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새소리와 함께 눈을 뜬 나는 뼈마디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고운 손으로 자지를 훑어주던 에릴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내게 물은 게 화근이었다.
“다른 것도 하고 싶어요?”
노골적인 질문에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호의적인 에릴다의 태도를 믿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 의사를 표현하니 푹- 웃은 에릴다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허리에 얹으며 놀리듯 내게 말했다.
“좀 있으면 의뢰인데,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주면 가능할지도...?”
-스륵
꿀꺽- 침을 삼키며 에릴다를 바라보니 야릇한 미소를 지은 에릴다가 목덜미 쪽으로 손가락으로 쭉 잡아당겨 슬쩍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로브 틈새로 엿보이는 새하얀 살결을 본 나는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그대로 연무장으로 향했었다.
선임들의 놀림을 받아내면서 온종일 허수아비를 두들긴 뒤 땀에 절여져 돌아오니 에릴다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니 오늘은 무리겠네요―”
거, 거짓말 하지 마. 몰려오는 절망감에 얼굴을 굳히고 바라보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에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 보여줄 테니까, 응?”
“네.”
떨어지기 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곳간을 즉- 쓸어만 진 에릴다는 자려는 모양인지 걸친 로브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 스치면서 흩어진 사과 향을 깊게 들이마신 나는 밤새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겨우 잠들었었다.
그리고 지금 전날 무리했던 여파로 찾아온 근육통에 시달리기까지. 이렇게 노력하는 날 에릴다가 알아줄까? 삐걱거리는 사지를 어떻게든 움직이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나는 텅 빈 숙소 안을 보고 그제야 에릴다가 어딘가 떠난 걸 알아챘다.
“끄으응...”
뿌득- 온몸이 쑤셨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충 걸쳐 입은 나는 그대로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오크 토벌이라는 의뢰가 남은 지 벌써 하루, 내일이면 용병단에서 정식으로 의뢰를 위해 출발하는 날이었다. 받은 장비가 있었지만, 선임들이 흘러가듯 말해준 물품들을 챙기기 위해 상점가로 향할 생각이었다.
-잘그락
에릴다에게 건네받은 돈주머니를 챙긴 나는 상점가의 위치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용병단 건물을 빠져나와 그대로 상점가로 향하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카사노!”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그래-”
-토닥토닥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손놀림, 레미아에게 꾸벅 인사한 나는 주름살 없는 로브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레미아 또한 어디로 향하고 있단 사실을 쉽게 파악했다. 달랑거리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품속에 넣은 나는 레미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으응, 내일 의뢰기도 해서 기름이나 잡다한 거 사려고.”
“저도 그러려고 나왔습니다.”
“에이- 딱딱하게 얘기하지마-”
-툭 툭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편하게 얘기하라는 레미아였지만 용병단에서 빠져나와 각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용병단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혼다의 말로는 제대로 모집하는 기간도 아닌데 뽑혀온 나에 관해 이야기가 많다고 했었다, 그런데 뻔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레미아에게 친근하게 군다? 그건 명백한 하수였다.
-소근
“나중에요.”
“햐읏!”
“...?”
“아, 아니야. 그럼 내가 자주 가는 가게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아, 넵.”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펄떡 뛰어오르는 레미아였지만 이내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큼- 헛기침을 하며 팡팡 내 등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단골가게가 있다면 나도 몇 개 얻어먹는 게 있겠지? 기대감에 부푼 나는 앞장서는 레미아의 옆에 나란히 서 그대로 그녀의 걸음을 따랐다.
“그래도 장하네, 시키지도 않은 걸 미리 준비하려고 하고.”
“에릴다씨가 여러 가지 가르쳐줬거든요.”
“흐응... 에릴다는 어때?”
이건 그건가? 직장 상사가 맞선임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그런 거. 에릴다의 평가가 좋아지길 바랐던 나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레미아에게 에릴다의 칭찬을 늘어놨다.
“모르는 거 있으면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고, 매번 어디 갈 때마다 제 생각해주시면서 이것저것 챙겨주십니다.”
“흐응, 그래?”
