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컷 노예들의 주인이 됐다-93화 (93/395)

[부부 시점]

“여보, 갈 시간이에요.”

“으응...! 흐아, 벌써 그렇게 됐어?”

거실 중앙에 놓인 카우치에서 일어난 제미니는 사랑스러운 미소로 자신을 깨워준 아내, 에릴다를 바라봤다.

“늦었다니까요?”

사랑스러운 아내의 별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을 걸어둔 듯한 검푸른 머리칼은 길게 쭉 뻗어 귀족 나리의 커튼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반대로 드넓은 초원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담은 듯한 맑은 눈동자는 가만히 보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흰 원피스를 걸치고 카우치에 걸터앉은 제미니의 팔뚝을 잡고 일으킨에릴다는 슬쩍 뺨을 내미는 남편의 행동에 못 말린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다 쪽- 입 맞춰줬다.

“흐흐, 다녀올게.”

“다치지 않게 조심히 일하세요!”

“걱정하지 마, 튼튼한 거 빼면 시체인데 어련하겠어?”

장난스레 이런저런 자세를 잡으며 근육을 뽐내는 제미니, 철없는 장난을 치는 남편이 귀여워 제미니의 볼을 꼬집은 에릴다는 남편의 등을 팡- 치며 늦지 않도록 떠나보냈다.

“오늘도 올 사람 없으니까 괜히 문 열지 말고.”

“알았대도요. 제가 애예요?”

“흐흐, 항상 사랑스러운 아기 같은걸.”

“흥! 제가 아기면 오늘 밤 그렇게 기대하는 건 못하게 됐네요?”

“여, 여보!”

-쿵!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베- 혀를 내민 에릴다는 풀이 죽은 남편의 얼굴을 되새기며 집 안을 바라봤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마을 일을 돕는 남편이 돌아오려면 저녁쯤에 돌아올 테니 미리 집을 치워둘 심산이었다.

-툭!

“어머...”

문을 닫으며 들어온 바람에 넘어진 걸까? 남편과 1년 전에 찍었던 액자가 엎어진 걸 확인한 에릴다는 서둘러 달려가 액자를 일으켰다.

경직된 미소의 제미니와 행복한 표정의 에릴다. 이게 벌써 1년이나 됐구나- 에릴다는 참 다사다난했던 1년 전 남편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거실 구석에 놓인 흔들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

“흑, 흐윽, 흐읏!”

-파삭파삭 타다다 닷

“어디 갔어!”

“멀리 안 갔을 거야, 개 같은 년. 페런의 눈을 찔러?”

“상처 안 나게 조심해! 암시장에 넘겨야 하니까!”

에릴다는 핑 도는 시야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숲을 뛰어다녔다.

파삭- 뭉개지는 나뭇가지와 팔을 스치는 풀들의 감촉을 느끼며 도망치던 에릴다는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들이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흐읏, 흐으윽...!”

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꽤 오래 몸 담갔던 용병단에서 머물렀던 에릴다는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감을 느껴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용병단에서 도망쳤었다.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온 것도 잠시, 멀리서 노숙 중이던 인간들이 에릴다를 보더니 미친 듯이 쫓아온 게 지금의 상황이었다.

“헤, 눈여겨보던 년이 제발로 나올 줄이야...!”

“옆에서 얼쩡거리던 성가신 애새끼도 없고 횡재했어,”

“뭐가 횡재야 씨이발...!”

‘흐으, 안돼애...!’

반격으로 날린 에릴다의 마법으로 인해 눈에 마나 파편이 꽂힌 남성이 악에 가득 찬 욕설을 내뱉으며 에릴다의 흔적을 뒤쫓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조바심을 느낀에릴다는 고갈된 마나를 끌어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공간 이동을 사용하면 탈진이 오고 말아, 하지만 노예상들한테 붙잡히면...’

용병단 동료들이 겁주듯 얘기했던 순혈 노예 사냥꾼들의 수법을 떠올린 에릴다는 부르르- 몸을 떨고 고개를 들었다. 공간 이동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고 지금은 달려야 할 때다- 생각한 순간 파악! 수풀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잡았다아-!!!”

“잘했어 토미! 드디어 한 건 하는구먼!”

“끄흐읏, 싫어어어어!!!”

토미라고 불린 곰 같은 남자가 앙증맞은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에릴다의 손목을 붙잡았다. 꽉- 빠져나올 수 없는 악력에 에릴다는 뒤편에서 점점 빠르게 다가오는 목소리에 결국 눈을 감고 크게 소리 질렀다.

[-------!!]

형용할 수 없는 문자와 배열이 허공에 떠오르며 에릴다의 마나를 끌어당기며 시계 태업처럼 돌아갔다.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 진은 보랏빛 마나를 뿜으며 에릴다를 집어삼키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씨발...!”

