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3.강한자가 마음대로 하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호위전사 에루카 [다수의 시점]
달그락- 달그락-
원형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오늘도 별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탁- 포크를 얹으며 입안의 음식을 넘긴 에루카는 맞은편, 작은 입으로 우물우물 음식을 먹고있는 츠루카에게 보고를 올렸다. 딱딱한 말투에 츠루카는 미소를 지으며 마찬가지로 수저를 내렸다.
“에루카, 밥먹는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니, 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렴.”
“언니께 보고올리는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툭 툭
그것만큼 중요한건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에루카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툭 닿였다. 발의 주인을 바라본 에루카는 능글맞게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카사노와 눈이 마주쳤다.
‘나 는 ?’
언니의 곁에서 손가락질로 자신을 가리키는 뻔뻔한 남자, 에루카는 자기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와 헛웃음에 표정을 굳히며 이를 드러내고 노려봤다.
어깨를 으쓱인 카사노는 기대도 안했다는 듯 고개를 돌린뒤 츠루카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어디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카사노의 질문에 츠루카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사옵니다. 잠시 마을의 중대사를 살펴볼 일이 있어서.”
“언니는 항상 마을의 대소사를 맡으시기에 바쁘시다, 너같이 한가한 남자와는 다르다.”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나온 에루카는 아차한 표정으로 카사노를 살폈지만 그의 안색은 평온했다. 나는 왜 또 그런 말을... 시무룩해진 에루카는 슬쩍슬쩍 카사노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이어갔다.
솔직하지 못하긴- 에루카가 한두번 저런걸 몇 번이고 경험한 카사노는 딱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솔직하지 못한점이 오히려 귀엽지않은가?
“그런데, 중대사가 혹시 무슨...? 들은게 없어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지자 언니와 카사노의 눈치를 살핀 에루카가 다시 대화의 운을 뗐다. 오물오물 스프를 먹던 츠루카가 입을 열었다.
“마을에서 떠난 수컷들의 대처를 논하려고 한단다.”
“아앗...!”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해버리다니. 에루카는 카사노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마을의 수컷들이 모조리 떠난지 몇십년, 마을을 지킬수 있는 인원의 공백과 후사문제에 고민하며 외부인과 단절된지 오래인 이 마을에 수컷들의 이야기는 항상 빠질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
“언니, 그건...”
“카사노님도 이미 알고계신단다.”
“네에...?!”
싸울 수 있는 인원도 없고, 여자만 남아있는 수인족이란 희귀한 종족. 이 이야기가 퍼지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라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건데, 몇십년만의 외부인인 그에게 숨김없이 말해버리다니- 언니의 선택이지만 에루카는 당황스러웠다.
“그건, 그 저희 마을의 중요한 문제이고, 당장 수컷들의 보복이나 외부의 침입 등을 고려하면...”
드문드문 장황하게 말했지만 에루카가 말하는건 결국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외부인에게 얘기하냐- 였다. 카사노의 대한 마음이 커지고, 그의 대한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그는 결국 외부인이었다. 스스로 떠나기를 자처하는.
-욱씬
‘나는 왜... 그런말을...’
차라리 떠나지않겠다고 억지부리지, 항상 지껄이는 말처럼 남아서 보지나 쑤셔줄게- 하고 지독하게 굴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간의 도시로 떠나겠다니. 은은한 미소를 띄운체 바라보는 카사노의 얼굴을 본 에루카는 속에서 다시 열불이 뻗쳤다.
“카사노님은 마을의 은인이고 흥미롭고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눈덕에 슬슬 새로운 방침을 내릴까해.”
“새로운 방침이요...?”
“응.”
고개를 끄덕인 츠루카는 순진한 동생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전했다.
“카사노님을 주축으로 다시 인간들과 교역을 할까해. 수컷들에 대한 대비도 해야하고...”
츠루카는 눈을 감고 떠올렸다, 견습 제사장인 몇십년전, 그녀에게 내려온 예언으로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해와 달을 떨어트리기위해 유혹하는 이방인, 달을 부르며 자신의 손에 움켜쥐니, 지켜보던 해는 스스로 내려와 그를 하늘로 올려보내리라-
당장 외부인과 단절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와, 서로 쌓아온 신뢰와 기간이 있는데 단순히 예언만 믿고 그러긴 힘들다는 온건파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예언은 예전부터 많이 쓰이던 문장이고 그 뜻은 그렇게 가볍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마을은 서로 분열하면서도 끝까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않았다.
