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112화 (112/395)

무사히 시험을 끝마친 나는 고블린 이빨에 물어뜯긴 흉터 그대로 단장실에 올라갔었다.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정식으로 용병단에 들어가게 된 나는 레미아에게 따로 의뢰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릴다와 계속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주동안 에릴다와 같이 지내면서 깨달은 건 레미아가 내게 농담 삼아 말한 게 정말 진실이었다는 거다.

“에릴다씨, 또 가려고요?”

“흐- 이제 이주도 넘겼는데 며칠째 묻는 거예요?”

수도 곳곳에 차려진 주점을 돌며 도박 원정을 하던 에릴다는 구부러진 혀로 애써 정확한 발음을 내뱉으며 나를 꾸짖었다. 카드를 잡으면서 한잔씩 걸쳤을 뿐이지만 오늘 하루 들린 카드테이블만 여섯 군데라면 얘기가 달랐다.

예쁘기만 한줄 알았던 이 엘프는 도박 중독 그자체인 미친 엘프였었다!

“그만 돌아가요, 갈 데도 없잖아요.”

혼자 판을 날로 먹는 에릴다로 인해 분통을 터뜨린 도박꾼들이 판을 엎은 탓에 우리는 광장 변두리에 있는 마지막 주점에서 마저 쫓겨났다. 술, 담배, 도박. 전부 손대며 하루를 보내는 에릴다를 꾸짖자 에릴다는 프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게 말했다.

“그럼 술이나 먹어요- 숙소까지 가기도 귀찮은데...”

“에휴...”

-텁

흐느적거리는 에릴다의 팔을 내 목에 걸고 안정된 자세를 만든 나는 그대로 에릴다를 질질 끌고 갔다. 이주간의 경험으로 마지막에야 다다르는 주점은 항상 가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활기찬 여급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쥐고 있는 메뉴판이 덜덜 떨리더니 순식간에 카운터로 뛰어간 여급이 주인에게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드륵

“흐으...!”

바닷가에 표류된 문어마냥 테이블에 축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에릴다. 술도 잘 먹는 엘프였지만 오늘은 꽤 피곤했는지 금세 고주망태가 돼서는 아까부터 이 상태였다.

“카, 카사노 오늘도 왔네.”

“아, 안녕하세요.”

맨들거리는 대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다가오는 주인장, 슬금슬금 다가오면서도 환영하지 않는 목소리를 보니 어제 에릴다가 깨부순 테이블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게 뻔했다.

“으응...!”

에릴다의 로브 속에 냉큼 손을 뻗은 나는 그녀의 주머니에서 은화 몇 장을 꺼내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에릴다가 좋아하는 양주와 내가 먹을 맥주, 그리고 에릴다 몰래 하는 변상이라고 덧붙이자 주인장은 눈에 띄게 밝은 얼굴로 주방으로 뛰어갔다.

“내 돈...”

“제 돈도 섞여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으으...”

-탁 탁

“물부터 드릴게요. 따로 주문은 더 없으시죠?”

“네.”

-꿀꺽 꿀꺽 꿀꺽

여급이 물러나자마자 테이블에 얹힌 물 컵을 쥐어든 에릴다는 후드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는지 고개를 확 재끼면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에릴다의 외모가 소문나면 귀찮아지는 건 나였기에 얼른 후드를 씌운 나는 에릴다에게 짜증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후드 신경 쓰라고 했잖아요.”

“에이, 솔직히 알 사람은 다 알아요.”

에릴다가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라는건 수도 곳곳에 퍼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의 범위로 퍼진 얘기였다. 확실하게 아는 건 나와 단장 부단장, 그리고 용병 길드의 간부들 뿐.

노예제가 폐지됐다고 하지만 엘프를 노리는 인간들은 아직도 많았고 마법까지 사용하는 에릴다의 존재는 아주 귀했기 때문에 레미아는 옆에서 철저히 숨기도록 도우라고 내게 말했었다.

뭐, 그거와 별개로 아름다운 외모로 파리가 꼬이기 때문에 숨기는 게 편했다. 수도 곳곳의 주점을 돌며 돈을 따고 다니는 에릴다가 사실 끝내주는 미녀 엘프라고 하면 분명히 시끄러워질 테니까-

-탁

“맥주부터 드리겠습니다.”

