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5.5 달콤한 재회를 꿈꾸던 도시 속 외로운 부인 레이첼
-터벅터벅터벅
기분 좋게 씻고 나온 나는 침대보를 드러내 치운 뒤 잠깐 눈을 붙인 뒤에 그대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잠시 한숨 돌리긴 했지만 여관에 레이첼이 돌아올 때까지 밥이나 먹으며 시간이나 때우기 위함이었다.
-웅성웅성
“어제 들었어?”
“들었지. 나는 그게 사람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었다니까.”
“쓰읍... 그 정도라니...”
가운데 자리 잡은 테이블에서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식당의 모두가 다 들을 정도로 호들갑떨며 대화를 나눴다. 음흉한 표정과 손짓을 보니 어제 나와 레이첼의 정사를 얘기하는 듯 했다.
-콰앙!
“아침부터 시끄럽게 그런 얘기 그만하죠?”
주방에서 음식을 들고 나온 소피가 테이블에 쾅 소리 내며 접시를 내려놨다. 살짝 튀는 소스와 음식 쪼가리, 사내들은 소피를 노려보다가도 도끼눈을 뜨며 이를 가는 소피의 얼굴에 웃으며 머리를 긁고 사과했다.
“미, 미안.”
“우리가 좀 시끄러웠나?”
“밥이나 먹자고, 맛있겠네.”
“별꼴이야. 흥.”
도도하게 고개 돌린 소피가 성큼성큼 주방을 향해 걸어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머리를 찰랑이던 소피는 화들짝 놀라며 가냘픈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쟁반으로 상체를 가리며 꾸벅 인사해왔다.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꾸벅 인사하자 마찬가지로 고개 숙여 인사한 소피가 총총 걸음으로 주방으로 뛰어갔다. 뭐에 쫓기듯 도망치는 걸음에 머리를 긁으며 남는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았다.
“그으... 저어...”
멍하니 테이블을 두들기며 기다리는 중 누군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푹 숙인 소피가 쭈뼛거리며 내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꾸벅 고개 숙이고 메뉴판을 피자 소피는 물러가지 않고 옆에 서서 주문할 때까지 기다렸다.
“오늘의 추천 메뉴 이걸로 주세요.”
메뉴판을 받은 나는 맨 앞장에 따봉 표시와 함께 큼지막이 박힌 이름을 읊었다. 네, 네! 하고 메뉴판을 받아간 소피가 호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저년 왜 저래 저거.”
“아주 신이 났구먼.”
뒤에 사내들이 혀를 차며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못들은 척하고 테이블을 두들기며 기다렸다. 레이첼이 오면 모든 정리가 끝난 뒤 마을로 가고, 마을로 가면 미네르바를 만나러 가야했다. 물어볼 것도 많고 보답도 해야 했다.
상념에 잠겨 나만의 생각에 푹 잠겨있을때쯤 타다닷- 발소리와 함께 접시를 든 소피가 붉은 얼굴로 뛰어왔다. 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두르는 걸음과 함께 테이블 앞에서 멈춘 소피는 툭- 접시를 내려놨다.
“흐음...”
김이 올라오는 허브가 얹어진 매끈한 통닭다리구이와 으깬 감자샐러드가 곁들여져 나온 추천 메뉴. 개인적으론 닭은 좋아하기에 꾸벅- 소피에게 인사한 후 포크를 들었다.
-꾸벅
맞인사후 카운터로 뛰어간 소피는 기웃기웃 나를 보면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뭐 마려운 개 마냥 구는 꼴이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내 신경 끄고 마저 식사했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 앗 언니!”
닭다리를 다 뜯고 빈 접시에 포크를 내려놓을 때쯤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소피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들던 사내들도 일순간 입을 닫고 미소를 띄운 체 케이프를 펄럭이며 여관 안으로 들어오는 레이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 내가 짐싸고 있으라고 했잖니.”
“제가 짐이 어디 있어요, 몸만 있으면 되죠!”
“애도 차암- 앗, 주, 카사노씨.”
입술을 삐죽이며 소피에게 핀잔주던 레이첼이 환하게 웃으며 도도도- 내게 달려왔다. 부츠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멈춘 레이첼은 슬쩍 접시를 보고 살갑게 굴며 달라붙었다.
