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한마을의 외로운 부인
-꿀꺽, 꿀꺽... 뚝
“후...”
가득 채워둔 수통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괜히 갈증만 심해지네."
앙상한 수통을 배낭에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니 직전에 만난 행상인이 말한 마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괜히 한숨만 나왔다.
노숙은 정말 질색이었다. 떠돌이 용병으로 지낸 지도 5년이 넘었지만, 야영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노숙만큼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맨바닥은 맨바닥, 귀족네들이나 쓴다는 마법 용품쯤이면 노숙도 글램핑 정도는 된다 하니 역시 아무것도 없는 무지렁이들만이 힘들게 사는 건가 싶다.
좆같은 세상을 탓하며 전에 만난 행상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한없이 걷다보니 자그맣게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좆같은 경비들을 손쉽게 넘겼을 텐데 아쉽게 됐다.
마을 관문까지 다가가니 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느슨하게 움켜쥔 창을 슬쩍 내 쪽으로 내밀며 정지시켰다.
“무슨 볼일이오?”
이미 해가 저물고 있는 저녁이라 대충 검문하고 집어넣기로 지들끼리 합의한 모양새였다. 마냥 작은 마을은 아닌지라 억지 부리기도 그렇고 괜한 말다툼도 너무 귀찮을 거 같아 경비병 새끼들의 작당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여행 중이오, 며칠 머물고 다시 떠날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촌뜨기 경비병들은 존대해주면 어깨가 꽤 솟구쳐 목에 힘이 들어간다, 손을 슬쩍 내미는 경비병의 손위에 용병증과 50쿠퍼를 얹고 나머지 한 놈 손에도 똑같이 쥐여줬다, 더 크게 해먹을 생각은 없었는지 경비병은 용병증을 슬쩍 훑어보곤 내게 다시 건네주며 실실 쪼갰다.
“은 등급 용병 나리 덕에 오늘은 술 한잔 걸치겠군요, 감사합니다.”
“마을 중앙에 분수대 근처를 보면 여관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헬만 소개로 왔다 하면 깨끗한 침대로 마련 해줄 겁니다.”
선심 쓰는 척 조언해주는 꼴이 좆같았지만 쉬고 싶었다, 대충 흘려듣고 궁금한 걸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도 있는데 여관 말고 더 싸게 지낼 방법은 없소??”
싸다는 조건에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더니 이내 음흉하게 웃으며 슬쩍 얘기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 제법 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수대에서 쭉 직진하면 집들이 모여있는데 그쪽으로 한번 가보십쇼. 흐흐”
“저희 마을 여인네들 풍차 맛 한번 맛보면 계속 생각날 겁니다. 하하!”
꽤 쓸데없는 사족이 붙었지만 쓸만한 얘기였기에 가볍게 묵례하고 그들을 지나쳐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목책 크기나 경비병 숫자보다 마을은 제법 넓고 멀쩡해 보였다. 저녁에 쓸 물을 퍼가는 여인네들이나 술집으로 향하는 촌뜨기들을 지나 경비병이 말한 분수대까지 찾아갔다.
‘분수대까지 있고 군데군데 횃불 걸려 있는 거 보니 촌장이 제법 신경 쓰나 보네.’
거지 같은 마을은 관리 안 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이 부근은 도시와 왕성 부근에서 더욱 먼 곳이라 환경이 낙후될 수밖에 없을 테지...
같은 1실버도 도시에서는 여관에서 편히 묵을 수 있지만 좆 거지 같은 마을은 1실버에 마구간을 내주는 개 같은 심보를 보이곤 해 거지들을 여물통에 쑤셔 박아 주곤 했다.
나는 집들이 모여 있는 곳 중 가장 후미진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처음 분수대 주변에 있는 집들만 해도 부서진 곳 없이 정갈하게 지어진 집들로 빼곡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판자가 삐꺽거리며 군데군데 딱 봐도 처참해 보이는 지경까지 온 집들도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나 눈에 띈 집이 있었다. 위치는 가장 후미진 곳에 있지만, 외견은 상당히 깔끔했고 하자 있어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제법 관리했을 수도 있지만 내 감에는 최근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다 지은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을 굳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 앞에 서서 정중히 두 번 두드렸다.