나는 여급이 가져다준 맥주를 들며 에릴다를 바라봤다. 그녀가 좋아하는 양주는 제국 양조장에서 만든 뭐 엠페러 머시깽이 17년산이었나? 아무튼 그런 이름 이였는데 꽤 비싸다고 들었다. 맥주의 보리향을 킁킁거리며 맡던 에릴다는 곧 나올 술을 기대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아, 이런 꿀맛 같은 휴가도 곧 끝나다니-”

“저는 긴장돼요.”

“푸흐, 첫의뢰네요?”

에릴다의 말대로 5일 뒤면 꿀 같은 휴가가 끝났다. 단체로 의뢰를 받아 떠나는 대규모 의뢰가 5일 뒤에 잡혔기에 이렇게 흥청망청 놀 날도 얼마 안 남았었다. 뭐, 내 입장에선 아무것도 해둔거없이 노는 것보단 첫의뢰라도 뛰는 게 오히려 설렜다.

“여기 주문하신, 그으... 나왔습니다.”

익숙지 않은 이름인지 대충 흘려 말하며 테이블에 잔을 얹고 도망가듯 물러나는 여급. 피식 웃은 나는 이슬이 맺혀 찰랑이는 맥주잔을 높게 들어 에릴다에게 내밀었다.

“건배하시죠.”

“그럴까요.”

한손에 잡히는 양주잔을 움켜쥔 에릴다는 흐느적거리는 입가로 미소를 지으며 이내 밝은 목소리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풋내기 카사노의 첫의뢰를 위하여...?”

-짤랑!

꿀꺽꿀꺽, 목을 타고 흐르는 진한 보리향과 따끔한 탄산에 눈을 질끈 감으며 그대로 흘려 넘겼다. 등골을 훑는 쾌감에 만족하며 단숨에 잔을 비우고 쿵- 테이블에 내려놓자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잔을 흔들며 한 모금씩 들이키는 에릴다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귀여워서요.”

“으-”

질색을 하며 팔을 긁자 호록- 한 모금 들이킨 에릴다가 이내 깔깔 경박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땐 무뚝뚝하고 차가운 에릴다였지만 조금 편해진 지금 생각보다 활달한 그녀의 성격에 아직도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데, 에릴다씨. 제가 물어본 건 언제 말해줄거에요.”

-짤그랑

“또 뭐가요...”

“도박할 때 둥둥 떠다니는 보라색 덩어리.”

“......”

가느다란 호선을 그린 입가는 꾹 닫혀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미소 지은 에릴다는 말없이 손을 흔들며 짤그랑-짤그랑- 유리잔에 얼음을 부딪치며 듣기 좋은 소리만을 흘렸다.

“에이... 됐어요.”

“말해줘요?”

“됐어요-”

“진짜 말해주려고 했는데-”

“제가 알아내는 게 더 빠르겠어요.”

“푸흐, 만약 알아내면 상줄게요.”

“됐다니까요-”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질문을 흐리는 에릴다의 화법에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새로 맥주를 한잔 더 시켰다. 도박을 할 때마다 간혹 보이는 도박꾼들 머리 옆의 보라색 덩어리의 정체를 밝혀낼 것을 다짐한 나는 이슬이 흐르는 맥주잔을 집고 그대로 들이켰다.

“크흐...”

“이야, 풋내기 같던 카사노가 이젠 맥주도 잘 먹네요-”

“저 술 잘 먹거든요?”

“푸흐, 어제 완전 뻗어서 나한테 누나라고-”

-쾅!

“아이, 거 참 아니!”

“어머, 말로 하지 테이블은 왜 때린 데요?”

저 멀리서 걱정되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대머리 주인장의 눈빛을 읽은 나는 내려친 테이블을 쓰다듬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냥 누나라고 불러요- 나는 상관없으니까.”

“됐어요, 그렇게 부를 정도로...”

“흐응...”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 에릴다. 사실 요 이주간 그녀를 따라다니며 수없이 술을 퍼먹고 카드게임 하는걸 구경했지만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술을 먹는 지금에야 이런 농담이나 친근하게 대화하지만 다른 때에는 딱히 이정도 텐션의 대화가 나오지 않았다.

“이것만 마시고 갈까요...?”

머뭇거리는 내 태도에서 어색함을 느낀 걸까? 한잔 더 시켜달라고 칭얼거렸을 에릴다가 절반 이하로 남은 잔을 흔들며 조용히 내게 말했다.

“네, 네.”