“식사는 어땠어요? 맛있었죠?”
“네, 제가 닭을 좋아해서요.”
“아 이분이 말씀하신...?”
웃으며 레이첼과 대화를 나누는데 돌연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뭔가 하고 살펴보니 아까 레이첼이 들어올 때 가려져 못 봤지만 다른 사람도 같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 네. 카사노씨? 이분이 저희 여관을 매입해줄 분이에요.”
레이첼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서글서글한 인상의 금발 남자가 손을 내밀어왔다. 웃는 낯으로 손을 쥔 나는 살짝 힘을 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흐흠...! 그럼 절차대로 하고 대금만 곧바로 치러드리겠습니다. 조건은 변함없으시죠?”
내 짓궂은 장난에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손을 뺀 남자는 손을 뒤로 숨기며 레이첼에게 여관 매각에 대한 얘기를 물었다.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을 쭉- 손으로 가리키며 마음껏 구경하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고용인들은 그대로 고용해주시고, 소피만 제가 데려갈게요. 그럼 지금 바로 가봐도 되겠죠?”
“네, 대금은 저희 상단 지부로 가서 수령하시면 됩니다. 저는 여관을 좀 둘러보겠습니다.”
알수 없는 사업 얘기를 나누는 둘을 흘겨보며 슬쩍 레이첼의 뒤로 섰다. 이야기를 끝마친 레이첼은 미소를 흘리며 팔짱을 끼고는 나를 천천히 끌고 갔다.
“제 짐만 정리하고 그대로 가면 된답니다. 소피 저 아이는 짐이 없다네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레이첼씨 방은 어디에요?”
“같이 가요- 좀 더 챙길게 있으니까. 얘, 소피? 손님 좀 옆에서 봐드리렴. 짐만 챙기고 나올게!”
“네에-”
발랄하게 대답하는 소피를 뒤로 하고 우리는 레이첼의 방으로 향했다. 레이첼의 방은 방대한 양의 옷을 품은 옷장을 제외하고는 삭막한 방이었다. 필요한 가구만 갖춰진 방에서 잡동사니와 옷을 전부 챙긴 나는 레이첼이 챙겨온 확장 주머니에 몽땅 담고 어깨에 짊어졌다.
“성공했네요. 이런 거까지 사용하고.”
꽤 좋은 마법이 걸려있는지 별 부담감이 안 느껴지는 무게에 나는 살짝 놀라 레이첼을 바라보며 칭찬을 건넸다. 내 칭찬에 레이첼은 수줍어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챙겨온 돈이 많았으니까요. 생각보다 운이 많이 겹쳤어요.”
잡담을 나누며 레이첼의 방에서 나온 우리는 아직 손님, 아 이제는 여관 주인인가? 주인의 안내를 하던 소피를 불렀다. 불려온 소피는 정말 아무런 짐도 없는지 바구니 하나만 챙기고는 여관을 나서는 우리 둘을 뒤따랐다.
-딸랑딸랑~
“하아... 정말 가는 거네요.”
한숨을 내쉰 소피가 여관 간판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레이첼이 여관을 차릴 때부터 곁에서 도와줬다고 하던데 홀가분해 보이는 레이첼과 다르게 소피가 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 애절해보였다.
“소피, 아쉽니?”
나이 어린 동생을 돌봐주듯 소피에게서 눈을 못 떼는 레이첼이 풀이 죽은 소피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줬다. 난 여자들의 저런 슬퍼하는 부분을 쉽게 공감할 수 없었지만 괜히 잘못 입 놀리면 등쌀에 떠밀려 욕을 들어먹는걸 알았기에 입을 닫고 둘을 지켜봤다.
-저벅 저벅
“새로운 곳에 새로운 만남이 있다고 하잖니.”
“그래도 랜디 아주머니랑 홉스씨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그 둘은 이 도시에 가족이 있잖니. 응?”
끝까지 뒤돌아보며 아쉬워하는 소피의 옆에 붙어서 재잘재잘 떠드는 레이첼을 뒤에서 한발 물러나 지켜보기로 하고 일단 대금을 받기 위해 상단 지부로 걸음을 향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지부 안으로 들어서는 셋을 향해 고개 숙이는 접수원, 하늘색 유니폼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여성은 미소와 함께 레이첼을 보며 말했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나요?”