“네, 저번에 쓰레기들이 시비 걸고 할 때도 도와주고- 계속 보살펴주고 있었습니다. 이야 에릴다시 같은 사수랑 같이 있으니까-”
“그럼 오늘도 에릴다랑 같이 가지.”
“네, 네?”
“아니야. 다행이네- 에릴다가 우리 카사노를 잘 챙겨줘서.”
-주물
“하하하.”
슬쩍 허리에 얹은 손을 주무르며 내 옆구리를 조몰락거리는 레미아, 딱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간지러웠기에 몸을 조금씩 틀며 레미아의 손길을 버텨냈다. 어딘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걷던 레미아는 이내 표정을 풀고 나를 올려다보며 몇 가지씩 묻기 시작했다.
“용병단 생활은 할 만해?”
“아, 네. 아무래도 짐꾼 생활할 때보단 훨씬 낫죠.”
“그래도 자유 용병으로 생활하고 있었잖아?”
“에이, 부단장님 아니었으면 지금도 따돌림 당하고 있었을걸요.”
“그냥 레미아씨라고 해- 딱딱하게 뭔 부단장이야. 아니면 누나라고 해도 돼.”
예전에 아르바이트할 때 매니저나 점장들이 내게 했던 행동이 몇 개 겹쳐 보였던 나는 레미아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사람들도 편하게 형이라고 해- 라고 해놓고 막상 형이라고 부르면 일하는 게 장난이냐며 성을 냈었다. 레미아가 딱히 그런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나는 기대하고 있는 레미아에게 슬쩍 말했다.
“아니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버릇없다고 할까 봐 조금 무서워서...”
“누나라고 하라니까?”
-꽈아악
“그윽, 누나아...!”
“흐응...”
강하게 꼬집는 옆구리의 손길에 나는 신음을 억누르며 누나라고 불렀다. 그냥 누나라고 불리고 싶었던가? 만족스러운 레미아의 얼굴을 살핀 나는 용병단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누나라고 부를 걸 다짐하며 계속 레미아와 대화를 나눴다.
“누나는 용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요?”
“나아? 한 5년은 넘었지- 지금 단장하고 창설할 때부터 같이 있었고, 레미아 다도 만든 지 얼마 안돼서 들어왔어.”
“그래요? 두 분은 꽤 친하시겠어요.”
기억도 안 나는 단장을 대충 넘긴 나는 에릴다와 레미아가 같이 대화를 나누던 걸 떠올리며 슬쩍 물었다. 내 물음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짚으며 흠- 참음을 흘리던 레미아는 이내 쓴웃음과 함께 마음에 담아둔 걸 툭- 내뱉었다.
“그런가,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어. 요즘 숨기는 게 많은 거 같고...”
숨긴다는 말과 함께 나를 흘겨보는 레미아, 저게 여자의 촉이라는 건가? 아니 딱히 찔릴 건 없잖아. 다 큰 성인 둘이 즐기는 건데 뭐 말하고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애써 속으로 변명을 뱉던 나는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레미아의 밝은 목소리로 내뱉던 말을 쏙 집어넣었다.
“아, 여기야! 나름 단골이라서 매번 오고 있어.”
수도 중앙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는 작은 가게. 겉으로 보기엔 가판대에 먼지도 쌓여있고 영업도 안 하는 것 같았지만 깨끗한 문과 정돈된 가게 앞을 보면 그건 또 아닌 느낌이었다.
-드르륵
옆으로 미는 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지팡이를 짚은 삐딱한 노인이 예민해 보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를 바라봤다. 수염에 덮인 주름 가득한 입가가 움찔거렸다가 이내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가게에 울렸다.
“이야- 우리 성공하신 레미아양 아닌가. 어서와. 오늘은 무슨 날인가 보네-”
“영감님 목소리는 여전하네― 근데 무슨 날이라니, 누가 왔어요?”
“그럼 그럼, 우리 단골이 또 오셨지-”
“올 줄 알았어요. 부단, 장...?”
-저벅
생각보다 넓은 가게 안,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가판대와 오래된 책 냄새를 풀풀 풍기는 책장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영감님의 커다란 목소리에 파묻힌 걸음 소리와 함께 책장 뒤에 있던 누군가가 저벅저벅 나서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어머, 에릴다?”