결국 크게 분노한 강경파인 제사장은 마을의 수컷들을 하나로 모아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온건파의 수장이었던 츠루카는 스승에게 애걸했다.
[어머니, 아니 스승님...! 다시 한번 생각을...]
[안됩니다. 어찌 외부인 따위가 하늘에 오른다는 그런 예언을 지켜봅니까? 마을을 떠나야합니다.]
마을에 모든 수컷과 일부의 여성들은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했다. 저대로 떠나 다른 마을을 재건한다면 충분히 살아갈수있겠지만 온건파의 마을은 미래가 어두었다.
[예언은 이루어지지않을겁니다...! 이미 분열한 마을에서 누가 하늘에 오릅니까. 마음을 돌리시지요...!]
[이제부터 츠루카 당신이 차기 제사장입니다. 예언이란건 그렇게 가벼운게 아닙니다, 결국은 이뤄지게 되있지요. 당신도 알게 될겁니다.]
츠루카의 스승은 그렇게 말하고 마을을 떠났다. 츠루카는 일단 마을에 남기로한 임산부들과 아이들을 돌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딴 예언따위-
츠루카는 다시 눈을 뜨며 치기어린 시절의 반항에 얼굴을 붉혔다. 어려서 그렇지= 그때는 수컷없는 삶에 독수공방하며 이렇게 애달플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카사노가 와준덕에 힘들었던 모든 시절이 보상받은듯해 행복했다.
“그런...!”
테이블에 손을 얹은체 소리치는 에루카, 츠루카는 에루카가 이렇게 나올걸 알고있었다, 스승이었던 어머니를 그렇게 잘따랐는데- 생각도 비슷한 아이였지만 에루카가 마을에 남은건 오로지 자신때문이었다.
에루카- 언니가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츠루카는 고개를 내젓고 에루카를 바라봤다.
“앉아,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니.”
“으읏...”
카사노를 힐끔 바라본 에루카는 다시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다. 카사노는 이 무거운 분위기가 그냥 즐거웠다. 불구경하는 기분에 식사를 이어나가며 기싸움하듯 서로를 바라보는 자매를 구경했다.
“스승님이 왜 외부인과의 단절을 주장했겠습니까...”
“예언은 아직 이루어질 기미도 보이지않고, 이대로면 마을도 위험해.”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아...”
수인족의 성장은 느렸다. 몇십년전 임신했던 아이들은 자라났지만 장성한 수컷은 스승님의 일방적인 통보로 뺏어가듯 데려갔고 아직 덜자란 아이들은 다시 성장해도 스승님이 데려가거나 남는다하더라도 홀로 이 마을의 여성을 상대하긴 역부족이라고 츠루카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우리끼리 마수들의 습격에 쩔쩔맸는데,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어떡할건데?”
“그읏...”
츠루카의 말은 정론이였다. 에루카가 발로 뛴다해도 마을의 모든 목책을 챙기긴 무리였다. 결국 카사노가 와서 도와준 덕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또 이런일이 없을거란 보장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외부인과의 교역 및 소통을 다시 해 마을의 인구를 늘리거나 도움을 받아야해.”
생산능력도 떨어지고 인구수도 떨어지는 온건파의 마을과 모든게 충분한 강경파의 마을. 아직까진 그저 분열이지만, 서로 침공까지 상황이 가버린다면? 흡수되는건 자신이 맡은 마을일게 뻔하다고 츠루카는 생각했다.
그렇게되면 입지가 꺾인 주민들은 강경파의 마을에 유사노예처럼 지낼지도 모를일이었다. 물론 서로 침공할 생각도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항상 생각해야했다.
“그렇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외부인은 결국 외부인. 다시 떠나게 될겁니다.”
“저 인간처럼...”
언니의 말에 에루카는 대꾸할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는 듯 통보했다. 무덤덤하게 뱉었지만 말을 계속 뱉을수록, 그 감정을 곱씹을수록 에루카는 차오르는 눈물에 애써 고개를 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잘먹었습니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에루카.”
“네 언니.”
“정말,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는거니?”
“...네.”
“네 뜻이 그렇다면,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는데도?”
“괜찮습니다, 언니를 모시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 조심히 들어가렴.”
