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5 천칭 (2)
새하얀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탁, 발걸음에 은은히 흔들리며 일렁이는 바닥이, 이곳이 현세가 아니라 세계의 뒷면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분명 테일러 저택의 지하실인데도, 광활히 넓은 밤하늘이,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아득한 우주가 펼쳐진 채, 알알이 수놓인 별들이 허공에 반짝인다.
그 너머로, 어둠이 작게 일렁였다. 마치 밤하늘을 커튼에 담아낸 것처럼.
저것들이 바로 ‘밤의 장막’과, ‘별자리의 뒤편’이다. ‘세계의 이면’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숨을 수 있게 해주는 보물들.
그리고.
“저게 천칭이구나.”
감탄한 듯한 그 목소리가 누님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데이지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 모두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별들.
찬란하고 아득한 별빛들이 뭉쳐서, 빛을 흩뿌리는 하나의 거대한 천칭이 된 채 이 우주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지어진, 별빛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빛의 신전.
거대한 천칭과 신전을 보며 그 찬란함에 감탄한 우리를 지켜보던 누나가, 우리가 지나온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손님이 왔네.”
그 말대로, 문 너머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리스였다.
“…꽤 많이 강해진 것 같네.”
명백히 몇 수는 더 위의 경지에 있는 누님조차 경계할 정도로, 아이리스의 성장세는 무척이나 가파른 편이었다.
또각, 또각──.
“제가 제일 마지막인가요?”
일부러 걸음걸이를 숨기지 않고, 구두굽 소리를 내며, ‘문’을 넘어 들어온 아이리스.
이 자리에 초대 받은 모든 손님이 모인 순간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유일하게, 누님과 나를 따라왔을 뿐인 데이지가 고개를 꾸벅인 채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나와 누님이 아쉬워 하는 것에 반해, 오히려 당사자인 데이지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쉽지 않아?”
내가 그렇게 물었더니, 데이지는 빙그레 웃곤.
“그럼 살짝 고개를 숙여주실래요?”
그 정돈 어렵지 않지.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데이지가 발 끝을 세우더니, 내 목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순간 뽀뽀라도 해주려나, 생각하다가 포옹을 하게 되자 조금 의외이긴 했으나, 이 편도 역시 좋았기에 마주 안아주었다.
잠시 그렇게 나를 끌어안은 데이지가 내게 속삭였다.
“다녀오셔서, 잔뜩 저를 예뻐해주면 돼요.”
이미 주인님께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베시시 웃곤, 데이지는 자리를 비웠다.
“…좋냐? 어? 좋아?”
내가 잠시 데이지가 비운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샌가 다가온 누나가 내 등을 쿡 찔렀다.
슬쩍 둘러보자 아이리스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다.
웃곤 있는데 눈은 싸늘했다.
순간 조금 섬찟해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누님은 어떨까 싶었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누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오히려 다가와선, “데이지랑 셋이서 할까?”하고 속삭이는 바람에….
“오빠?”
귀가 좋은 아이리스가 들어서 난감했다.
“일단, 어떡하지 이제?”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이리스는 내 속셈을 눈치 채고서도, 한 번 봐준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누님이야 애초에 내 편이었고.
“…하여간.”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누나 역시, 한숨을 푹 쉬곤 나를 흘겨봤다.
짝, 박수를 친 누나에게 모두의 시선이 끌렸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누나가 입을 열었다.
“우선….”
잠깐 뜸을 들인 누나의 눈이 누님과 아이리스를 훑었다.
“먼저 할 사람?”
“….”
“….”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누님과 아이리스가 슬쩍 서로를 본다. 선뜻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먼저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나중에 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고민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니…?”
레티 누님이 중얼거렸다.
누나도 아이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의한다는 듯.
괜히 가까이 있다간 꼬집히거나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여자들한테서 살짝 떨어졌다.
“하여튼 저거 진짜 밉상이야.”
중얼거린 누나.
나는 괜히 그런 누나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럼 누나부터 할까?”
“뭣….”
아.
당황하는 거 봐. 쿨피폐 미녀의 홍조 띤 얼굴에는 아이리스도 누님도 관심이 있는지, 잠자코 이쪽을 지켜본다.
“나는 굳이 처음 아니어도 될 것 같아.”
“저두요.”
“차라리 어떻게 하는지 볼래.”
어차피 지금 하는 게 첫 경험도 아니고, 지금 순서에서 첫 번째를 차지한다고 뭐가 더 있는 것도 아니니 두 사람도 순순히 차례를 내주었다.
다만.
“보긴 뭘 봐요!”
누나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빽 소리쳤다.
“변태들이에요? 그걸 왜 봐요!”
