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16화 (116/395)

외전7

-덜컹 덜컹 덜컹

모난 돌에 얻어맞은 바퀴가 덜컹거리자 짐마차 안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방향이 기울 때마다 한쪽으로 쏠려버린 나는 쿵쿵- 부딪히는 짐들에 증오를 느끼며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버텼다.

“괜찮아요?”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에릴다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부단장이랑 마차에 타라고 해도 기어코 괜찮다며 짐마차까지 따라 타준 에릴다가 고마웠지만, 주변의 다른 용병들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지극정성이네.”

“난 용병단에 들어온 지 1년인데 말 한마디도 못 나눠봤어.”

“그건 네가 안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런 거지.”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감상평을 흘려들으며 달라붙는 에릴다를 슬쩍 밀어낸 나는 다른 용병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붙지 마요. 저는 아직 막내라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돌봐주고 싶다는데.”

“눈치 보이잖아요, 최고 선임자가 예뻐해 주면 누가 저한테 잡일을 시키겠어요?”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요?”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 답답함은 대체 뭘까? 대답은 돌아오는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답답함에 가슴을 쿵쿵 두들기며 고개를 내저은 나는 포근한 향기를 풍기는 에릴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도와주거나 같이 있는 건 상관없지만, 너무 붙어있으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고요.”

“남들 시선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

무어라 대답하려던 나는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가는 후드 너머 슬픈 미소를 지은 에릴다가 얼마나 풀이 죽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촤라라락!

덜컹이는 짐마차의 움직임이 멎을 때쯤 짐칸을 덮은 천막이 확 걷혔다. 산적 같은 얼굴의 단장이 킁- 콧김을 내뿜으며 나와 에릴다를 바라보더니 이내 커다란 뱃고동소리만 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나와! 도착이다!”

벌써?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에릴다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준 다음 말없이 짐칸에서 내렸다. 휙-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짓는 에릴다가 내게 붙으며 작게 얘기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둘이 뭐야-”

“아, 부단장님.”

팡팡- 마차에 오래 앉아있어 주름이 잡힌 로브를 털던 레미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우리를 흘겨보며 다가왔다. 오물거리는 입술과 꿈틀거리는 입 꼬리는 뭐라도 놀리고 싶어 하는 얄미운 신호였다.

“그냥, 별거 아니에요.”

“나한테도 비밀이야-”

“별 얘기가 아니니까요.”

툭 툭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 바라보는 여인 둘, 뭔가 꺼림칙한 분위기에 헤- 입을 벌린 채 구경하고 있을 무렵 쿵-! 망치 같은 무언가가 내 머리를 두들겼다.

“끄악!”

“이놈 새끼야, 내렸으면 짐 내려!”

욱신거리는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핑 도는 눈물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시발, 말로 하면 될 걸 왜 주먹을 쓰는 거야? 치솟는 짜증이 나를 좀먹었지만, 입으로 내뱉을 재간이 없었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다른 선임들이 내려주는 짐을 받아냈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

“아, 그게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럼 말로 해야지, 때린다고 다 돼요?”

“그런가 하하! 애송아, 미안하다?”

-퍽! 퍽!

솥뚜겅만한 주먹이 등을 두들겼다. 안 그래도 무거운 걸 받고 있어 힘이 달리는데 무식하게 두들기니 양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지만, 겨우겨우 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울며 겨자 먹기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다네! 하하, 나는 그럼 가볼게!”

“말로 해요, 말로!”

“미안해!”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만 남는다든가? 단장이 떠난 마차 주변은 싸늘한 적막이 가라앉아 짐 내려놓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휴- 한숨을 내쉰 레미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얼른 내리고 쉬자- 쉰 다음에 정찰 잠깐 하고 내일 정식으로 토벌 갈 거니까 기억하고-”

“”“네!!!”“”

깜짝이야, 사방에서 짐을 나르던 용병들이 우렁차게 대답한 탓에 쿵- 들고 있던 상자를 발치에 떨어트렸다. 아슬아슬하게 찧을 뻔한 발가락을 바라보며 다시 짐을 든 나는 뒷짐 진 채 내 주변을 기웃거리는 레미아 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도와줄까요?”

도와달라는 신호로 느꼈는지 에릴다가 선뜻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미아나 단장도 에릴다에게 일을 안 시켰는데 여기서 부탁하면 듣기 싫은 뒷담이 용병단에 돌 게 뻔했다.

“으음...”

검지를 입술에 대고 얼굴을 찌푸리는 에릴다였지만 나는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사수 부사수의 관계로 둘이 붙어있을 때는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었지만, 지금같이 소문이 돌기 쉬운 상황에서는 거리를 벌리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에릴다, 우리도 먼저 가 있자. 좀 걸릴 거야.”

“... 좀 이따 봐요.”