-똑, 똑
집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한 명 정도,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발걸음 소리를 들으니 상당히 거칠게 달리듯 다가오는 모양새다.
-끼익
상체를 조심스레 내미는 한 여인. 외견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풀면 허리춤까지 흐를듯한 빛바랜 금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시골 여자치곤 매끈한 목덜미가 눈에 띄었고 앙다문 입술과 또렷한 코는 도심에서도 보기 드문 전형적인 미녀의 특징이었다. 거기에 잠자리에 들기 전인지 얇은 베이지색의 원피스는 굴곡진 몸매를 야심한 밤에 훤히 드러내 꽤 음심을 들게 했다.
너무 유심히 흩어봤는지 문고리에 쥔 손을 올려 가슴께를 가린 체 어깨를 문에 기대 몸을 고정한 체 나에게 대뜸 말했다. 얼핏 살펴본 손목에는 푸른 멍 자국이 보였다.
“늦은 밤에 무슨 용건이시죠? 남편이라면 주점에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자기 남편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줄 안 모양이다, 그런 여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젓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마을에서 어느 정도 머물 예정인데 아무래도 여관에서 오래 머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남는 방이 있다면 며칠 묵을 수 있을까요? 대가는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얼핏 보여줬다. 생각보다 묵직한 모양새였는지 그녀의 눈빛에 작은 욕망이 일렁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무래도 남편 없이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없네요, 그리고 방도 좁고 외진 곳이라 여행객이 머물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집 같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웬만하면 금방 마음을 접고 떠났겠지만, 너무 오래 홀로 여행을 해서 그런지 제법 쌓였던 모양이다, 부인의 풍만한 가슴골은 두 팔로 눌러가리니 오히려 짓눌린 모양새와 삐져나와 틈새로 보이는 속살이 더욱 음란했다, 그 모습에 쉽사리 발이 안 떨어졌고, 그 위용 있는 모습에 계속 시선이 갔다.
“저…. 저기...”
너무 적나라하게 봤나보다, 부인은 가슴께를 가린 팔을 더욱 움츠리고 얼굴을 붉힌 체 나에게 다시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에 일말의 가능성을 봤다, 건장한 남성이 자신의 모습에 욕정 하는 시선에 수줍어하며 반응하는 모양새가 이 부인도 제법 굶주렸다는 증거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땅을 긁는 소리와 함께 고성이 튀어나왔다.
“이보쇼!!! 뭐 하는 작잔데 남의 집 앞에 있수?”
고개를 돌려보니 한 손을 뻗어 손가락질하며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발을 끌 듯이 걸어오는 남성이 있었다, 이미 한잔 걸친 듯 얼굴을 불콰하게 물들어있었고 둔한듯한 몸집을 어떻게든 이끌고 나에게 성큼성큼 절뚝이며 다가왔다.
절름발이는 자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내가 불만이었는지 뻗은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찌르며 나에게 침을 튀겨가면서 화를 냈다.
“왜 남의 집에!! 남의 부인을 불러서 뭘 하고 있었냐고!! 내가 묻잖아!!”
딱 봐도 돈을 탕진하고 하루하루 술에 빌어먹고 사는 별 볼 일 없는 주정뱅이 절름발이였다, 하지만 음심이 동한 나는 이 상황에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찔러오는 그의 손가락을 붙잡고 강제로 손을 펴 손바닥을 나에게 향하게 했다.
“어... 어!!”
그리고 품에 쥐고 있던 주머니를 그의 손에 올렸다. 남성은 당황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의 감촉에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뒤이어 내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여행객인데 이 집에서 머물 수 없냐고 부인에게 묻던 중이었습니다. 며칠 정도 머물 생각인데 이 정도 금액이면 괜찮겠습니까?”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신난 남성은 들은 체 만 체 부인의 의사 따윈 전혀 상관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물론이오, 편히 머물다 가슈. 대신 식삿값은 따로 주쇼. 흐흐...”