낡은 책 몇 권을 겹쳐 들고 후드를 눌러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릴다, 분명 몇 번이고 봐왔던 검푸른 눈동자였지만 눈빛이 차갑다는 느낌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부단장이랑 카사노... 네요?”
“아, 네. 그게 나오는데-”
-텁
“데이트하기로 했거든. 그치?”
왠지 저기압처럼 보이는 에릴다에게 변명하듯 말하려던 내 입을 덮는 작은 손바닥, 작은 주제에 꾹- 입가를 짓누르는 힘에 꼼짝하지 않는 입술에 경악한 나는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에릴다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이내 마음대로 떠드는 레미아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그래서 단골 가게나 소개해줄까 해서 왔는데 네가 있을 줄 몰랐네?”
“...한참이나 어린 애 데리고 그런 농담을-”
“어머.”
만화에서나 보던 빠질-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꾹- 내 입가를 짓누르는 손길이 더 세진 걸 느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에릴다를 노려보는 레미아를 긴장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나이는 에릴다 선생님께서 더 많잖아요.”
“흐으음...”
가벼운 참음을 흘리며 레미아를 마주 보는 에릴다, 하지만 가벼운 참음과 달리 분위기는 무거웠다. 처음엔 상황 파악 못 하고 떠들던 노인도 슬슬 살기를 감지했는지 ‘나는 정리나 하러 가야겠다~’ 하며 지팡이를 짚고 멀리 떠나버렸다.
“푸하- 제, 제가 가게 안내 좀 해달라고 누나한테 부탁했어요.”
“누나?”
“아, 참.”
오는 길 내내 누나라고 불렀던 탓에 그새 입에 붙었던 나는 에릴다 앞에서 레미아를 누나라고 불렀다. 팽팽하던 둘의 긴장감은 내 발언 하나에 끊어진 고무줄처럼 맥없이 탁- 풀려버렸다.
“후후, 누나라니 참. 얘도 참-”
-짜악
“악!”
“누나는 물건 몇 개만 사려로 왔는데 잘됐네. 에릴다이모가 사수니까 물어보면서 몇 개 사달라고 그래-”
“레미아!”
“어머, 깜짝이야. 그럼 나는 간다?”
그새 살 물건을 다 챙겼는지 품에 한가득 챙겨 든 레미아가 지팡이를 짚으며 ‘싸우는 줄 알았어-’ 하고 떠드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화난 건 아니겠지? 에릴다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로브에 덮인 에릴다의 얼굴을 슬쩍 훔쳐본 나는 미동도 없는 무표정을 보고 살짝 겁이 났다.
“하하하.”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슬쩍 에릴다의 옆에 붙었다. 내가 왜 눈치를 살펴야 하는지 몰랐지만,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이는 에릴다를 두고 어디 갈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이것저것 챙기는 에릴다의 옆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쫑알쫑알 떠들었다.
“부단장님도 참, 친하다고 그런 농담을 하고-”
“...”
“에릴다씨는 언제 가게에 왔데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숙소에 없어서 조금 놀랐어요.”
“......”
“아, 피곤해- 얼른 사고 숙소로 가서 쉴까요? 가는 길에 물건은 제가 들게요. 원래 부사수가-”
“아줌마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
“네, 네?”
아줌마 정도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에릴다를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뾰로통한 얼굴로 에릴다가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사노도 레미아가 좋죠? 밝고, 재밌고 귀엽고...”
“아니에요, 저는 에릴다씨가 더 좋죠.”
“왜요?”
-텁
가게 곳곳을 누비며 물건을 담던 에릴다가 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빙글빙글 별이 맴도는 밤하늘 같은 맑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 속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릿속에 떠오르던 말을 정리하다가 겨우 입을 떼고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탁!
“아직도 있어? 빨리 사고 나가- 나가볼 데 있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는 노인이 짓궂은 말을 내뱉으며 우리를 흘겨보고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에릴다는 다가온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초점이 흐린 눈동자에 힘을 주고 몸을 돌려 노인에게 향했다. 턱- 턱- 턱- 자루에 물건을 담으며 금액을 계산하던 노인은 내게 손바닥을 펼치며 가격을 말했다.