“우리 막둥이도 고생해~”

-죽

쫄래쫄래 다가온 레미아가 까치발을 들어내 볼을 꼬집더니 죽 늘린 채 몇 번 흔들었다. 욱신거리는 볼을 뒤로하고 애써 웃자 까르르- 웃은 레미아가 에릴다를 붙잡고 그대로 마을로 향했다.

“끄으응...”

마을 목책 옆에 야영 물품을 차곡차곡 쌓은 나는 허리를 펴며 한숨 돌렸다. 짓궂은 용병들이 지나갈 때마다 에릴다에 대해서 묻곤 했지만 억지 미소와 함께 질문을 흘려내니 더는 묻는 놈들이 나오진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마차 그대로 마을에 들어가서 짐을 풀면 될 걸, 마을 안에 지낼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나머지는 싹 다 야영이라니, 잡다한 야영 물품이나 식자재 정리를 끝낸 우리는 정찰 가기 전 텐트 작업까지 하고 있었다.

“야! 와서 여기 좀 받쳐!”

“넵!”

어딜 가던 싹싹하게 굴어라, 다시 한 번 다짐한 나는 여기저기 부르는 외침에 큰 소리로 대답하며 바쁜 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뒤치다꺼리하며 야영준비를 끝마치니 그제야 단장과 부단장 외의 간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했네, 한 시간 휴식!”

돼지털처럼 뾰족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은 단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하- 크오- 여기저기 침은 소리가 퍼지면서 하나둘씩 바닥에 퍼져 눕기 시작했다.

“후...”

피곤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대충 굴러다니는 통나무에 앉으며 조용히 숨을 돌렸다. 저마다 친한 용병들끼리 붙어 잡담을 나누거나 파이프 담배, 크래프톤 담배 따위를 피우며 희희덕거리기 바빴지만 에릴다를 제외한 친분이 별로 없는 나는 그냥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찰랑

“윽.”

차가운 감촉이 갑작스레 뺨에서 느껴져 황급히 고개를 떼자 후드를 푹 눌러쓴 에릴다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물병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아직도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니까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아까도 주고받은 문답이 다시 시작될 조짐을 느낀 나는 한참 동안 짐을 옮기며 쌓인 짜증에 불이 확 붙는 걸 느꼈다. 짜증이 치솟고 그냥 전부 싫은 그런 단계. 조용히 삭히거나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할 순간임에도 옆에서 순진하게 구는 에릴다를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한텐 중요해요. 당신은 저 걱정을 안 해도 되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 신경 안 쓰이는 거지, 저는 신경 쓰여서 미칠 노릇이에요.”

혹시라도 언성이 올라갈까 차분히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분노를 내뱉을 땐 뜨거운 감정을 눌러 담아 내뱉었다.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기분이었지만,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얘기하는 에릴다를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요. 그냥-”

“죄송해요.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가주세요.”

-바스락

“...나중에 얘기해요.”

“모르겠네요.”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에릴다가 점점 멀어졌다. 후- 가라앉는 분노와 함께 자괴감이 들어 마른세수를 하며 푸르르- 쓸데없는 소리를 내며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나야 에릴다와 떠들고 장난치고 붙어있으면 싫어질게 뭐가 있을까. 하지만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용병단에서 막내라는 놈이 간부랑 시시덕거리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면, 누가 나를 곱게 볼까?

지구에서 일할 때 몇 번이나 봐왔고, 겪었던 일이었기에 치가 떨린 나는 힐끗거리는 다른 용병들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이 불쾌한 상황을 잊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리를 헤집었다.

-부스럭

몸을 돌리는 와중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느껴진 나는 고개를 내려 소리의 근원지를 살펴봤다. 옆에 다소곳이 놓인 종이봉투가 몸을 돌릴 때마다 닿았는지 조금 찌그러져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봉투 안을 열어 내용물을 구경했다.

“......”

갈색의 고소해 보이는 빵 겉에 끈적이는 무언가가 잔뜩 발라져 있었다. 봉투에 코를 갖다 대 냄새를 맡으니 달짝지근한 향기가 코를 쿡쿡 찔러왔다.

문득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봉투를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웃고 떠드는 레미아의 옆에 선 에릴다가 후드에 가려진 입술을 어떻게든 뻐금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먹어 요]

-콰악

종이봉투 입구를 강하게 움켜쥔 나는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에 고개를 젖혀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나는 그깟 감정 하나 못 다스려서 저런 사람한테 화를 내걸까? 화를 낸 사람을 끝까지 신경 쓰는 저런 사람에게? 내가 아무리 약하고 소갈머리가 없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너무 큰 실수를 해버렸다.

핑핑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할 무렵 야영지에 커다란 고함이 울려 퍼졌다.

“기상!!! 전부 준비해라!!!”

“”“네!”“”

철컥, 철컥- 달그락 달그락- 사방에서 철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주저앉은 용병들이 한둘씩 일어나고 있었다. 내던져놨던 검을 챙겨 든 나도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한곳에 집결하는 용병들의 뒤를 따랐다.

“인원 배치를 하겠다.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눌 예정이니까 귓구멍 팍 열고 새겨들어라! 알았느냐!”