“잠깐만요! 여보, 저희 방이라곤 침실밖에 없잖아요!”
남편의 독선적인 행동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꽤 화난 얼굴의 부인은 남편에게 윽박질렀다.
본인도 꽤 찔끔했는지 그건…. 하고 되새김질하다 결국 다시 한번 고성을 내뱉었다.
“그럼 방 내주고 알아서 지내면 될 것이지 여편네가 어디서 소릴 지르고 있어! 확!”
손찌검이라도 하려던 모양이지만 술을 꽤 들이켰는지 힘이 풀려 한번 헛손질을 했다, 그게 더욱 화를 부추겼는지 다시 한번 자기 부인을 노려보곤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이런 기회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나는 한 걸음 다가가 손목을 움켜쥐고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줬다.
“끄윽...!”
“야밤에 소란을 일으켜 지장을 일으키고 싶진 않습니다. 부인과는 제가 얘기를 나눠볼 테니 어디 좋은 시간이라도 보내고 오시죠.”
제대로 된 상황 판단조차 못 하는 그는 손목을 풀어주자 금세 미소를 띠며 좋은 시간이라는 얘기에만 헤벌쭉했다.
말하는 모양새나 부인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몸을 안 섞은 지도 꽤 된 거 같았고, 또 둘의 감정의 골이 제법 깊은 거 같았다.
나에겐 좋은 얘기였다.
뻐근한 손목을 휙휙 흔들어 풀던 그는 이내 통보하듯 아내에게 소리치고 다시 주점을 향해 절뚝이며 걸어갔다.
“아무튼 당신 알아서 하고 난 이 돈 불려서 올 테니까, 그때까지 손님 대접 잘하고 있어!”
“여보! 여보...!”
아마 남편도 부인도 어떻게든 외면할 뿐이지 속으로는 저 금액의 일부가 화대라는 걸 모르진 않을 거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한창때의 건장한 남성과 여인을 야밤에 둘이서 한 방에 들이는 건 누가 봐도 명확한 증거다.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부인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많은 감정의 떨림일 테지, 처음 보는 사람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루를 보내게 된 두려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남편에 대한 분노, 며칠 머무는 비용이라며 여관보다 더 많은 돈을 넣은 주머니를 건네주며 자신을 욕정 하는 눈으로 보는 남성에 대한 공포. 감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인 셈이다.
팔을 뻗어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자 떨림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렇게 공포에만 물든 모습은 좋아하지 않는다. 한창때의 무르익은 유부녀의 육체에 불을 붙이려면 공포가 아닌 육욕에 달아오르게 해야 한다.
“부인 걱정 마시죠, 부인께서 침실에서 주무시고 저는 앉을 곳만 있다면 그곳에 앉아서 하루 보내겠습니다. 남편분 때문에 꽤 속이 상할 텐데, 일단 들어가서 쉬시죠.”
정말 걱정된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측은하게 바라보니 떨림이 멎었다, 가벼운 한숨 소리와 함께 부인은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에요,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재워드려야 하는데 남편이 아휴... 예전엔 저러지 않았는데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네요.”
“두 분이 제법 오래 같이 사셨나 보군요, 부인의 나이는 얼핏 봐선 22살 정도 돼 보이는데...”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부인은 이내 미소지으며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이제 30살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얘기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아닙니다, 정말 딱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문을 여셨을 땐 노부부의 따님이 나온 줄 알고 꽤 긴장했습니다.”
“어머! 농담도...”
반복되는 칭찬에 어느새 끓어오른 감정도 가라앉았는지, 살며시 어깨를 치거나 옆구리를 찌르는 둥 작은 스킨십을 하며 집안에 들어섰다. 부인의 경계를 낮추긴 했지만, 아까 문가에서 너무 티 나게 본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맛보는 미식이었기에 마음은 들떴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이 집에서 익을대로 익은 부인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너무나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