그리곤 날 휙 돌아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어떻게 네가 좀 잘 말해봐!”
내가 말한다고 들을 진 모르겠는데.
“누나랑 하는 걸 보는 대신, 레티 누님이나 아이리스 너도 다른 두 사람한테 보여줄 수 있어?”
“…글쎄?”
“으음.”
이것들 봐라.
“거 봐요! 두 분도 싫으면서!”
결국 누나의 발버둥이 받아들여져,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가림막을 쳐두기로 했다.
「고옹…?」
제단을 유지하느라 여력이 없어, 십 미터가 넘던 크기에서 일 미터 가까이로 줄어든 도룡뇽 형태의 정령, 옵시디안이 얼빠진 울음소리를 흘렸다.
“잘 해. 알았지.”
쓰담쓰담. 누나가 도룡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오옹….」
마치 “이건 혹사야, 이 나쁜 계약자야.” 하고 항의하는 듯 한 목소리로, 머리를 쓰다듬는 누나의 손을 툭툭 쳐내지만….
“잘 하라고.”
「구우웅….」
누나에게 통할 리 없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룡뇽.
그리곤 긴장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곤, 작게 속닥거렸다.
“…진짜 나부터 해? 왜? 내가 의식 진행해야 하는데, 나 기절하면 못 하잖아.”
“기절 할 것부터 걱정이 되는구나.”
“….”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아무리 누나가 작게 말했다지만, 누님이나 아이리스가 듣고자 하면 못 들을 크기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기절한대요.”
“기절한다나봐요.”
“와아.”
“그쪽은 좀 조용히 해주실래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누나를 위해, 한 마디 해주기로 했다.
“여기서 기절 안 해본 여자 없을텐데.”
….
세 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곤, 멋쩍게 웃는다.
그 다음엔.
“하여튼 좆만 좆같이 큰 새끼.”
“잘 났어 정말.”
“…난 몰라요.”
나를 공공의 적으로 두고 조리돌림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는 건 아이리스 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누나의 허리를 바짝 잡아끌었다.
“아읏.”
품에 안기자마자 급격하게 말을 잃은 누나.
귀까지 순식간에 빨개지는 걸 보곤, 이쪽을 지켜보던 옵시디안에게 말했다.
“결계 쳐.”
「고오옹.」
“누, 누구 맘대로…. …….”
따지려 들던 누나의 옆구리에 손을 올리니, 또 급격하게 말을 잃는다. 그리곤 작게 끄덕….
누나의 허락까지 받은 옵시디안이 손을 들었다.
사륵, 사륵. 천을 짜내듯, 천천히 마력의 실이 엮이며 결계가 펼쳐진다. 겨우 이쪽과 저쪽 사이의 시야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결계.
“…제단으로 가.”
내가 감탄하고 있자, 누나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천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 그곳에 지어진 빛의 신전.
‘태양의 눈’과 ‘달의 눈’을 사용해 만들어낸, 의식을 위해 만들어낸 간이 신전이었다.
그 안에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높게 쌓아올린 순백의 계단과, 그 위에 놓여진 동그란 원 형태의 제단까지.
저곳이 바로, 의식을 치룰 장소다.
누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야, 야! 뭐해! 하지마!”
버둥버둥. 다리를 흔들지만, 아랑곳 않고 걸으니 이내 또 잠잠해진다.
하여튼 꼭 한 번 튕기고 본다니까.
그렇게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 제단에 도착해 누나를 내려줬다.
“하여튼 진짜….”
오늘따라 하여튼, 하여튼 하며 툴툴대는 일이 많은 누나다. 발을 딛은 누나가 나를 슬쩍 흘겨보곤, 내 손을 잡고 제단의 중앙으로 나를 이끌었다.
“….”
잠시간 이어진 침묵.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제단이 먼저 반응했다.
화악! 환하게 빛나는 제단과, 신성한 빛을 흩뿌리는 천칭.
천칭을 올려다 본 누나가, 입을 열었다.
“야.”
슬쩍 바라보니,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묵묵히 말을 잇는다.
“나 좋아하냐.”
“응.”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는데, 누나는 나를 무심히 훔쳐보곤 말했다.
“그럼 됐어.”
툭.
나를 밀치는 손길.
그것으로 내가 밀릴 리 없는데, 나는 가볍게 밀려 바닥에 눕고 말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제단이었는데, 꼭 이불이라도 깔린 것처럼 바닥이 푹신했다.
“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내 위에 올라탄 누나가, 단추를 풀었다.
누나는 정돈 안 돼 있던 머리를 틀어올려 묶고는, 나를 내려다 봤다.
“그러니까, 이건 감정 없이 하는 거 아니야.”
보통 이럴 땐 감정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하던데.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