“”“네!”“”

“먼저 전위에 나와 설 놈들이다- ‘ㅡ’ ‘ㅡㅡ’ ‘ㅡㅡㅡ’ ”

안되겠다, 아무리 생각을 정리해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내가 왜 그랬지? 후회로 얼룩진 양심은 쿵쿵 내 머리를 두들기며 당장에라도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삐딱한 내 진심은 화낼만했다며 뭐 하러 사과하느냐고 양심을 억누르고 있었다.

“다음은 부단장과 후미에 배정될 인원이다-”

목에 핏줄 세워가며 고함치는 단장과 옆에서 발끝으로 땅을 긁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레미아, 나란히 선 갑옷을 걸친 남녀 두 명과 맨 끝에 선 로브를 푹 눌러쓴 에릴다까지. 눈은 앞을 향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떠나있었다.

“호명되지 않은 인원은 사수와 붙어서 이동해라- 이상!!!”

-웅성웅성

옆에 서 있던 까칠한 온다는 빤질빤질하게 생긴 선임에게 죽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 주변에 서 있던 용병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로 찾아갈 무렵 나는 내 이름이 불렸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고 똑같이 죽상을 지었다.

나는 저 멀리 레미아의 작은 등 뒤에서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에릴다를 향해 다가갔다.

**

-파삭 파삭 파삭

단장이 나와 에릴다에게 맡긴 건 오크 무리의 동세를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을 정찰하라는 지시였다. 나 혼자 에릴다와 위험한 그런 곳에 갈 수 있느냐는 뜻의 눈빛을 보냈지만 에릴다를 믿는 것인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단장의 고추장에 나는 꼬리를 말고 그대로 야영지에서 빠져나와 산을 타고 있었다.

-파삭 파삭 파삭

방해되는 풀들을 짓밟거나 검으로 썰어대며 앞으로 나아가길 수십 분, 어색하게 인사한 에릴다였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덕에 풀이 죽은 에릴다가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소통이 잘 안 되는 사이인 건가? 자꾸만 피어오르는 잡생각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풀들을 베어 가며 고도가 높은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머릿속에 차오른 잡생각이 나를 점점 좀먹고 있었다.

“카사노.”

“......”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힘들어서...”

폭포수 같은 땀을 질질 흘리며 에릴다를 돌아보니 후드를 걷고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에릴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힘든가? 별로 지치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런 에릴다의 상태를 흘려본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인 후 커다란 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잉차...”

귀여운 소리를 내며 폭- 내 옆에 주저앉는 에릴다. 더운데 꼭 옆에 붙어야 하나? 짜증이 확 몰려왔지만 그런 생각도 하기 싫어 붕붕- 고개를 흔들고 아무 생각도 안 했다. 힘들고 지칠수록 짜증이 몰려왔기에 나는 내지 않아도 될 짜증을 내고 있었다.

“후...”

숨을 돌리며 목덜미 부근을 움켜쥐고 펄럭이는 에릴다,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계속될 때마다 바람을 타고 향긋한 여체의 향기가 솔솔 풍겼다. 맡기 싫어도 맡아지는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푹 숙인 나는 힘든 와중에 반응이 오는 곳간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힘드네요...”

대답 할 생각이 없음에도 조용히 입을 여는 에릴다, 한번 열린 입술은 쉽게 닫힐 생각이 없었는지 아무 대답이 없음에도 연신 조잘거리며 다양한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레미아랑 놀러 간 얘기라거나, 다른 용병들이 밥을 먹으러 가자해서 먹었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했다거나, 쉽게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카사노랑 있으면 그래도 조금 다른 거 같다-

구구절절 길게 얘기했지만 말하는 바는 딱 그거 같았다. 너랑 있으면 편하다, 그래서 그런 거다. 화해의 발의 위치를 취하는 에릴다의 모습에 나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화낸 건 난데 손을 내미는 건 에릴다라니,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목소리가 쉽게 내뱉어지지 않은 나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금거리며 에릴다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결국 끝까지 사과를 건네지 못했다. 점점 처지는 분위기와 눈에 띄게 침울한 에릴다, 그런데 그 순간 지나온 길에서 파삭파삭- 풀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허리에 찬 검을 챙기고 에릴다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 에릴다도 숨을 고르고 손목을 풀기 시작했다. 먼저 일어나 앞장서기로 한 나는 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끄오 아악!”

탁- 한 발 내기는 순간 갈라진 풀숲에서 끔찍한 울음소리와 함께 초록색 덩치가 뛰쳐나왔다. 울긋불긋한 팔로 내려친 도끼가 훅- 다가오는 순간 뽑아낸 검으로 비스듬히 받아낸 나는 묵직하게 짓누르는 압박에 이를 악물며 그대로 팔을 뻗었다.

-챙!

“꾸르아아악!”