-달그락

“푸흐-”

그러자고 대답하자마자 고개를 확 꺾으며 단숨에 양주를 들이키는 에릴다. 구형태의 얼음이 에릴다의 분홍빛 입술을 짓누르는 야릇한 모습을 지켜본 나는 갑자기 술 냄새를 확 풍기며 얼굴을 들이미는 에릴다에게 떨어지기 위해 몸을 뒤로 물러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가, 갑시다.”

“...그러죠.”

어느새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내가 에릴다에게 바라는 건 뭘까? 처음엔 그저 동경하는 여인이었고, 부사수가 됐을 땐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주간 따라다닌 지금, 단순히 친한 사람으로 지내긴 싫었고 그렇다고 다가갈 용기도 없었다. 나는 용병단에서 별 쓸모도 없는 밥벌레 그 자체였으니까...

-딸랑딸랑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아침마다 항상 챙겨주고 여유로운 미소로 담배를 한 개비씩 챙겨주는 에릴다가 좋았다. 말없이 뒤따를 때 힐끗힐끗 돌아보며 나를 살펴보는 다정함도 좋았고 카드게임마다 모두를 이길 때면 여유로운 미소를 후드 아래에 띠며 주점을 나설 때쯤 내게 당당하게 자랑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근데 그게 좋다는 감정인가? 그냥 동경하는, 강한 그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다보니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닐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화가 난 나는 터벅- 터벅- 거친 발소리를 내며 내게 기댄 에릴다의 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살살 걸어요...”

항상 숙소로 돌아갈 때면 에릴다는 멀쩡히 걸을 수 있음에도 풍만한 육체를 내게 기대며 숙소까지 붙잡아달라고 칭얼거렸다. 어느새 익숙해진 에릴다의 무게를 견디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등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곱씹으며 저벅저벅 길을 걸었다.

에릴다는 아무 생각도 없을 거다. 풋내기 같은 막내한테 무슨 생각이 들겠어? 나도 그냥 잘챙겨주는 사수한테 느끼는 감동이 애정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휙휙- 고개를 흔든 나는 오늘따라 멀게 느껴지는 숙소에 야속함을 느끼며 끊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

“씨발! 이게 말이 되냐고!”

관자놀이 옆에 보라색 덩어리를 둥둥 띄우며 성을 내는 남자가 테이블에 얹어진 카드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판을 깨자마자 사라지는 덩어리와 함께 에릴다를 흘겨본 나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섰다.

“적당히 해요.”

“엉덩이나 대주는 남창새끼는 빠져! 씨발, 너네끼리 수작질 부리니까 좋아? 응?”

“진정하게, 우린 속임수를 쓰지 않아.”

침튀겨가며 성내는 남자와 그를 진정시키는 중년아재. 얼떨떨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보는 마른 남자와 아무런 관심 없다는 태도로 카드를 정리하는 에릴다. 각자 다른 네 명의 감정이 부딪히는 테이블은 이내 남자의 난동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쿠웅!

주점에 흩뿌려지는 카드와 엎어진 테이블, 나뒹구는 동화와 은화를 허겁지겁 줍는 마른 남자와 싸늘한 눈의 아재. 가만히 앉아있던 에릴다는 마른 남자의 손에 쥐여진 은화 몇 개를 뺏어들고는 그대로 일어났다.

-턱

“씨발, 어디를 가려고?”

잔뜩 화가 난 남자가 에릴다의 어깨를 움켜잡는 순간 나는 참지 않았다. 얇은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몸을 돌려 우두둑- 손목을 꺾고 남자의 발목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쿠당탕

“끄윽...!”

“이봐!”

말리려는 태도의 아재였지만 나는 가볍게 손을 까딱이며 물러나라고 말했다. 먹힐지 긴장됐지만 문제없이 넘어진 남자의 벌레 같은 모습에 만족한 나는 돌아간 손목을 우득- 살짝 꺾으며 말했다.

“말로 하면 될 걸 왜 붙잡고 그러셔.”

“끄흑... 씨발, 사기 쳤잖아...!”

“카사노.”

“후우-”

움켜쥔 손목을 풀고 상체를 짓누르던 무릎을 뗐다. 카드 더미 위에 엎어져 흐윽- 흐으- 숨을 고르는 남자를 뒤로하고 나와 에릴다는 그대로 주점에서 빠져나왔다. 딸랑이는 문소리와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화악- 얼굴에 닿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취기에 비틀거리는 행인들 사이를 파고들어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열리는 문소리가 들렸지만 따라오기엔 이미 늦었겠지.

