼈던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닥불을 둘러앉고 떠드는 양아치들에게 다가갔다.

“단장, 짐 정리 모두 끝났습니다.”

“야이새끼야! 기사님들도 계시는데 인사부터 해야지!”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휘청이며 손을 뻗는 단장, 평소에도 괄괄하지만, 생각보다 잘 챙겨주던 단장도 술만 먹으면 개새끼 그 자체였다. 익숙한 개 짓에 몰래 한숨을 내쉰 나는 꾸벅- 기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래그래, 괜찮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내 어깨를 두들기는 수염 난 아재를 필두로 다른 남자 셋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럴 수 있지, 그래- 등등 화음을 넣으며 맞장구쳤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소니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대는 와중 활달한 목소리가 쿡- 내 귀를 찔렀다.

“끝났어? 그럼 내가 마무리 검사 좀 해야겠네. 안내 좀 해줄래?”

모닥불의 불빛을 쬔 탓에 불그스름한 레미아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 보였다. 조금 풀린 눈과 함께 손을 번쩍 든 레미아는 도도도- 내게 달려오고는 날 붙잡고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단장, 먼저 일어나볼게요! 기사님들도 적당히 드시고요.”

“그래, 아쉽구먼-”

“어 어, 잘 부탁해 부단장...!”

쩝-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기사들과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단장, 그들을 뒤로하고 술자리를 빠져나온 레미아는 나를 질질 끌고 가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더러운 새끼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음담패설 존나 하고 손대려고 하고 어우-”

“그건 누나도 똑같잖아요.”

기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끈덕지게 달라붙는 레미아에게 툭- 내뱉자 이를 드러낸 레미아가 그르렁거리며 내게 말했다.

“난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고, 저 새끼들은 나 한번 따먹겠다고 저 지랄 하는 거잖아! 다르지!”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그 여기사님은 없네요?”

“어우! 말도 마, 걔 얘기하지도 말라니까?”

“누나아-”

하기 싫었지만 간드러진 목소리로 부르며 얇은 그녀의 어깨를 훅 끌어안자 눈을 껌뻑이던 레미아가 에효-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달라붙어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말도마, 내일이 토벌인데 뭔 술이니부터 꼬치꼬치 따지더니 정찰하겠다고 나서서 일어났어. 미친년 같아, 너무 고지식해.”

“그럴 수도 있긴 하잖아요.”

“막내라는 년이 까마득한 선배들한테 대들면서 그러니까 그러지! 뭐 어디 귀족 딸내미였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봐.”

“그래도 기사 할 정도면 강한 거 아닌가요?”

내 말에 피식- 웃은 레미아는 찰싹- 나를 때리며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작위도 백작님하고 연이 있어서 그냥 받은 거지, 아직 마나도 못 다룬 데. 기껏해야 칼솜씨 좀 있는 거지.”

“아아...”

가끔 그런 사람이 있었다. 본인의 신념이 있어 굽히지 않고 주변에 타협도 하지 않지만 능력도 없는 그런 사람.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던 부류고 또 많은 걸 공감했던 부류였다. 이제야 소니아가 저질렀던 온갖 기행의 근원을 파악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뻣뻣하게 고개 숙이는 선임들 앞에서 분류해둔 짐을 살피는 레미아에게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쉬러 가볼게요.”

“야! 내가 왜 저기서 빠져나왔는데! 누나랑 놀자 응?”

“저 피곤해요,.. 하루만 봐주세요.”

“씨이... 진짜 일만 하게 생겼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을 휙휙 젓는 레미아,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배정받은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들었던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던 나는 저 멀리 낮에 쉬었던 나무 그늘에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소니아를 발견했다.

“어...”

달빛을 받아 빛나는 주황색 머리칼과 촉촉한 푸른 눈동자. 질끈 깨문 분홍빛 입술엔 분노가 느껴졌고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는 울분이 가득했다. 뭔가 마음을 울리는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결국 몸을 돌려 다시 천막으로 향했다. 나보다 더 대단한 기사 나리이니 알아서 추스르겠지. 내가 나서봤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얽혀서 좋은 것도 없었다.

“카사노...?”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 등 뒤에서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가 자그맣게 나를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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