-푸욱

있는 힘껏 도끼를 밀어내자 힘겹게 기우는 오크의 몸뚱이, 자세가 무너지자마자 도끼에서 칼을 뗀 나는 어떻게든 팔을 움직여 푹- 오크를 찔러냈지만 비스듬한 자세와 부족한 힘은 오크의 어깻죽지를 찌르는 게 다였다.

-뻐억!

침 튀겨가며 소리 지르던 오크는 어깻죽지에 칼이 꽂힌 채 강하게 머리를 휘두르더니 그대로 내게 박치기를 바로잡았다. 징- 머리통이 울리는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린 나는 떨어지는 오크의 송곳니를 콱 움켜쥐고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파악! 파악! 파악!

여태 쌓인 울분을 모두 토해내는 화 풀 이적인 주먹질, 어깨에 꽂힌 칼 덕에 오른팔을 쉽게 들지 못하는 오크는 왼팔을 누적 거리며 나를 움켜쥐었지만 나는 짓이겨지는 오크의 머리통을 끝까지 후려갈겼다. 손등과 주먹이 얼얼했지만, 실시간으로 뭉개지고 피 튀는 오크의 머리통을 지켜보니 주먹이 멈추지 않았다.

“마무리하세요!”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수인을 맺고 나를 엄호하고 있는 에릴다가 보였다, 아마 나 혼자서 상대가 된다 생각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거겠지.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꿈틀거리는 오크의 어깨에 꽂힌 검을 쭉 뽑고 피를 한번 털고서 그대로 내려찍었다.

“께흐으윽!”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혀를 내빼 문 오크가 축- 늘어졌다. 요란하게 싸웠기에 다른 오크가 도우러 오나 싶어 언덕 아래를 살펴봤지만, 오크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다고요.”

“다행히 다...”

검에 묻은 피를 최악- 털어내며 다가가자 귀를 퍼덕이며 안심했다는 듯 후- 가슴을 쓸어내리는 에릴다. 오크도 상대할 수 있다니, 방심했던 놈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에릴다와 싸웠다는 사실도 잊고 히히덕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쐐애액!

그리고 나무 그늘 서 있던 에릴다의 뒤에서 묵직한 거금이 바람 소리를 내며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타!

걸리적거리는 검을 내던지고 단숨에 뛰어들었다, 후궁-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느린 속도로 휘둘러지는 고검과 내 몸짓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에릴다, 일그러지는 공간이 보이기도 전에 에릴다와 부딪힌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밀어냈다.

-파악!

벌어진 내 다리 사이로 내리꽂히는 거검, 당황해서 수인도 풀고 땅을 짚는 에릴다를 뒤로 하고 자세를 바로 한 나는 검을 줍기엔 거리가 먼 걸 느끼고 곧바로 주먹을 내뻗었지만 거금을 회수한 오크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빠아악!

“끄흑...!”

“카사노!”

머리통이 징징 울리는 고통과 함께 뜨끈한 무언가가 흐르는 걸 느꼈지만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려 달려드는 오크와 부딪혔다.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큰 오크답게 나는 아무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다.

-뻐억! 뻐억! 뻐억!

기다란 거금을 휘두르지 못하게 팔을 붙잡고 늘어지자 오크는 송곳니를 드러낸 얼굴로 연신 울음소리를 내며 왼팔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무슨 방망이로 얻어맞는 감각에 혀를 내두르며 에릴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내니 멀리서 에릴다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떨어져요!!!”

-타악!

한 톨의 의심도 없던 나는 에릴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내던졌다. 잔뜩 짓밟아 흩어진 흙에 퍽- 몸을 떨구자마자 눈에 보이는 광경은 꽤 화려했다. 에릴다의 손에서 쏟아진 보랏빛 화살이 우락부락한 오크를 단숨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촤아악!

흩어진 피가 땅을 적시는 소리가 숲에 퍼졌다. 이렇게 요란해서야 정찰하기 전에 다 들킨 거 아니야? 흐려지는 시야와 함께 줄줄 흐르는 피가 내 상황이 심각하단 걸 나타냈지만 에릴다가 무사한 걸 확인하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카사노!”

-타다닷

조용히 해야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뭐라 쏘아붙이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뛰어오는 에릴다를 붙잡기 위해 턱 한걸음 내미는 순간 몸이 기울며 시야가 순식간에 회전했다.

-털썩

눈에 뭐라도 낀 것 마냥 뿌연 시야와 징징 울리는 머리통, 어디 찔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당황한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오크와 내가 뭉개놓은 흙은 손에 닿자마자 힘없이 부서져 나를 다시 한 번 쓰러트렸다.

“가만히 있어요, 잠시만...!”

다급하게 뛰어온 에릴다는 내게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나를 더듬었다. 차가운 손길이 욱신거리는 육체를 한 번씩 쓸어 넘길 때마다 나는 서늘한 감각이 마음에 들어 꾹 눈을 감아 에릴다의 손길을 즐겼다.