예의 익숙한 뒷골목에 들어서자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에릴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텁- 입에 물고 한 개비를 내게 내밀었다. 싸움의 긴장으로 잘게 떨리는 손으로 받아낸 뒤 입에 물자 에릴다가 치익- 그어 불붙인 성냥을 내게 붙여줬다.

“후읍...”

-화륵

타들어가는 하얀 표면과 줄어드는 회색 재가 투둑- 바닥에 떨어졌다. 내 입에 물린 담배 끝에 주황색 불똥이 자리 잡자 성냥을 홱 내던진 에릴다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불똥에 담배를 맞대고 후웁- 숨을 들이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후우-”

좁은 골목에 퍼지는 회색 담배연기, 이리저리 뒤틀리며 벽을 타고 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쫒던 나는 눈을 꾹 감고 정리했던 생각을 툭- 내뱉었다.

“,,,마법이죠?”

“후우...”

-치지직

땅에 떨어진 꽁초가 불똥을 튀기며 툭툭 뒹굴다가 에릴다의 부츠에 짓밟혀 그대로 불이 꺼졌다. 후드를 벗어 검푸른 머리칼과 함께 무표정한 얼굴을 드러낸 에릴다가 몇 번 정도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앞니로 깨문 뒤 조용히 내게 말했다.

“신기하네요, 보이는 사람은 드문데.”

“첫날부터 보였으니까요, 뭐 사기 치지 말라곤 안하겠지만 그 남자 말이 맞았네요.”

“원래 속고 속이는 게 도박이니까요, 그 사람들도 카드 뒷면에 표시를 남겨서 유리한 패를 쥐기도 했고요.”

상대가 손에 카드를 쥘 때마다 빤히 바라본 건 그것 때문이었나? 덤덤하게 말하는 에릴다의 목소리에서는 얼핏 당당함 마저 느껴졌다. 무어라 꾸중할 생각도 없었지만 되레 당당하게 나오는 에릴다의 태도를 보니 모든 게 허무해졌다.

“흐으, 미안하네요, 괜히 추궁하는 것처럼 말해서.”

“저도 제가 잘한 짓이라곤 생각 안 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들킬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게 더 기분 좋으니까, 즐겨할뿐.”

“...변태 같네요. 뭔가.”

“예전엔 정말 아슬아슬하게 거는걸 좋아했는데, 요즘은 속이지않는게 바보가 돼버려서요.”

-저벅

골목에 울리는 발소리, 에릴다가 움직였거니- 생각한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쭉 빨아먹은 뒤 후우- 연기를 뿜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만 갈까요?”

“...더 즐기기는 힘들겠죠.”

-저벅 저벅 저벅

좁은 뒷골목에 울리는 발소리, 늦은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을 지표삼아 빠져나오는 순간 골목 너머에서 무언가가 후욱- 휘둘러지며 에릴다의 머리 쪽으로 내려뻗었다.

-뻐억!

순간 주변이 느려졌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에릴다의 발과 푹 눌러쓴 로브 끝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까지 느껴지는 멈춘 시간 속에 홀로 유영하던 나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앞으로 날려 뻗은 팔로 각목을 막아냈다.

“씨, 씨이바알!”

-철컹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각목 조각사이로 보이는 흔들리는 눈동자. 카드 더미위에 누워 뒹굴던 사내가 허리춤에 찬 칼을 뽑으며 그대로 내 머리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은색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뻗어오는 칼날을 보다보니 하늘에 걸린 초승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욱!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보라색 마법진에 막혀 그대로 밀려났다. 꼴사납게 바닥에 넘어진 사내는 바닥을 짚고 서둘러 일어났지만 이내 손등을 짓밟는 에릴다의 발길질에 검을 놓치고 한심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윽...! 사기꾼년...! 죽여버릴거야아...!”

“먼저 짜고 친게 누군데요.”

“이 개 같은 갈보 년이, 뚫린 주둥이익...!”

-빠악!

바닥에 덜렁거리는 머리통을 그대로 걷어찬 나는 축 늘어지는 텅텅 빈 머리통을 가만히 쳐다봤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와 축 늘어진 혀. 죽이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돼버릴게 뻔했기에 기절시키는 게 차라리 편했다.

“갑시다.”

-꽈악

바닥에 늘어진 사내를 뒤로하고 에릴다의 손목을 붙잡은 나는 그대로 달렸다. 타다닥- 거리에 울리는 우리의 발소리와 함께 거리에 놓인 가로등이 하나씩 불이 꺼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고민하며 생각 없이 달리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밟혔다.