“2실버만 줘.”
2실버? 여관 2박은 묵는 값을 한 번에 내야 한다니, 부들부들 손이 떨렸지만, 품속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대로 반짝이는 은색 동전 두 개를 꺼냈다.
“카사노.”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고개를 젓는 에릴다였지만 나는 왠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에릴다 모두에게 안심하라는 신호로 찡긋 윙크하고 노인에게 2 노년을 내밀었다. 돈을 받은 노인은 군말 않고 손을 휙휙 저으며 축객 령을 내렸고 볼 일이 없던 나는 자루를 들고 쭈뼛거리는 에릴다의 손목을 움켜쥔 채 가게에서 나왔다.
-드르륵
“제가 낸다니까요.”
고개를 젓는 게 본인이 계산하겠다는 그런 뜻이었구나. 나는 방금까지 삐친 듯이 굴었던 주제에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에릴다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에 술이라도 사줘요. 의뢰 가기 전에 술 먹고 싶어요.”
“나 참... 못 말린다니까...”
-피식
능글맞게 굴며 옆에 딱 붙어 에릴다를 따라가자 무표정한 에릴다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풀려서 다행이다- 속으로 안심한 나는 숙소에 짐을 내려두고 오자는 에릴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끼익, 달그락 달그락
“이건 여기에 넣고, 이건 저기다가...”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짐을 싸놓자는 에릴다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아무 옷과 잡동사니를 가방에 쑤셔 넣고 정리하는 에릴다를 구경했다. 등불에 넣을 기름과 건식, 왜 챙기는지 모를 목욕도 구와 처음 보는 크래프톤 물건 몇 개를 움켜쥔 에릴다는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는 나를 손짓으로 호출했다.
“방향제인데 뭘 챙기는 게 나을까요?”
사과향, 포도향, 딸기향이에요- 설명을 덧붙이는 에릴다. 천연방향제가 왜 방향제를 챙기는지 의아해진 나는 여전히 세 가지 중 하나를 고민하는 에릴다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 하러 방향제를 챙겨요, 에릴다 아씨한텐 필요 없잖아요?”
“의뢰하는 내내 냄새에 시달리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게 아니라 에릴다씨한테서 사과 향이 나잖아요. 에릴다씨만 있으면 되지 뭐 하러 방향제를 챙겨요?”
“네헤에엣?!”
“엥?”
믿지 못할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깜짝 놀란 에릴다는 확- 사과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이내 파들파들-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몸 냄새가 사과 향일 수도 있지 그게 화낼 일인가 싶어 당황한 나는 손사래를 치며 에릴다에게 말했다.
“아니 몸에서 사과 향이 나는 게 어때서요...!”
-꽁!
“끄윽!”
생각보다 매콤한 주먹이 내 정수리를 강타했다.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붙이며 홱- 고개를 돌린 에릴다는 말없이 사과향 방향제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다시 짐정리를 시작했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간 나는 짐을 챙기는 에릴다의 옆에서 알짱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단단히 화가 난 에릴다는 잠정리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쾅!
“듣고 있어요?”
“네, 네.”
망했다. 낮에 있던 일부터 쭉 마음에 하나씩 담아둔 에릴다는 주점에 오자마자 물마시듯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처음엔 기쁜 얼굴로 술을 내오던 주인이었지만 점점 불콰해지는 에릴다의 행동에 진상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아까부터 아예 이쪽으로 오지도 않고 여급에게 모든 걸 떠넘겼다.
“친하게 지내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엄연히 직장이고, 상사인데- 누나라니. 누나는 아니죠.”
“네...”
“듣고 이써요!”
-쾅
“내리치는 건 그만 해요...!”
내일 있을 의뢰가 걱정돼 맥주를 얼마 먹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틀거리는 에릴다와 만취한 가 된 내가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 있을 후폭풍에 어지러워진 머리를 붙잡은 나는 몇 번이고 전했을 사과를 다시 한 번 에릴다에게 전했다.