-우우웅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시야, 그래 봤자 흐릿했기에 뭐가 뭔지 몰랐던 나는 떴던 실눈을 감고 얌전히 에릴다의 손길을 느꼈다. 덜덜 떨리는 손길로 내 얼굴을 붙잡은 에릴다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

“눈 떴냐?”

킁- 한심하다는 콧김을 내뿜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산적, 오크를 잡다가 산적한테 포로로 잡힌 건가? 누워있음에도 빙글빙글 도는 시야로 산적의 면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꿀- 커다란 주먹이 내 이마에 내리꽂혔다.

“아 단장!!!!!!”

“아이고, 왜, 왜 그래!”

“환자를 때리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가 있어요!”

“아이 참, 미안해- 멀쩡해 보이 길래, 레미아 화 풀어. 응?”

욱신거리는 이마의 고통에 핑 도는 눈물을 닦으려고 팔을 들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함에 슬쩍 눈을 숙이니 묶여있는 사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아니 왜 묶어둔 거야? 당황하고 있는데 자그맣게 들리는 촉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후드를 벗은 에릴다가 검푸른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에릴다.”

“방어마법 때문에 괜찮다고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아 맞다, 괴한한테 밤에 습격당했을 때 에릴다가 걸어둔 마법이 있으니 몇 번 정도는 안전하다고 내게 설명했었다.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으려 했지만 이내 묶여있는 걸 깨닫고 얌전히 미소를 지으며 에릴다에게 말했다.

“까먹었어요, 그것보다 이것 좀 풀어주세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달칵 달칵

하나씩 무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압박되던 사지가 순식간에 숨이 트였다. 꽁꽁 묶인 이불에서 팔을 꺼낸 나는 바로 침대를 짚고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우와...”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어질어질한 시야에 눈을 꾹 감고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화들짝 놀란 에릴다가 나를 말렸지만 몇 번 흔들어주니 개운해진 시야가 나를 반겼다.

“정말... 무식하게 그러지 마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내려온 거죠?”

“제가 공간이동 주문서를 썼어요, 그 주변에 오크 무리는 따로 없어서 바로 내려왔어요.”

“확실해요?”

“...비밀이에요.”

대충 둘러댔구나, 단장한테 혼나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눈으로 에릴다를 바라봤지만 이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눈을 돌렸다.

“왜 이렇게 됐는지 다 설명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요.”

“...고맙습니다.”

“원래 정찰만 하려고 했는데, 단장이랑 부단장이 거의 토벌 식으로 끝내놨다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잔당 토벌만 있을 예정이에요.”

“진짜요?”

처음 만났던 오크는 허무하게 이겼었지만 두 번째 오크는 달랐었다. 아직도 머리통을 두들기는 묵직한 주먹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붕붕 머리를 흔드니 에릴다가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노려봤다.

“산에서 울린 괴성에 무리가 흩어져서 덮쳤다더라고요. 아마 저희 때문인 거 같아요.”

아, 처음 만난 오크가 비명을 꽥꽥 질러댔지? 그게 진짜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한 건 한 기분이 든 나는 씩- 웃으며 에릴다를 바라봤다.

“그래서 밤에 마을 주민하고 술이나 먹자고 하던데요.”

“진짜요?”

얼마나 쓸어담았길래 떠나기 전에나 하는 걸 도착한 그날 하자는 거야? 나와 에릴다가 오크 두 마리와 뒹굴며 시간을 보낼 때 오크 무리를 쓸어 담았을 용병단을 상상한 나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피곤하죠? 좀 쉬세요. 저는 단장하고 부단장 도와서 잔당 정찰도 좀 하고 올 테니까 밤에... 아...”

밤 얘기를 꺼내며 입술을 달싹이던 에릴다는 이내 꾹- 입술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우물쭈물하는 에릴다의 태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깨달은 나는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가려는 에릴다의 뒷모습에 큰 소리로 말했다.

“밤에 저랑 같이 밥이나 먹어요.”

멈칫 걸음을 멈춘 에릴다가 즉 뒤를 돌아보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망울이 조금 흔들리는 걸 보니 예상도 못 한 말이었나 보다.

“한 것도 없는 저랑 누가 술을 먹겠어요. 사수가 좀 챙겨줘요.”

솔직하게 사과하진 못했지만,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챘는지 에릴다는 해맑은 미소를 짓더니 응. 하고 고래를 끄덕인 뒤 총총걸음으로 천막에서 빠져나갔다.

“후...”

에릴다가 완전히 떠난 걸 지켜본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밤까지 잠이나 자기로 했다. 딱히 뭘 시키려고 할 것 같지도 않았고 오크랑 투덕거린 여파가 생각보다 큰듯했다.

-저벅 저벅

작은 발소리가 천막에 떠나는 걸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용히, 조용히...

-와하하하!

-그으으오!

-저 새끼 좀 봐, 적당히 먹으라니까!

문득 귓가를 울리는 요란한 웃음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부스스한 눈가를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몸과 어지러운 머리는 여전했지만, 낮보단 훨씬 안정적인 느낌에 안심한 나는 쩍- 하품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으악 제기랄!”