“후우, 후우...”

“하아아...”

우리는 벅찬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불편한 침묵을 유지하며 방문을 연 난 그대로 땀범벅인 상의를 훌렁 벗으며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후우...”

“어머, 저도 있는데 갑자기 벗다니.”

여태 이주 넘게 봐놓고 아무런 말도 안한 주제에 갑자기? 가늘게 뜬 눈으로 에릴다를 흘겨보니 씨익- 입 꼬리를 추켜올린 에릴다가 로브 끝자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뒤집어버렸다.

-스륵

천 스치는 소리와 함께 출렁이는 젖가슴, 몇 번을 봐도 대단한 볼륨에 침을 삼키며 에릴다가 눈 뜨는 순간 시선을 돌리며 못본척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브 안의 천옷은 달려온 탓에 땀에 푹 젖어 에릴다의 육감적인 몸매에 착 달라붙어있었다.

“후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 에릴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이며 뜸을 들였다. 달싹이는 입술과 붙었다 떨어지는 엉덩이에 고민이 가득한 게 보인 나는 먼저 대화를 끝내기 위해 에릴다에게 말했다.

“이만 잘까요?”

“아, 그럴까요.”

그렇게 대답한 에릴다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를 계속 바라봤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편할 텐데- 답답했던 나도 에릴다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니 풋-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린 에릴다가 침대보를 꾸욱 움켜쥐며 내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풀썩

짧은 인사와 함께 이불에 누운 에릴다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그대로 조용해졌다. 큼큼- 헛기침을 하거나 팡팡 침대를 내려치며 일부러 소리를 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걸 보니 그대로 잠든 게 분명했다.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슬쩍 살펴본 뒤 아무런 문제가 없는걸 확인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방안은 조용했다. 스으 스으- 낮은 숨소리와 이불이 스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애써 눈을 감으며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진한 사과향이 스며들었다.

고맙다라- 사실 에릴다에겐 내 도움 따윈 필요 없었을 텐데, 왜 저런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나는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생각을 외면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졸음의 실마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에릴다를 습격한 괴한에게서 보호해준뒤 우리의 관계는 뭔가 이상해졌다. 단 둘이 있을 때만 간혹 말을 걸거나 장난을 치던 에릴다가 이제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도 안하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크래프톤 교역마차가 온다던데- 가볼래요?”

“저 돈 없는데요.”

“돈은 제가 있잖아요.”

필요 없다는데도 구경가보자며 억지로 크래프톤 산 물건들을 구경시켜준다거나.

“이거 맛있네요, 먹어봐요.”

“저는 됐어요.”

“그러지 말고-”

포크와 나이프로 큼지막한 고기를 내게 덜어주면서 본인은 얼마 먹지도 않고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내 식사를 구경한다던가.

“카사노, 곧 의뢰인데 준비 잘 하고 있지?”

“네, 에릴다씨가 계속 도와주고 있어요.”

“말도 참 예쁘게 해요.”

-스윽 스윽

“응...?”

단장의 호출로 떠나기 전까지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레미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끝까지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도대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좁아진 거리에 당황하고 있을 무렵 멀리서 에릴다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사노-”

“왜 그러세요?”

-짤그랑

다급하게 걸어오는 에릴다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품안에 손을 넣은 에릴다가 묘하게 따뜻한 열쇠뭉치를 내 손에 얹어줬다. 자세히 살펴보니 숙소 열쇠와 알 수 없는 열쇠 꾸러미였기에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에릴다를 바라봤다.

“오늘 부단장을 따라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아아-”

요 이주간 에릴다와 떨어진 적은 매우 드물었지만 간혹 가다 한번 레미아의 호출로 에릴다와 떨어지는 일이 가끔 있었다. 본인의 입으로 고급인력이라고 한 게 거짓이 아닌 듯, 가끔씩 불려나간 에릴다는 매일 늦은 밤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럼 오늘은 숙소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늦을 테니까 밥 잘챙겨먹고 있으세요.”

“네, 네-”

무슨 엄마도 아니고 저런 것까지 챙겨주려고 하다니- 알 수 없는 반발심에 대충 대답한 나는 따뜻한 열쇠를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내 모습이 에릴다는 서운했는지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사노... 사수가 간다는데도 그냥 뒤돌아 가버리다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흐응... 나 없다고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마요?”

“그런 거 안 합니다.”

