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드라쿨레아 (4)
“음? ‘별자리의 뒤편’이 필요하다고?”
누님의 기분이 나쁘든 말든, 허허 웃으며 우리를 미리 준비해둔 만찬장으로 안내한 루펭이, 우리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눈을 크게 떴다.
“으흠. 그대들이 괜히 여기 온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네만…. 무슨 일에 쓰려고?”
그래도 꼴에 가주라고, 대뜸 내어주는 대신 이쪽을 떠보며 경계하는 모습. 나는 문득 황궁에서 보았던 기록과, 여신이 해주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노스페라투는 조만간 아예 씨를 말려버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드라쿨레아는?
숙청을 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만약에 한다고 치면, 눈 앞의 녀석만? 아니면 전원?
분명 잘 갈무리 했음에도, 내 눈에서 미약한 살기를 읽어낸 것일까. 드라쿨레아의 가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그래도 우리 스칼렛이 바란다면 빌려주는 것 정돈 가능하지.”
먼저 한 발 물러나는군. 괜히 친한 척 하는 건 좀 거슬리지만.
저 태도가 나를 방심시키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나와의 마찰을 피하려고 그러는 건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래. 고맙다.”
우선은 나도 한 발 물러나기로 하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척 질 필요는 없겠지.
“둘 다 피곤한 듯 하니 오늘은 들어가서 쉬겠나? 방은….”
“하나면 충분해.”
“오. 우애가 돈독하군.”
드륵. 나와 누님이 일어서니, 대기하고 있던 데이지가 루펭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일 보지.”
“그래.”
데이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가.
괜히 놈의 관심이 데이지에게 향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나쁜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안내 받은 방에 들어갔다.
달칵. 문을 닫자마자, 누님이 입을 열었다.
“으. 기분 나쁜 새끼. 하여튼 노스페라투나, 드라쿨레아나, 기분 나빠.”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지.
나 뿐 아니라 체페슈에게도 상당한 애착과 충성을 가진 데이지가, 드라쿨레아나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에는 항상 거부감을 표했다.
지금까지는 그러려니 한데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겠거니 했지만.
이곳의 가주를 만나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고귀한 혈통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 아랫사람의 머리를 터뜨리는 놈 아닌가.
그야 일신의 무력만 따지자면 데이지도 상당하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테지만.
어쨌든 놈이 수틀리면 데이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데이지.”
“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아.”
내 말에 데이지의 얼굴이 멍해졌다.
우물쭈물. 떨리는 눈동자. 그래도, 나는 말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지금껏 굳이 물어보지 않고 묻어두긴 했지만, 이제는 들어야 했다.
“…드라쿨레아는, 그래도 괜찮아요.”
드라쿨레아는 괜찮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노스페라투는 괜찮지 않다는 뜻인가?
내 예상이 맞다는 듯, 데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용기를 낸 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 발음만큼은 선명했다.
“애초에 드라쿨레아는 인간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노스페라투는….”
드라쿨레아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교류도 접점도 없다.
하지만 노스페라투는 다르다. 그들은 흡혈을 통해 동족을 늘린다. 그렇게 늘린 동족을 영원토록 하인으로 부린다.
평범한 흡혈귀는,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부모’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범하지 않고 개중 재능 있는 자들은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이들은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부모’의 명령에도 거스를 수 있게 되니까. 아예 처음부터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지키고 불린다.
그것이 노스페라투의 방식.
설명하던 데이지가 입을 다물었다.
데이지의 손이 꼼지락 거렸다. 불안한 기색이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노스페라투가 동족으로 삼기 위해 흡혈하는 대상.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인간이다.
“…별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위험할 뻔 하긴 했지만…, 늦기 전에 구해졌었거든요.”
데이지가 손을 꼼지락댔다. 하긴, 만일 그때 흡혈이라도 당했다면 지금 여기에 없었을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노스페라투는 좀 거북해요.”
그리 말하곤, 데이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응….”
안심한 듯, 긴장해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빠졌다.
누님이 일어서서 다가오더니, 데이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데이지가 눈을 감았다.
“…괜찮아요. 두 분이 계시니까. …주인님이 있으니까.”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고정시키는 단순한 디자인의 핀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데이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저 때문에 드라쿨레아나 노스페라투랑 등 돌릴 필욘 없어요.”
데이지가 누님을 돌아보았다. 말 없이 데이지를 끌어안고 있던 누님을 마주 안고는.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너무 처연하게 들려와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드라쿨레아는 그렇다 치고.
노스페라투는 언젠가 손을 볼 대상이었다. 여신의 부탁도 있었고.
그러니까, 데이지 때문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다.
“폐 끼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냥, 원래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아무렴.
나는 데이지와 누님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두 여인이 무척 가녀리고, 약해 보였다.
“걱정하지마.”
너희를 위해 내가 뭐든 못 할까.
*
다음 날.
다른 이들은 모두 물린 채, 나는 루펭의 응접실에서 그와 독대하고 있었다.