오소소- 소름이 돋은 나는 흐느끼듯 들려온 소름 돋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의자에 앉아 펼친 책으로 입가를 덮은 에릴다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욕한 게 아니라... 놀래서요...”

“풋!”

욕했다는 사실에 겁먹은 줄 알고 에릴다를 달래려고 하니 이내 짧게 웃은 에릴다가 책을 덮고 천천히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하하... 하...”

멋쩍었다, 그리고 어색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에릴다의 행동을 눈으로 좇으니 책을 덮고 구겨진 로브를 팡팡 털며 옷매무새를 다듬는 게 보였다. 이내 벗어둔 후드를 푹 눌러쓴 에릴다는 후드 속 검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조용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볼까요?”

있었던 일을 전부 잊은 것처럼 여유롭게 손을 내민 에릴다는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피어오르는 뭉클함을 가라앉힌 나는 가느다란 에릴다의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섰다.

-타닥타닥

-내가 오크 대가리를 쪼갰는데, 이 새끼가 갑자기 으하하 악! 이 지랄 하는 거야! 그래서 뭔가 했더니 오줌을...

-이 새끼가 거짓말 좀 그만 하라니까!

야영지 곳곳에 타오르는 모닥불과 그 주변을 둘러앉은 용병들이 침을 튀겨가며 떠들고 있었다. 여유롭게 쌓인 오크통을 옮기며 커다란 잔에 한잔 씩 따라 먹기 바쁜 그들은 지나가는 나와 에릴다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몇 개나 지나쳐 걸은 우리는 이내 야영지 맨 끝자락에 홀로 피어있는 모닥불까지 걸어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꺼져가는 모닥불들만이 불똥을 튀기며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잉 차...”

-털썩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에릴다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곧바로 주저앉고 곧바로 후드를 벗었다. 조심성 없는 행동에 나는 곧바로 뭐라 하려 했지만 미리 감지한 에릴다가 입술을 버금이며 [괜 찬 아]라고 전해왔다.

“정말...”

-우웅우웅

“오...”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며 뭐 챙겨올 거 없나 에릴다에게 물으려는 순간 에릴다의 눈앞에 생긴 보라색 마법 진이 열렸다. 사람 하나는 들어갈 만한 공간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상자와 오크통에 혀를 내두른 나는 앉기 전에 몇 개를 들어 옆에 얹어 놨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챙겨놨어요, 잘했죠?”

“네, 네. 잘했네요.”

“히히-”

“...혹시 미리 술 먹고 왔어요?”

뭔가 귀엽게 행동하는 에릴다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 나는 슬쩍 물으며 에릴다의 안색을 살펴봤다. 모닥불의 불빛에 물든 새하얀 얼굴은 숨길 수 없는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쬐끔요.”

“환장하겠네.”

“카사노가 속상하게 해서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또 할 말이 없죠.”

“그럴 땐 그냥 사과하면 좋을 텐데-”

-쪼르르르륵

오크통 옆에 붙은 꼭지를 돌려 커다란 잔에 맥주를 채운 에릴다는 히- 이빨을 보이는 웃음과 함께 잔을 내밀었다. 잔을 받아든 나는 이내 꽉 채운 맥주를 찰랑거리며 손을 뻗는 에릴다의 건배를 받아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요.”

-꿀꺽꿀꺽 꿀꺽

“푸하-”

“에릴다씨 잘못이 아닌데, 괜히 화풀이했어요. 참 못난 놈이죠?”

“카사노.”

“네, 헤엣.”

무거운 분위기 속 사과를 건넨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는 에릴다에게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마자 하얀색 거품 수염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겨우 웃음을 참았다.

“이해해요, 카사노 입장에선 이제 막 용병단에 겨우 적응하고 있는 그런 단계고 저는 그래도 몸 담근 지 꽤 됐으니까요.”

“네...”

여전히 하얀 거품을 입가에 묻힌 에릴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곤조곤 얘기하다가 바로 진중한 표정으로 홱- 나를 돌아봤다.

“그래서 괜찮아요. 그렇다고 제가 아는 카사노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일단... 입가 좀...”

“앗.”

-즉 즉

로브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에릴다가 확-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이며 내 눈길을 피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잔 두잔 술잔을 나누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안주 삼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커어어

-커억, 커, 커어어억

-저 새낀 죽는 거 아니냐?

한밤 중 벌어진 잔치의 열기가 천천히 식어갔다. 지치는 기색도 없던 용병들은 한둘씩 술에 취해 그대로 잠들었고 피곤함에 찌든 생존자들은 그런 시체들을 내버려둔 채 하나둘씩 천막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에릴다씨.”

“으응...”

한잔 두잔 건배할 때마다 가까워진 거리는 어느새 코가 닿을 정도로 딱 붙어있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에릴다의 온기를 애써 털어낸 나는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에릴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들어가요.”

-쪽

“응...”