이상한 짓이라니- 순진한 얼굴을 하고선 가끔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에릴다에게 단호하게 대답한 나는 싱긋 웃는 그녀를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요 며칠 바빠서 그런가, 성욕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에릴다가 걱정하는 일같은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니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벌컥, 쿵

여느 때와 같은 짙은 사과향을 맡으며 문을 닫은 나는 훈련이나 할까 하다가 그냥 낮잠을 자기로 결심해 훌렁 옷을 벗었다. 에릴다가 있을 땐 아무리 더워도 몇 벌은 걸쳐야했기에 지금 같은 자유로운 상황이 반갑기만 했다.

“응?”

코끝을 맴도는 사과향과 함께 진한 살 냄새가 느껴졌다. 묘하게 자극이 되는 알 수 없는 향기에 코를 벌름이던 나는 곧 향기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우와.,.”

고급스러운 자수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에릴다의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입었던 땀범벅인 천옷도 침대 끄트머리에 던져진 그대로였기에 나는 코끝을 맴도는 살 냄새의 근원이 이것들임을 확신했다.

-꿀꺽

“빨래바구니에 넣어야하나?”

정신없이 나선 에릴다가 그냥 던져두고 간 걸까? 만약 그녀가 저걸 내버려뒀단 사실을 기억도 못한다면 돌아왔을 때 저렇게 펼쳐진 상태의 속옷을 보고는 내가 건든 게 아니냐고 의심하면 어떡하지?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에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다.

“으...”

간만에 아랫도리에 피가 몰린 나는 방안에 가득 찬 사과향과 뒤섞인 에릴다의 살 냄새를 맡으며 고민에 빠졌다. 요즘 피곤해서 이런 쪽으론 아무 생각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막상 짙은 여자냄새를 맡으니 몸이 바로 반응했다.

-스윽

일단 바지를 벗으며 침대에 누운 나는 팬티에 갇힌 자지를 바라보며 고민, 또 고민했다. 그냥 자위를 할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내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낮이었기에 창부들을 안으러 갈수도 없었다.

-스륵

결국 팬티까지 벗은 나는 천장을 향해 빳빳하게 발기한 자지를 슬쩍 움켜쥐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자위였기에 자지를 움켜쥐는 손놀림마저 어색했다. 코끝을 맴도는 야한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은 나는 머릿속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을 곁들여 그대로 손을 흔들었다.

-팟 팟 팟 팟 팟

열심히 흔들수록 손이 살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어떻게든 집중해서 상상을 하려고 했지만 귓가에 맴도는 살 소리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에릴다의 향기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나 에릴다의 침대로 향했다.

-스륵

손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코 가까이 들었을 뿐인데 비교도 안 되는 진한 살 냄새가 선명히 느껴졌다. 브래지어와 팬티 둘 중 하나를 고민하던 나는 묘한 얼룩이 엿보이는 팬티를 그대로 집어 들고 내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풀썩

주름이 생긴 이불에 그대로 드러누운 나는 끝없이 흐르는 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그대로 에릴다의 팬티를 얼굴에 가까이했다. 보드라운 천의 감촉과 훅 들어오는 야릇한 향기에 눈가에 틱틱 불똥이 튀는 듯한 착각에 빠진 나는 그대로 숨을 들이키며 열심히 자지를 흔들었다.

눈을 감고 상상 속에 빠져 자위하는 것보다 에릴다의 짙은 향기를 맡으면서 손을 흔들수록 사정감이 몰려왔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지 않던 에릴다가 지금은 팬티 냄새만 맡아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마치 문이라도 열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처럼.

“아...”

눈앞의 에릴다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후드 아래속 입을 뻥긋거리고 있었다. 상상일 텐데 왜 여기서 까지 로브를 입는 건지, 로브 너머의 육감적인 몸매를 떠올리며 자지를 흔들던 나는 변함없는 에릴다의 복장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몇 번이고 벌어졌다가 오므려지는 분홍빛 입술, 후드 너머로 엿보이는 말끔한 볼을 어느새 붉게 물들어있었다. 거기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후드를 쥐고 그대로 벗자 후드속 감쳐 쥔 기다란 귀가 연신 까딱이며 당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게... 짐을 놔두고 와서...”

간다고 했지 당장 간다고는 안했었다. 사과처럼 붉게 물든 얼굴을 푹 숙인 에릴다는 꼼지락 거리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풀이 죽은 자지를 손으로 가리며 어지러움을 느끼고 그대로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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