“토미! 꽉 잡으랬잖아!”

“어, 어 페런? 뒤, 뒤!”

“뭐?”

-쩌어억!

밤송이 같은 수염을 기른 남성이 한 손으론 두 눈이 퉁퉁 부은 청년의 귀떼기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커다란 도끼로 남자의 골통을 짓이기며 걸걸한 목소리로 청년을 꾸짖었다.

“이새끼야, 여기 맞아?”

“맞다 고요 씨발! 이것 좀 놓으라고!”

“이 새끼가!”

-뻐억!

“아악!!! 씨발, 화장실 간다고 했는데 도망칠 줄 알았냐고!”

“단장 그만 해요. 일단은 이놈들부터 심문해요.”

“그, 그럴까?”

토미는 눈앞에 서 있는 세 명을 찬찬히 둘러봤다. 드문 검은 머리의 청년은 포악한 눈으로 동료들을 노려보며 달려들었고 페런의 골통을 쪼갠 사내는 한심한 표정으로 여인에게 들러붙어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 쫓던 엘프 어쨌어?”

실눈으로 노려보는 주황색 단발의 여인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여유롭게 되물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주변에 떠 있는 흙 조각과 바위가 훙훙- 돌며 토미에게 다가왔고 흙먼지를 그대로 들이킨 토미는 헛기침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켈룩, 모, 몰라! 무슨 보라색 진을 펼치더니 사라졌어...!”

“이런, 공간 마법을 사용했으면 뒤쫓긴 어렵겠는데...”

“손해가 크겠네, 카사노 이 개새끼를 그냥...!”

“그만 해요. 애가 무슨 잘못이라고.”

“그, 그런가? 알았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둘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토미는 훅- 풍겨오는 혈향에 고개를 들고 냄새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피 칠갑을 한 청년이 악마 같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새끼도 죽여도 되죠?”

“사, 살려줘...!”

“흠... 그래 그럼. 아쉽지만 에릴다는 포기하자.”

-서걱!

공포에 질린 사내의 목을 단숨에 썰어버린 카사노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카사노의 표정을 본 사내가 흉포한 얼굴로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여인의 손짓에 팔을 내리고 온순하게 대기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는데, 그러기엔 손해가 너무 커.”

“안 찾는 것도 손해가 크잖아요.”

“...일단 돌아가자, 에릴다만큼 특징이 뚜렷한 엘프는 없으니까 수소문을 해보면 찾을 수도 있을 거야.”

“......”

불퉁한 표정의 카사노는 결국 단호한 여인의 대답에 고개를 푹 숙이고 둘을 뒤따랐다. 물론 에릴다를 쫓아온 셋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강에 에릴다가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으음...”

끝없는 공허의 바다를 헤엄치던 에릴다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누가 눈이라도 꿰맨 것처럼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은 전혀 뜨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어떻게든 꿈틀거리며 지금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에릴다의 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드셨어요?”

낮고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 아니 듣기에만 그럴 뿐 속으론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 몰라! 믿었던 남자의 배신에 역겨운 노예상까지, 남자에게 환멸감을 느낀 에릴다는 상처 입은 다람쥐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며 남성에게 물었다.

“누구죠...! 여긴 어디고요...!”

혹시나 자신을 욕보일 생각이라면 에릴다는 서슴없이 혀를 깨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정체도 모를 남자에게 강하게 나갔다.

에릴다의 단호한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문 남자는 이내 스륵- 에릴다의 눈을 덮은 천을 치우며 우물쭈물 말했다.

“저, 저는 제미니라고 하고요. 여기는 수도 건너 하폰산 중턱에 있는 마을입니다. 나무를 주우러 가다 강에 빠진 걸 발견해서 우리 집에 데려왔어요.”

-끔뻑

눈을 덮은 천을 치우자 무거웠던 눈꺼풀이 단번에 뜨였다. 잠시 뿌연 시야가 눈앞에 맴돌았지만 몇 번 눈을 끔벅이자 깨끗한 집 안이 엿보였다. 에릴다는 삐꺽 이는 고개를 어떻게든 틀어 지금 말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으...”

“괜찮으세요? 상태가 많이 안 좋던데.”

패기도 숫기도 없어 보이는 유약한 갈색 더벅머리의 남자. 사슴 같은 눈망울로 걱정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잠시 경계가 풀릴뻔한 에릴다였지만 저것도 위선이라 생각해 다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구해준건 고맙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삐걱

“크흐읏...”