“어...”

느낌이 이상했다, 말캉하고 축축한 뭔가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 느낌에 나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매만졌다. 하도 열기를 쬐고 떠들어댄 탓에 말랐던 입술이 자그맣게 젖어있었다.

“아... 해버렸다...”

그런 반면 에릴다의 입술은 나와 달리 촉촉하게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말캉한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에릴다는 실수했다는 듯 짧게 읊조리고는 다시 손가락을 떼고 내게 얼굴을 뻗어왔다.

-쪼옥

“읍...”

“쮸웁...”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쑥 밀고 들어오는 부스러기 고기가 내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맥주 향이 물씬 풍기는 혀로 내 입천장과 이빨을 핥던 에릴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즉- 팔을 뻗어 내 목에 휘감았다.

“쮸웁, 츄웁, 흠, 하웁... 쮸우...”

“후...”

“쬬오옵, 웅긋, 하 움, 헤웃♡”

후욱- 따뜻한 콧김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가늘게 뜬 눈을 커다랗게 빛내며 달라붙은 에릴다는 먹이를 조르는 아기 새처럼 내 입에 쪽쪽 혀와 입술을 들이대며 농밀한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츄우, 후 읔, 후음, 쮸우...”

“파하-”

가늘게 이어진 실이 주룩- 우리의 입가에 다리처럼 이어졌지만 이내 툭 끊어졌다. 아하-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내 목을 끌어안은 에릴다가 흥분에 절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상을 줘야겠죠...?”

“저에요?”

-쪼옥 쩝 쩝

갑자기 상이라니, 당황해서 되묻자 벌어진 입술에 연속으로 입 맞춘 에릴다는 침으로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야릇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지켜줬으니까... 흐응...”

말끔 이는 가슴을 내게 비비며 달라붙은 에릴다가 콧소리와 함께 한걸음 물러났다.

-딱

에릴다의 손짓과 함께 퍼져 나가는 보랏빛 마법진, 무슨 일인가 싶어 둘러보는 순간 눈앞의 에릴다가 로브 밑자락을 움켜쥐더니 휙- 뒤집어버렸다.

익숙한 손놀림과 함께 훤히 드러나는 로브 속 몸매, 활동성을 위해 입은 듯한 얇은 천 옷이 후끈한 열기 때문에 젖어 에릴다의 새하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풍만한 하체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바지를 손으로 쓰다듬은 에릴다는 엉덩이라도 먹었는지 집게손으로 죽- 잡아당겨 바지를 정리하고 야릇한 혀 놀림으로 나를 유혹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는 줄 생각 없었는데, 솔직하게 사과했으니까... 주는 상이에요?”

“에릴다씨...”

-쪼옥

달콤한 입술이 닿은 뒤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내게 달라붙었다. 가지런한 이 빨리 내 입술을 살며시 깨문 에릴다가 늘어지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으응... 그냥 에릴다라고 불러요...”

“에릴다...”

-쪼옥

“쮸웁, 후웃, 하 움... 쮸우♡”

꿈틀거리는 혀를 쪽 쪽 빨며 달라붙는 에릴다, 음탕한 눈꼬리로 나를 흘겨보며 쪽쪽 내 혀를 빨던 에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달라붙은 옷을 톡- 톡- 벗어내기 시작했다.

에릴다의 손가락 끝이 단추를 벗겨 낼 때마다 야릇하게 들리는 천 스치는 소리가 멎을 무렵 툭- 땀에 젖어 투명하게 비치는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후음, 후읏, 쮸우... 파하- 흐응... 마음에 들어요...?”

셔츠를 벗자 드러난 새하얀 나신이 모닥불을 쬐자 불그르슴하게 물들었다. 무슨 도자기 같은 에릴다의 피부에 혀를 내두르는데 톡- 뭔가 풀리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고개를 내리자 내게 안기듯이 엉겨 붙은 에릴다가 등 쪽에서 손을 떼더니 무언가를 내 얼굴에 얹었다.

“윽...”

묘하게 따뜻하면서도 가볍지만도 않은 무게에 눈을 뜨자 시야가 까맣게 덮여있었다. 손을 뻗어 움켜쥐자마자 느껴지는 보드라운 천의 감각에 나는 부들거리는 손에 쥔 그걸 살펴봤다.

“어때요...? 검은색 좋아하는 거 같은 데에-”

끈적끈적한 숨결과 함께 귓가에 달라붙는 에릴다의 야릇한 목소리에 나는 손에 쥔 검은색 브래지어를 몇 번 주무르다가 수줍게 코로 가져다 댔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에릴다의 살 냄새에 흥분한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에릴다를 꽉 끌어안았다.

“흐으읏♡ 잠시만요오...”

-탁탁 스르륵

무언가 푸는 소리와 함께 천 스치는 소리가 한 번 더 흘렀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품 안의 에릴다를 핥듯이 바라봤다.

“흐으응... 그때 봤던 팬티랑 같은 걸로 입고 왔어요...”