“별자리의 뒤편을 달라고? 거 급하기는. 좀 더 기다려주면 안 되겠나? 우리 가문의 보물인데, 대뜸 내어주기는 또 그렇….”
“빌려주지 못할 것도 없을텐데. 아니면, 드라쿨레아의 가주가 남의 눈치라도 살피는 거냐?”
“큼….”
놈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역시, 나한테 어느 정도 열등감을 품고 있는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뜸 ‘어린 친구들’ 운운하는 것이며, 누님의 말을 들어보면 가주가 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한참이나 어린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썼다는 것 하며….
미미하게 떨리는 놈의 눈썹을 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이 놈. 겉으로는 호탕한 척 너그러운 척 해도, 나와 누님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하, 하하. 물론 드라쿨레아의 가주인 내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
“그럼 뭐가 문제지? 받고 싶은 거라도 있나.”
“크흠. 내 친구들을 돕는데 받기는 무슨.”
이것 봐라. 자존심을 살짝 건드려주다가, 내가 한 발짝 물러서니 걸려드는 모습을.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놈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고맙다. 역시 드라쿨레아의 가주로군.”
루펭이란 이름이 아니라, 드라쿨레아의 가주라는 이름에 더욱 집착하는 자. 놈은 내 칭찬에 히죽 히죽 웃어댔다.
“나의 어린 친구 스칼렛이 이렇게 나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군! 당장 보물고로 가지!”
성격도 급하고.
나야 좋은 일이다.
놈이 일어서서 나를 지하의 보물고로 데려갔다.
“드라쿨레아의 역사는 체페슈와 비견될만 하지! 체페슈의 보물고에도 지지 않을거다!”
“그렇군. 대단한데.”
주절주절, 자랑을 이어가는 놈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한참을 걸으니, 마침내 지하의 보물고 앞에 다다랐다.
“여기가 바로 드라쿨레아의 보물고라네. 스칼렛, 그대가 찾던 ‘별자리의 뒤편’ 뿐 아니라 그에 쟁쟁한 다른 보물들도 많지.”
어깨를 으쓱한 놈이, 나를 보곤 히죽 웃었다.
“갖고 싶다고 해도 줄 수 없다네. ‘별자리의 뒤편’이야 우리의 우정을 위해 빌려주겠지만, 그 이상은 아무리 그대라도 줄 수 없어.”
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자, 들어가지!”
놈이 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지이잉. 울리는 소리와 함께 놈의 피에 반응한 보물고의 문이 움직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루펭이 나를 안내했다.
“저곳에 있는 게 바로, 그대가 찾던 ‘별자리의 뒤편’이라네.”
그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을 본 나는, 은은한 빛무리를 흘리는 지팡이를 볼 수 있었다.
저게 바로 ‘별자리의 뒤편’.
천천히 다가가서, 그것을 손에 쥐었다.
차르륵.
지팡이를 손에 쥐자, 내 손에 그것의 빛무리가 천천히 감겨 왔다.
“…좋은데.”
“그렇지. 아무렴 드라쿨레아의 보물인데!”
지팡이를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빌려줘서 고맙다. 일이 끝나면 돌….”
“아, 스칼렛. 나도 한 가지 부탁해도 괜찮겠나?”
말하고 있는데 그걸 중간에 끊네.
딱히 뭔가 달라고 할 생각 없다더니, 내가 물건을 챙기자마자 생각났다는 듯 말을 바꾸는 것도 그렇고.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뭔가.”
“레티시아, 결혼은 아직이겠지?”
“…뭐?”
놈이, 쑥스럽다는 듯 뒷목을 긁었다.
“허허. 아무래도 역시, 드라쿨레아에 걸맞는 베필은 체페슈나 노스페라투밖에 없지 않나?”
이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레티시아를 나와….”
“이봐.”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이 새끼가.
“표정부터 관리하지 그래. 역겨운 것.”
탐욕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혐오스런 인상의 얼굴로, 레티를 입에 담지 마라.
죽여버린다.
강하게 쏘아붙이자, 놈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내가 뭐 못할 말을 했다고 그리 정색하고 그러나. 허엄, 내가 보물까지 빌려줬거늘….”
그래?
“너. 누님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나.”
체페슈에 대한 열등감.
재능을 타고 난 우리 남매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누님을 향해 품은 음심.
내가 모를 줄 알았나보지.
데이지가 괜찮다고 해서, 챙길 것만 챙기고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누님을 향해 음심을 드러낸 시점에서, 그냥 지나갈 순 없게 됐다.
“눈에 훤히 보인다. 내게 품은 열등감이.”
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채 백 살도 못 산 어린 놈이 꼴에 가주가 됐다니까 수틀리더냐.”
분노와 수치심에 잔뜩 붉어져선,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 것에 집착하고 연연하니, 네 그릇이 모자란 것임을.”
“이노오옴…!”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 새끼. 나보다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