“죄송해요. 부단장이 부르래서 부른 거지 진짜 누나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아-”
끝나지 않을 영겁의 지옥에 발을 들인 건가? 나는 진혼곡의 서막을 듣고 입을 꾹 닫으려다가 혹시나 싶어서 빙글빙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는 에릴다에게 슬쩍 말했다.
“죄송해요 누나.”
“하 끅.”
-쾅!
몇 번이고 내려쳤을 모를 위스키 잔이 테이블에 꽂혔다. 후드 너머로 보일 정도로 빨갛게 익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에릴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꾹질을 하며 입을 턱 막았다.
“하 끅!”
하지만 한번 시작된 딸꾹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연신 가슴을 들썩이며 딸꾹질을 반복하는 에릴다의 모습에 나는 테이블 한쪽의 물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줬다. 하 끅- 딸꾹거리며 몸을 떨던 에릴다는 내가 건네준 물잔을 쥐고 그대로 한입에 꿀떡 삼키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우...”
겨우 멎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에릴다는 조금 정신 차렸는지 후드를 꾹- 눌러쓰며 내 눈을 피했다. 부끄러울 만도 하지. 슬슬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됐기에 나는 테이블에 팔을 얹고 숨을 고르는 에릴다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그녀를 일으켰다.
-드르륵
“제가, 일어날게요오...”
“저한테 기대요. 혼자 위스키를 여섯 잔을 마셨는데 일어나겠어요?”
“몰로...”
몇 번이고 테이블을 내려친 에릴다를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여급에게 술값을 낸 나는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그대로 주점에서 빠져나왔다. 주점을 나서자마자 수도 곳곳을 비추는 밝은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는 에릴다의 손길에 피식- 웃고 그대로 숙소로 향했다.
-끼이익
“후아아~”
-스윽 스륵
빨리 가고 싶다며 칭얼거리던 에릴다는 숙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치적거리던 로브를 훌렁 벗어버렸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천 옷을 걸친 줄만 알았던 에릴다의 로브 속 상황이 오늘만큼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라?”
저번에 엿봤던 속옷보다 대담한 검은 속옷이 위아래로 빤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천과 가슴에 착 붙은 브래지어, 윗가슴을 덮는 망사 같은 소재와 밑가슴 쪽에 새겨진 고급스러운 자수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팬티도 마찬가지로 윗부분이 그대로 망사로 덮여있었기에 사타구니가 훤히 드러났다. 그러니까 에릴다의 털이 보였다는 얘기였다.
“아앗...”
-파악!
흐느적거리며 로브를 벗던 에릴다가 화들짝 놀랐는지 침대 속으로 재빠르게 숨어들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속옷의 잔상을 눈으로 쫓던 나는 이불 너머로 눈만 빼꼼 내민 에릴다가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봤어요?”
“저도 가끔? 그런 일이 있죠, 밖에 나갈 일 있으면 위에 가볍게 걸치고 안에는 집에서 입던 옷만 입는-”
“봤구나.”
“네.”
[끄아아앙!]
-퍽 퍽 퍽
술에 취한 만큼 감정에 솔직해진 에릴다가 이불 속에 숨어들어 이불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예사롭지 않은 솜 두들기는 소리가 방안에 한참 동안 울려 퍼졌기에 그녀의 눈치를 살핀 나는 괜히 입 뻥긋했다가 이불처럼 얻어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아, 하아...”
몇 분이 지나서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이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에릴다, 답답했는지 확 붉어진 얼굴과 땀에 젖은 얼굴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꼭 정사를 나눈 뒤의 얼굴 같은 야릇한 모습에 다리를 오므린 나는 숨을 몰아쉬는 에릴다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속옷 차림을 봐버려서.”
“그, 그런 거까지 사과 안 해도 돼요. 그냥 저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여자의 속옷 차림을 훔쳐본 게 됐잖아요.”
“...상냥하네요.”
사실 사과를 안 하면 이불처럼 얻어맞을 것만 같아 억지로 내뱉은 사과였지만, 에릴다는 만족스러웠는지 이불밖에 내민 얼굴에 자리 잡은 눈이 반달을 그리며 미소를 띠는 듯했다.