-끼익
츠루카는 직감했다,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동생은 갈피를 못잡는 마음과 방황하는 영혼에 그저 흔들릴뿐이다. 카사노에 대한 감정은 호감 따위가 아니란걸 에루카가 깨닫기를 빌며 츠루카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카사노는 흥미진진한 상황에 숨을 겨우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리가 축 처진 츠루카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준 카사노는 집밖에 나설 준비를 했다.
“그래도 서로 엄청 생각하는 자매네.”
“카사노님...”
“이것도 다 계획이라면서 기죽기는, 기운내고 에루카한테 다녀오면 되는거지?”
“네...”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믿으니까 너가 하자는데로 할게, 나한텐 마을보다 너희 자매가 더 중요하니까.”
“후후... 노예로서인가요 애인으로서인가요...?”
“둘다지.”
씩 웃은 카사노는 집밖으로 나섰다. 앞에는 터덜터덜 꼬리를 축 늘어뜨린 에루카가 걸어가고 있었다.
“에루카.”
-와락
축 처진 에루카를 끌어안은 카사노는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순간 옥죄이는 감각에 에루카는 뿌리치려고 팔에 힘을 주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힘을 풀고 바라봤다.
“...왜왔지?”
카사노, 반겨주면 될걸 나는 왜 또 이런말을, 후회를 곱씹는 에루카에게 카사노는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기운내라고 말해주려고 왔지. 밥도 다먹었고.”
“......”
이 남자는 나한테 바라는게 뭘까? 언니에게 손대려던 저열한 인간, 노예가 되라며 자신을 범하고 마구 유린한 인간, 짓궂게 장난치며 친근하게 구는 인간. 산들바람 부는 숲 아래를 거닐며 장난스런 미소로 언제나 바라봐 주는... 카사노에 대한 마음은 뒤죽박죽 뒤섞인 물감처럼 종잡을수 없었다.
언니를 위해서라며 눈을 감고 버티던 자신은 어느새 카사노의 손길을 기대하는 여자가 됐다. 그의 손길과 미소,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범해지면, 배가 쿡쿡 쑤시며 육체는 달아 올랐고 그와 업무를 보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면 그에 대한 마음은 커져갔다.
“나한테 원하는게 대체 뭐지...?”
지금도 웃으며 자신의 귀에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에게 결국 참지 못하고 되물으니 그는 씨익 웃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오늘 밤에 내방으로 올라와.”
“큿...! 결국 또 그런 생각으로...!”
축 처진 꼬리에 힘이 돌아오고 쿡쿡 배가 쑤셔왔다. 달뜬 숨을 내뱉으며 그를 타박해도 이미 온몸은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체취와 억센 팔, 흉측한 성기에 몇 번이고 범해진 그 기억은 몸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지말고, 볼 날도 얼마 안남았는데, 너도 나 떠나니까 좋잖아?”
“물론이다, 지긋지긋한 얼굴... 더 이상....”
더 이상 볼수 없겠지, 언니가 말한 제안을 계속 거부하면 결국 언니는 내 손을 들어줄 것이다. 물론 카사노라면 마을에 방문해도 반겨주겠지만 그는 인간세상의 용병이라는 이리저리 떠도는게 직업인 인간이라고 했다.
볼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려오는 가슴에 에루카는 한풀 마음이 꺾였다. 생각을 알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와의 시간만큼은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몇시에 가면되지?”
“12시쯤에... 아 그리고 부탁할게 있는데...”
-속닥속닥
“뭐어엇...!”
끔찍한 음어에 치가 떨렸다. 그렇지만 저렇게 애원하는 얼굴로 바라보며 부탁하니 거절하기도 그렇고, 어차피 그 시간이면 집에 언니도 안계실테니 한번 정도는 해줄법하다고 생각한 에루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는 이만 가봐야하니까 얼른 돌아가라! 언니한테 뒷정리를 맡기고 오다니.”
“그러는 너도 그냥 나왔잖아.”
“이익...!”
장난스레 웃으며 탓 탓 뛰어가는 카사노를 바라보며 에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가 떠나는 순간 정리될 마음이었다. 그게 사랑이든 애욕이든 정리될 감정이기에 더 이상 신경쓰지않기로 했다. 언니와의 일로도 너무 머리가 아프니까...
“후우... 후후...”
그렇지만 카사노와 나눈 밤의 약속은 달뜬 몸에 흥분을 안겨줬다. 이건 상관없으니까. 떠나는건 떠나는거, 감정도 감정. 성욕은 성욕대로 해결해야하는 법 그래, 그런거야. 에루카는 어설픈 변명을 되뇌이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