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천칭 (1)
드라쿨레아의 정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곧바로 누나가 기다리고 있을 테일러 영지로 향했다.
중간에 다른 곳에 들르기엔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다른 게 아니라.
“곧 있음 서열전인 거 알지?”
“아.”
까먹고 있었지만, 일단 나도 아카데미의 생도. 물론 내가 빠지겠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만, 일단 그래도 참석은 해야하지 않을까.
솔직히 이제 와서 아카데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고, 기왕 아카데미에 다니기로 한 동안은 충실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웬만하면 오랜만에 체페슈의 저택에 돌아갔을 예정이었으나 스킵하기로 했다.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 테일러 영지에 도착하고서, 처음 와본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는 누님과 데이지.
두 사람을 데리고 테일러 저택을 향했다.
쿡.
걷던 와중 심심했는지 누님이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이 안에 성물이 들어있다는 거지?”
“들어있다기보단 나한테 스며든거지.”
아무래도 나와 같이 신전에 같이 가지 못한 게 아쉬운 눈치다. 누님은 신기하다는 듯 자꾸 내 몸을 툭툭 건드리며, 은근히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주인님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달의 신전에 가야한다곤 하던데.”
데이지의 물음에 여신이 전한 말을 떠올렸다. 달의 신전에는 당장 갈 수 없고, 때가 되면 알려줄테니 기다려달라고.
어차피 내가 흡수한 성물이 한동안 기억의 파편 따위를 수집해야 한다고 전에 여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기억의 파편은 어떻게 모으는 건데?”
“여신 말로는 내 과거와 연이 깊은 사람이나 사물, 장소 같은 것에 반응한다던데.”
“그래? 그럼 누나가 스칼렛 옆에 꼭 붙어있어야겠네?”
그럼 나야 좋지. 고개를 끄덕이니, 누님이 웃으며 내 팔에 꼬옥 안겼다.
“그럼 저도….”
슬금슬금 다가온 데이지가 반대편 팔을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뭐하냐?”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인지 미리 저택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누나가, 그런 나를 보곤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음.
“안녕?”
“안녕 못 해.”
“이런.”
그래도 누님이나 데이지가 보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 평소 같았으면 주저 없이 내뱉었을 욕설을 삼키는 모습이다.
아이리스 앞이면 모를까, 나도 누님이나 데이지 앞에서 나도 평소처럼 거칠게 말을 하기엔 괜히 신경 쓰여 입을 다물었다.
“…흐응. 흐으응?”
꽈악.
우리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 챘는지, 내 팔을 끌어안고 있던 누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쪽 두 분은?”
“…아. 레티시아예요. 스칼렛의 누나랍니다.”
“데이지입니다. 체페슈의 메이드장을 맡고 있습니다.”
손을 살랑 흔드는 누님과, 꾸벅 고개를 숙인 데이지.
“루나 테일러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누나 역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만나는 듯 하지만, 실제론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상황.
분명 처음 만나는 걸텐데,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한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후후. 스칼렛이랑 무척 사이가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얘기 자주 들었어요. 누나처럼 생각한다고? 저는 진짜 누나지만.”
“아아. 그러시구나. 저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랑 같이 다닐 때 집에서 기다려주는 착한 누나가 있다구.”
후후.
호호.
두 여자가 웃는다.
“내조라는 거죠, 내조. 아무래도 내조를 잘 하는 여자가 좀 더 점수가 높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성격에 안 맞아서, 그렇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건 못 할 것 같던데.”
꿈틀. 서로 한 대씩 치고받은 두 사람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서로를 향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주인님. 저 무서워요.”
데이지는 오들오들 떨며 내 등 뒤로 숨었다.
“…괜찮아.”
그 때, 누님이 끌어안고 있던 내 팔을 보란 듯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스칼렛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렇게 꼭 팔짱을 끼고 싶어하더라구요.”
내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여기서 정말 말했다간 분위기가 아주 싸해질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꿈틀.
누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이건 조금 딜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아니야.
나 그렇게 노려보지마.
“…흐응. 뭐 어때요. 같이 여행하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란 것도 있는 법이죠. 제일 중요한 건 당장의 소소한 만족보단 소중한 추억이라고 생각해요.”
“…어머. 소중한 추억이라.”
누님의 손톱이 내 팔을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아파.
“그게 뭘까…?”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이번에 신전에 갔을 때도 그렇구~.”
“흐으으응…. 우리 스칼렛, 누나 몰래 뭐 했을까…?”
아.
아니.
“둘 다 그만.”
두 사람을 조금 중재해야 할 것 같았다.
“흥.”
“칫.”
내가 말리니 일단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일단 좀 들어가자.”
“그래. 들어오세요, 다들.”