“......”
“......”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끊긴 우리는 뭔가 불편한 침묵에 서로 가만히 바라봤다. 다리를 꽉 오므린 채 에릴다의 미소 짓는 얼굴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이불 너머의 있을 에릴다의 속살이 떠올랐다. 새하얀 살결과 대비되는 야릇한 검은 속옷에 꽉 붙들린 육감적인 몸매는 얼떨결에 훔쳐봤음에도 정말 매력적이었었다.
“......카사노.”
움찔거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눈길에 무언가를 느낀 걸까? 여전히 이불을 덮어쓴 채 눈만 빼꼼 내민 에릴다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당황한 나는 얼 타듯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머리카락과 똑같은 검푸른 눈동자가 내 영혼이라도 들여다보듯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괜한 긴장에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자 이내 에릴다가 색기가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로 넌지시 운을 띄었다.
“...다시 보고 싶어요?”
-꿀꺽
한손으로 움켜쥐어도 흘러내릴 듯한 부드러운 가슴과 도자기처럼 잘 빚어진 아름다운 곡선, 쭉쭉 뻗은 팔다리와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로 풍만해 보이던 엉덩이까지. 얼핏 봤음에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에릴다의 육감적인 몸매를 보고 싶으냐고? 나는 당장에라도 끄덕이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괜, 찮아요.”
안 괜찮다.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순순히 본다고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제발 내 예감이 맞기를 빌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스윽- 스윽- 이불에 살이 스치는 소리가 자그맣게 방안에 울렸다.
-저벅저벅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을 바라보며 울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길 기도했다. 바닥 너머로 엿보이는 새하얀 발이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렸을까? 아니면, 에릴다는...
“고개 들어도 돼요.”
“......”
“잘 참았으니까, 상이에요...”
“......”
“그리고, 열심히 했으니까아...”
안 잊었구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들자 놀랐는지 한걸음 물러서는 에릴다였지만 더는 물러서지 않은 에릴다는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와...”
눈으로 조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투명한 피부. 그럼에도 핏줄 하나 엿보이지 않는 새하얀 살결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양팔로 팔짱을 낀 탓에 에릴다의 매끈한 복부가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복부만 가려졌을 뿐 나머지는 온전히 볼 수 있었다.
“짐승...”
팔짱 탓에 치켜 올라간 가슴이 살짝 흔들렸다. 꽉 끼는 브래지어에 붙잡힌 가슴은 그 풍만한 자태를 과시하며 폭 파인 가슴골을 드러냈다. 저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지만 애써 억누른 나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읏...”
내 적나라한 눈길에 참음을 흘리는 에릴다. 도자기처럼 빚어진 다리는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밴들거린다는 표현이 생각날 정도로 윤기 나는 피부와 딱 맞아떨어지는 비율의 기다란 다리를 훑어본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소를 빤히 바라봤다.
“하 아아...”
풍만한 엉덩이가 팬티에 약간 짓눌려 음란한 살이 조금 삐져나왔다. 오히려 좋은 풍경을 눈에 땀은 나는 망사 너머로 엿보이는 검푸른 음모를 보며 흥분을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사타구니에 딱 붙은 팬티와 그 너머에 엿보이는 음모, 거기다가... 미약하게 먹힌 속옷 때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도끼 자국까지.
“다, 다 봤어요?”
“네. 네.”
이글이글- 아마 내 눈빛은 그 정도로 불타고 있을 거다.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에릴다가 다시 모습을 감추기 전 나는 가슴과 사타구니 위주로 기억에 남기기 위해 정말 뚫어지라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두 눈에 저 자태를 더욱 선명하게 남기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말 그대로 암묵적인 규칙, 이였다.
“...가까이서 봐도 되는데.”
-출렁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발사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릴다에게 달라붙었다. 가까이 붙자마자 느껴지는 야릇한 체향, 여자의 살 냄새를 킁킁 맡으며 달라붙은 나는 풍만한 에릴다의 가슴을 빤히 바라봤다. 긴장이라도 한 걸까? 흐르는 땀 한 방울이 빗장뼈를 타고 주룩- 가슴골로 스며들었다.