딱 달라붙은 자국과 함께 음모가 엿보이는 망사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봤던 광경이 똑같이 펼쳐져 있단 얘기에 흥분한 나는 발기한 자지를 에릴다의 몸에 문지르며 그녀에게 엉겨 붙었다.

“흐응, 진정해요♡ 귀여워...”

-쪽 쪽 쪽

내 입술과 볼에 세 번 입 맞춘 에릴다가 한걸음 물러나 내 품에서 빠져나오곤 천천히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나를 정열적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에릴다의 손가락이 푹 파인 빗장뼈를 훑고 천천히 내려갔다, 출렁이는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야릇하게 발기된 젖꼭지를 강조한 에릴다는 툭- 가슴을 쳐서 흔들며 그 위용을 과시한 뒤 천천히 허리를 쓰다듬으며 점점 손을 아래로 향했다.

매끈한 복부를 쓰다듬던 손길이 숨김없이 그대로 아래를 향할수록 나는 거칠어지는 숨을 참지 못했다. 에릴다의 새하얀 엄지가 팬티 끈에 걸리는 순간 나도 바지를 벗으며 속옷 바람으로 에릴다를 맞이했다.

“우와...♡”

팬티 속에서 부풀어 껄떡이는 자지를 확인한 에릴다가 순수한 감탄을 내뱉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날름 혀를 뻗어 입술을 축인 에릴다는 아하- 야릇한 한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스윽 스윽

뱀이 미끄러지듯 천천히 천천히 에릴다의 손바닥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내려갈수록 손가락에 걸린 팬티도 천천히 벗겨졌다. 망사 너머로 비치던 음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벗겨진 팬티가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흥분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휙!

단숨에 허리를 숙여 발목까지 팬티를 벗겨 낸 에릴다가 사과처럼 붉게 물든 얼굴을 내게 들이밀며 내 손에다 손에 든 물건을 쥐어 줬다. 축축한 열기를 뿜으면서 얇은 감촉의 그것을 꽉- 움켜쥔 나는 말없이 주머니에 챙겨 넣으면서 눈앞의 절경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흐으읏... 아아...”

내 뜨거운 눈빛에 에릴다는 애가 타는지 볼을 붙잡고 고개를 젓다가 아주 천천히 다리를 벌려 더 보기 쉽게 나를 도왔다.

-쯔릅

“와...”

앙다문 일자 둔덕이 살짝 벌어지며 끈적이는 꿀을 토해냈다. 주룩- 흐르며 대롱거리는 애액 방울에 혀를 내두르자 살짝 벌린 다리 사이로 손을 넣은 에릴다가 툭- 끊어버렸다.

-쯔걱

“아하, 아하앙...”

손가락을 V자로 만들어 검지와 중지로 둔덕을 천천히 벌이는 에릴다, 말끔 이는 대음순을 짓누르는 손가락이 벌어진 그 순간 앙증맞은 소음순과 벌렁 이는 질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륵

나도 참을 수 없었다. 곧바로 팬티까지 벗어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자지를 꺼낸 나는 한걸음 물러나 스트립쇼를 하듯 음란한 몸뚱이를 매만지며 애태우는 에릴다에게 달라붙었다.

-쯔걱 쯔걱

“흥읏, 흥♡ 너무 급해요오...”

축축하게 젖어 끈적이는 질구에 귀두를 갖다 댔다, 발정 난 개처럼 허리를 흔들며 애액을 흘려대는 질구에 귀두를 비비자 달 뜬 신음을 내뱉던 에릴다가 검지를 뻗어 내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도망 안 갈 테니 까아...”

-쯔릅

한걸음 물러서 품 안에서 빠져나간 에릴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고는 바닥에 얹힌 오크통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짓눌리는 엉덩잇살과 훤히 드러나는 보지에 정신이 나간 나는 성큼성큼 에릴다에게 다가갔다.

-쯔걱

“흐응... 흐읏, 아하...”

질구에만 갖다 댔을 뿐인데 오물오물 달라붙는 속살은 끝내주게 맛있었다. 당장에라도 허리를 푹 집어넣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나는 걸터앉은 에릴다를 부서지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넣을래요. 넣어도 되죠?”

“흐응, 어떡할까아... 응? 나쁜 아이한테는 허락하기 싫은 데에...”

완전히 아이처럼 대하는 말투의 에릴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나를 조롱했다. 당장 허리만 밀어 넣어도 삽입이지만 그렇게 했다간 에릴다와 다신 몸을 못 섞을 거 같은 예감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에릴다에게 애원했다.

“에릴다의 보지 꼭 맛보고 싶어요... 네...?”

“흥♡”

달콤한 비음을 흘린 에릴다가 턱- 내 종아리에 다리를 얹었다. 뱀처럼 스멀스멀 내 등을 쓰다듬던 손으로 나를 끌어안은 에릴다는 축축한 혀로 내 귀를 날름- 핥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릴다의 보지, 맛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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