정령들이 움직여 저택의 문을 개방했다.
“…엄청나게 많은 정령들.”
누나를 경계하던 레티 누님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십의 정령에는 감탄했다.
“…수준이 높네.”
단순히 문을 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안에 준비된 의식용 제단까지 이어지는 결계. 그리고 가장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제단 내부를 완벽하게 조율 중인 정령군단.
누님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왜 네가 그토록 아끼는지 조금 알 것 같아.”
그냥 원래 알고 지내던 전생의 누나여서, 라고 말할 순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루나 테일러면 꼭 내 누나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포섭했을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저택의 내부로 들어가자, 육안으로도 확실히 보일 정도로 수십의 정령들이 저택 내부를 바글바글 채운 채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데이지 역시 작게 “와아” 탄성을 뱉었다.
“귀여워라.”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기 때문인지, 꼬물거리는 정령들을 꼭 사랑스럽다는 듯이 본다.
아무래도 데이지는 누나와 꽤 상성이나 궁합이 잘 맞지 않을까.
“제단은 지하에 있어.”
우리를 안내하며 누나가 말했다. 굳이 누나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존재감이 지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최상급 정령 옵시디안과, 상급 정령 코나.
결계와 봉쇄, 거울과 반사 등. 극히 드문 공간 계열의 상위 정령들.
두 정령이 최대한 합심해서 만들어낸, ‘세계의 이면’을 강림시키는 의식장.
바로 그것이, 이 지하에 있으리라.
“공기가 이상해.”
지하로 내려가는 길, 누님이 중얼거렸다. 데이지 역시 작게 고갤 끄덕였다.
이질적인 공기였다.
말 그대로,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변모하는 듯 한.
“이면으로 넘어가는 중이어서 그럴 거야.”
내 말을 들은 누나가 “그 말대로야.”라며 긍정했다.
아무리 같은 계열의 정령이라지만, 옵시디안과 코나는 엄연히 다른 개체의 정령이다. 비슷하긴 하지만, 관장하는 영역 역시 다르다.
그런 두 정령의 힘을 조율해내, 현세에 ‘세계의 이면’을 불러낸 누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대륙 최고의 정령사이리라.
“대단해요.”
데이지가 무의식적으로 말하자, 누님 역시 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런 거 못해.”
“누님은 기사잖아.”
아무래도, 조금 질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누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님은 기사였다. 기사에게 기대하는 것과, 마법사나 정령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내가 가장 믿는 나의 검, 나의 창. 그게 누님이야.”
“…정말?”
조금 시무룩해 보이던 누님이 나의 말에 안색이 밝아졌다.
“정말 내가 제일이야? 황녀나, 검성의 후계자보다도?”
“당연하지.”
아이리스가 들으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른다.
안나야 만나지 못한 지 꽤 돼서 지금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모르지만, 당장 아이리스는 얼마 전까지 함께 하며 얼마나 경지가 올랐는지 내 두 눈으로 봤으니까.
무려 숙련된 마스터의 경지. 대륙 내에서도, 견줄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는 경지다.
당장 생각해봐도, 언제나 일정 수 이상의 마스터가 대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황실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황가라는 위명을 유지할 수 있던 게 아닌가.
한 명 한 명이 전황을 뒤집는 병기에 가까운 자들이 바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하지만.
“누님, 이미 벽 앞에 서 있지?”
내가 용의 산맥과 신전에 갔다 온 사이, 급격하게 경지가 오른 누님이다.
어쩌면 아이리스가 누님을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아예 아이리스가 누님과 맞상대가 조금이나마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하긴. 아이리스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단 적어도 1년에서 2년 가까이 빠르게 경지가 올랐으니, 누님도 그런 일이 없진 않을테지.
두 사람 다 성장의 변수는 나였을테니까.
“흐흥.”
아무튼 기분이 좋아진 누님이 콧소리를 흘렸다.
“주인님. 저는요?”
“가장 믿음직한 메이드장.”
솔직히 내가 말해놓고도 무척 애매한 타이틀인 것 같았는데, 데이지는 또 마음에 들었는지 “가장 마음에 드는 메이드장…. 가장 마음에 드는… 봉사….” 같은 걸 중얼거렸다.
뒷말이 좀 신경쓰이지만, 내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묻기 전에, 앞서 걸어가던 누나가 이쪽을 향해 돌아봤다.
“다 왔어. 어서와, 모두.”
짙게 내려온 다크써클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머금은 누나였다.
지하의 그림자, 문 너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머금은 누나의 모습이 퍽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문고리를 붙잡고, 누나가 선언했다.
“이곳이 바로, 내가 만든 가장 완벽한 제단이야.”
그곳은 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