“대금을 받으려고요.”
무슨 증과 함께 손을 내민 레이첼, 받아든 접수원은 살짝 눈이 커졌다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먼저 지부장님과 대조 후 대금을 치러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네에.”
총총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는 접수원, 나는 털썩-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주저앉고 레이첼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내 옆에 앉은 레이첼의 소피의 눈을 피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것만 끝나면 다 정리된 거니까 돌아가요.”
“네,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후훗 지루하시죠?”
그렇게 티가 났나? 나는 뻘쭘해하며 고개를 젓고 지부 안을 둘러보며 구경했다.
“아니에요. 신기한 게 많네요. 우와~”
티나는 연기에 레이첼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 웃으며 내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살 울리는 소리에 소피는 귀를 쫑긋 이며 우리를 흘겨봤고 소피의 시선을 느낀 레이첼이 슥 손을 치우고 소피에게 붙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날 따라와도...”
“어차피 언니 아니면 이 도시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못가졌을거에요. 할짓 없는 용병새끼들이 소문만 내고 다녀서-”
쫑알쫑알 나는 가볍지 않네, 사랑을 향해 달려드는 것도 죄인가요? 떠드는 소피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레이첼은 손수건을 들고 열변을 토하는 소피의 입가를 톡톡- 닦아줬다.
“얘는- 숙녀가 뭐 이런 데니.”
“아이 차암-”
맏언니와 막내 동생 같으면서도 엄마와 딸 같은 둘의 사이를 흐뭇하게 지켜본 나는 미세하게 들리는 발소리에 레이첼의 어깨를 툭- 쳤다. 레이첼도 소피에게서 눈을 떼고 접수원이 들어갔던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내 접수원이 주먹만 한 주머니를 들고 접수대에 얹었다.
“여기 있습니다.”
-짤랑
주머니를 챙겨든 레이첼은 손을 넣어 금화를 일일이 세고는 이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지부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살펴가세요.”
“네.”
-딸랑~
“뭐야, 얼마에요?”
옆에서 레이첼이 손으로 셀 때 탐욕스런 눈빛으로 훔쳐본 소피가 거칠게 숨을 쉬며 레이첼에게 달라붙었다. 레이첼은 쓰게 웃으며 주머니를 손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금화 30장 정도?”
“와아- 와- 대박.”
“그 정도나 준다고요?”
레이첼이 처음 도시에 들고 온 금화가 5장이 채 안됐는데 6배의 득이라니, 생각도 못한 레이첼의 수완에 경악하자 쑥스러웠는지 시선을 피하며 레이첼이 말했다.
“좋은 분을 만나서 식재료나 땅도 싸게 구했고, 이만큼 받은 건 제가 여관 운영할 때 저랑 연결됐던 인맥들을 넘기는 값으로 칠거에요.”
쑥스러워하면서도 고개 숙인 체 힐끔 쳐다보는 레이첼이 귀여워 그녀의 턱을 살짝 긁어줬다.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처럼 손길을 즐기던 레이첼은 이내 소피의 시선을 깨닫고 손을 치웠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그렇고 그런 관계인거 아니까 대놓고 해도 되거든요?”
“어머...”
짓궂은 미소를 띄운 소피의 눈빛을 피한 레이첼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수줍어하는 레이첼을 끌어당겨 껴안은 뒤 소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일단 이동하죠. 주문서를 쓸거니 까 손을 잡아주세요.”
“네,네.”
당황한 소피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잡일을 많이 하는지 조금 거친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은 나는 남은 손으로 품에서 주문서를 꺼내 엄지로 뚫고 지익- 그었다. 곧 우리 셋의 몸이 일렁이며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후욱
“으으, 어지러워...”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주문서를 처음 사용해본 둘은 어지러워하며 힘들어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한 나는 괜찮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레이첼을 잡아준 나는 잠시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 뒤 둘을 츠루카의 집으로 데리고 이동했다.
-터벅 터벅
힐끔 쳐다보는 수인들과 눈이 마주친 소피는 슬쩍 고개를 숙이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우와 진짜 수인이에요...!”
“그럼, 카사노씨가 이 마을의 족장이라니까?”