“흐읏...”
송긍송글 맺힌 땀방울들이 가슴골로 쏙 속 흘러들어갈 때마다 흥분을 참지 못한 나는 뜨거운 콧김을 그대로 내보냈다. 훅- 깊은 가슴골에 콧김을 받아들이던 에릴다는 날름-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팔짱을 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슴에 양손을 얹었다. 설마...
-쩌읍
“우와아...”
딱 달라붙은 음탕한 살덩이가 갈라졌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을 넘기며 땀방울이 흐르는 가슴골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지가 욱신거리면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짙은 살 냄새와 향기로운 땀 냄새라고 할까? 그것들을 만끽하며 가슴골을 기분 좋게 지켜본 나는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흐응, 잠시이...”
훅- 내뿜은 콧김이 간지러웠는지 에릴다는 길쭉한 다리를 비틀며 내 콧김을 피했다. 이내 야릇한 미소를 지은 에릴다는 천천히 쭉 벋은 다리를 천박하게 벌려 미지의 그곳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쿡
“으흣...♡”
참지 못한 나는 그대로 얼굴을 확 내밀었지만 예상 못 한 속도에 그만 에릴다와 부딪혔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말캉함과 야릇한 신음, 그리고 코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물기에 당황한 나는 곧바로 얼굴을 떼며 에릴다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흐응... 괜찮으니까...”
-확
갑자기 코안에 스며드는 진한 향기, 많이 맡았던 향기인 사과 향이 천천히 폐부에 스며들었다. 소읍- 상큼한 사과 향을 기분 좋게 들이쉰 나는 벌어진 다리 밑에 훤히 드러난 도끼 자국을 정말 뚫어지라 바라봤다. 착 달라붙은 팬티와 흐른 땀에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굴곡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하아, 하 앗...”
에릴다의 야릇한 신음과 함께 그녀의 육체를 관람한 지 어느덧 몇 십 분이 지났다. 흥분으로 흐른 땀은 어느새 내 온몸을 적셨고 에릴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신이나 다름없는 몸이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에릴다씨, 그, 이제 괜찮으니까...”
마음 같아선 밤을 새우며 바라보고 싶었다. 살결과 주름 하나하나 두 눈에 깊게 새기며 기억에 남기고 싶었지만 쑥스러워하는 에릴다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거기다가 도끼 자국은 되면서 겨드랑이는 끝까지 가리는 에릴다의 기행에 더는 밀고 나가면 보여줄 것도 안 보여줄 것 같아서 이만 마음을 접었다.
“흐으응...”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나를 흘겨보는 에릴다. 두 눈이 꽂히는 곳은 내 곳간이었다. 설마 손으로 빼주려는 건가? 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에릴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쉿- 입술을 손가락으로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부터 저희는 바쁘니까...”
그랬다. 내일은 의뢰 날이었었다. 완전히 망각했던 나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으며 에릴다의 눈치를 살폈다.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을 눈치 챈 에릴다는 쿡쿡- 웃더니 이내 저벅저벅 내게 다가와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내일, 멋진 모습 보여주면 다른 것도 해줄게요.”
“저, 정말요?”
“오늘 약속 지킨 것도 멋있었고오... 또 질투 나게 했으니까...”
-꾹
검지로 내 코를 꾹 누른 에릴다는 취기가 올라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베에- 혀를 내밀고 풀썩 침 데에 뛰어들었다. 땅굴 파는 두더지처럼 순식간에 이불 속에 파고든 에릴다는 불도 끄지 않고 쌕- 쌕- 숨을 내뱉다가 이내 코- 잠들어 버렸다.
“와...”
어서 자야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불을 끄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불붙어버린 흥분 때문에 눈이 감가치 않은 나는 빳빳해진 자지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고민했다. 차라리 뺄까? 아니 빼면 피곤해지는데. 수많은 갈림길에 선 나는 데굴데굴 머리를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정을 못 내려 고민하던 나는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멍청한 선택을 내렸다. 고민에 빠져 밤을 지새운 나는 짹짹- 귓가에 울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첫의뢰부터 좆 박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