눈앞의 남성에게 괜한 해코지를 당할까 봐 침대에서 일어난 에릴다였지만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제미니는 손을 뻗으며 에릴다를 붙잡았지만 이를 악문 그녀는 삐꺽 이는 팔로 제미니의 팔을 쳐내고 그대로 쓰러졌다.

“됐다고요!”

자신을 구해준 제미니와 대면한 에릴다는 그 후에도 제미니의 호의를 번번이 거절했다.

뜨거워진 몸을 식히라고 물에 젖은 천을 건네주면 바닥에 내던지기 일쑤였고 배를 채워야 하지 않겠냐며 건네준 수프는 모조리 집어 던져 바닥을 더럽히게 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달그락

조금 멎은 근육통과 함께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에릴다는 자신이 너무 심한가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이 꼴이 된 것도 방금같이 여린 마음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 남자에게 마음을 안 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에릴다는 가만히 상체를 일으켜 벽에 등을 바로 세운 채 창문을 바라봤다. 드넓은 하늘, 구른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에릴다는 벅차오르는 서글픔에 또륵- 눈물을 흘렸다.

-끼익

“다시 가져왔어... 우세요?”

-달그락

테이블 위에 그릇을 얹은 제미니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릴다의 뺨을 닦았다. 서슴없는 접근에 에릴다는 흐느적- 팔을 휘저어 제미니의 팔을 쳐냈다.

-탁!

“윽.”

“...만지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다니, 에릴다는 눈앞의 남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결국 이 남자도 똑같을 거야.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다잡은 에릴다는 결국 생각만 했던 행동을 현실로 옮겼다.

-스르륵

바보같이 챙겨주기만 하고, 보답도 못 받는 호의를 베푸는 남자라도 결국 남자. 여태 다른 인간들이 그랬듯이 이 남자도 똑같을 거야.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 에릴다는 당황해 눈을 가리며 말리는 제미니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목적은 제 몸이겠죠. 마음대로 범하세요. 보복할 생각은 없으니까-”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나신을 드러낸 에릴다는 이내 잔뜩 붉힌 얼굴로 상의를 벗기 시작하는 제미니의 행동에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남자도 똑같았어. 역시 인간은 다를게-

-스르륵

바깥에 훤히 드러낸 상체가 무언가로 덮이는 감촉, 당황한 에릴다가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눈을 가린 채 얼굴을 붉히며 에릴다의 상체를 자신의 옷으로 덮어주는 제미니였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몸을 소중히 하세요.”

“...제가 왜요?”

“상처받은 눈을 하고 계시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세상의 고난을 전부 짊어진 슬프고도 덧없는 그런 눈빛을...”

“......”

“아무것도 모르던 저는 여느 때와 같이 일하러 나갔죠, 어머니의 미소와 함께 배웅을 받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반겨주셨어요.”

“목에 밧줄을 감은 채로, 일그러진 미소로 저를 반겨주셨어요. 그러지 마세요.”

“...알았어요.”

“아무리 힘들고 역겨워도 살아야죠. 그런 서글픈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기회도 못 얻고 가기에는 너무... 서글프잖아요?”

-주룩

탁 트인 하늘을 볼 때처럼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먹먹한 심정에 에릴다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한없이 슬픈 미소로 에릴다를 바라보며 덤덤히 입을 연 제미니는 이내 몸을 돌리고 수프가 담긴 그릇을 건네주며 말했다.

“드시고 기운 내세요. 저녁에 마을에서 약초를 좀 받아올 테니 주무시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네...”

“하하...”

멋쩍은 미소와 함께 문을 닫고 방을 나서는 제미니, 에릴다는 조금 식은 수프를 숟가락으로 천천히 한 스푼 퍼내고 자신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주룩

“흐윽...”

너무 뜨거워서,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수프와 제미니의 끝없는 호의가 너무 뜨거워서 눈물을 뚝 뚝 흘리며 힘겹게 식사를 이어나간 에릴다는 엉망진창인 얼굴로 텅 빈 그릇을 테이블에 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후우...”

영혼을 반으로 찢은 것처럼 전혀 아물 거 같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상처는 어느새 말끔히 나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천천히 옮기며 몇 주 동안 갇혀있던 문고리를 꽉 움켜쥔 에릴다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끼익

서로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이라고만 착각한 에릴다에게 그 감정이 오로지 농락과 성욕뿐이었다고 그 남자가 밝혔을 때 느꼈던 치욕스러운 배신감과 이미 길들여질대로 길들여져 영혼에 새겨진 음탕한 쾌락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었다.

“어...?”

당황한 눈으로 에릴다를 바라보는 제미니, 에릴다는 그 어리숙한 미소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다가갔다.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끝내 부서졌지만, 그 보답을 드디어 여기서 받게 됐다고 에릴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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