“그런데 두 분 서로 좋아하는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딱딱하게 씨라고 부르는거에요?”
“어머 소피도 참...”
잡담을 나누며 따라오는 둘과 함께 츠루카의 집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현관과 다르게 웅성 이는 분위기와 느껴지는 기척으로 봐선 츠루카의 집무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 했다.
-끼익 끼익
흐느끼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온 나는 쭈뼛이는 레이첼과 소피를 대기시켜두고 츠루카의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시지요.]
문을 두들기자마자 방 안에서 무언가 차가운 츠루카의 목소리와 함께 허가가 떨어졌다. 나는 둘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인기척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그제야 츠루카의 목소리가 차가운 이유를 깨달았다.
“와, 왔나요. 당신?”
이유 없는 적의에 당황한 시에라가 톡톡- 책상을 두들기다 내 얼굴을 보고 화색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싸늘한 표정으로 시에라를 노려보던 츠루카는 내게 인사하는 시에라를 보고 한층 더 얼굴을 굳히며 정색했다.
“오셨군요. 서방님.”
항상 살랑이던 금색 꼬리가 잔뜩 부풀어 솟구쳤고 독이 바짝 올랐는지 빳빳하게 굳은 꼬리를 보니 츠루카의 짜증이 얼핏 느껴질 정도였다.
기죽은 강아지처럼 시선을 피하는 에루카와 내가 미리 언질을 줬음에도 츠루카에게 설명하지 않았는지 내 시선을 피하는 하루나까지. 나는 종합 선물 세트에 어지러워져 그만 츠루카의 눈빛을 피했다.
“호색한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여자들을...”
어떻게 좀 해봐요- 애절한 눈빛으로 하루나를 바라봤지만 [미- 안-] 입모양으로 사과한 하루나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여자를 경계하는 츠루카의 적개심에 뭐라 설명해야하나- 고민하는 순간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사노씨 안 들어가고 뭐해요? 어머, 반가워요. 다들 처음 뵙네요?”
문가에 서서 얼쩡거리는 나를 밀고 들어온 레이첼은 싸늘한 분위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분위기 잡던 츠루카도 해맑은 레이첼을 보고는 입을 뻐끔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누, 누구시죠?”
“저는 카사노씨한테 부탁받고 마을에서 살게 된 레이첼이라고 해요. 어머, 아가씨는 인간이네요 반가워요. 언니라고 불러요.”
“아, 네, 반가워요 언니...?”
“귀여운 수인 아가씨들이 잔뜩 있네요, 어라? 이분은 장녀인가...? 잘 부탁해요. 수인은 처음 만나봐서 만약 실수해도 용서해주세요?”
“아, 자,잘부탁한다.”
재잘재잘- 웃는 낯으로 시에라와 인사를 나눈 레이첼은 곧장 팔짱 낀 체 관망하던 하루나에게 다가갔다.
적극적으로 악수를 건넨 레이첼과 손을 맞잡은 하루나는 당황한 눈으로 레이첼의 뒤에 서있는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가씨 이름이 츠루카인가요? 카사노씨한테 얘기 잘 들었어요. 진짜 예쁘다~ 머리랑 꼬리 윤기 좀 봐. 아까는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데요?”
“그, 그게 안좋은게 아니고...”
“이럴게 아니라 다 같이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해요. 제가 좋은 차 하나 들고 왔답니다.”
괜한 말을 지어낸 게 아닌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찻잎을 꺼낸 레이첼은 쭈뼛거리는 츠루카를 자리에 앉히고 눈치 보던 에루카와 밝게 인사하며 모두와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만 기다려요? 카사노씨는 제 짐 좀 방에다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끼리 얘기 좀 하려고요.”
“아, 네 그래야죠. 알겠습니다.”
“얘 소피. 좀 도와주렴.”
“네, 네 언니!”
낯가림도 없나- 새하얗게 얼굴을 물들인 소피가 토도도 레이첼을 따라갔다. 츠루카의 적대에 괜히 꿀꿀해보이던 시에라도 레이첼의 등장 후 표정을 풀고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인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해결할까 했지만 팔 걷고 나서준 레이첼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 같아 그녀가 부탁한데로 갖고 온 짐을 챙긴 나는 그대로 집무실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계단을 향하는데 집무실에서 얼핏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