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3 시간 신전 (4)
어찌 두 사람의 설득이 잘 끝나고.
“그런 거면 미리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역시 여신님은 다 뜻이 있으셨던 거네요.”
멋쩍게 나를 탓하는 누나와, 믿었던 여신의 무능함을 목격했다가 사실은 그게 다 어느 정도 계획 된 거였다는 사실에 안도한 아이리스.
아니.
그걸 어떻게 미리미리 말하냐고.
그래도 둘 다 안심한 것 같으니 다행인가. 아주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던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다섯 시간이면 몸은 다 회복됐겠지.”
나야 불사의 몸이니 30분만 있어도 거진 다 회복이 되었을테지만,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니 회복에 전념할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내가 성소에서 보낸 30분 동안 두 사람은 다섯 시간이나 흘렀을테니, 큰 상처 쯤은 거진 회복이 되어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어….”
“…그게.”
…?
두 사람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돌려 바닥이나 먼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운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나는 코 끝을 찡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혈향은 누구보다 잘 맡을 수 있으니까.
“…뭐 했어?”
두 사람의 상태를 점검해본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다섯 시간 전과 거의 다른 게 없잖아?
이건 내가 성소에 들어가 있는 사이 뭔가 또 무리를 했다거나 한 것인데.
혹시 또 가디언이 나타났나? 아니면 그 외에 뭔가 위협이 될 만한 거라도?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까.
나는 내가 없는 사이 무리했을 두 사람에게 미안해지면서도, 반대로 그런 사실을 내게 숨기려 하는 모습에 괜한 서운함을 느꼈다.
“…아 씨. 그런 거 아니거든.”
내 표정에서 그런 감정을 읽었는지, 누나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아이리스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보니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좀 붉은데.
“…아니. 들어가놓고 몇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니까.”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아.
「오오옹….」
처량하게 울음소리를 흘리는 옵시디안. 다섯 시간 씩이나 흘렀으면 상처 입은 영체도 거의 다 수복되었어야 했을텐데, 내가 성소에 진입하기 전과 큰 차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마에 혹 같은 게 나있는데.
“설마 성소에 억지로 들어오려고 했어?”
정곡이었는지, 두 사람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구오옹….」
옵시디안만 혹이 난 제 이마를 쓰다듬으며 구슬피 울었다.
최상급 정령의 영체에 다른 것도 아니고 혹이라니, 성소의 결계쯤 되는 것에 이마를 들이박은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모습이다.
“쟤 울잖아.”
내가 옵시디안을 바라보자, 들으라는 듯 「구오옹 우오옹…」 처량하고 구슬피 울어댄다. 옆에선 어느새 역소환 됐다가 돌아온 코나가 뚝뚝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울지 마세요. 뚝.」
「우옹….」
집채만한 도룡뇽 모습의 정령이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녀 정령에게 달래지는 모습이라니.
아무튼 다시 누나 쪽을 보았다.
“아니…, 뭐…, 미안하게 됐다….”
저걸 사과라고 하는 건가.
“옵시디안 님, 죄송해요….”
아이리스는 착실히 허리 숙여 울고 있는 도룡뇽에게 사과했다.
「오옹….」
끄덕.
옵시디안도 아이리스의 사과에 고개를 흔들었다. 뚝 뚝 흘리던 눈물도 그친 모습이었다.
최상급 정령이면서 순박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괜찮대잖아.”
“누나 보고 괜찮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워낙 착한 녀석이라 이 정도로 그냥 용서해주는 건가. 최상급 치곤 유일하다시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녀석이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계약자인 누나나, 정령이나 다름 없는 나는 감정표현이나 하고자 하는 의사가 무엇인지 이해는 되는 편이지만.
그나마 계통까지 겹치는 코나는 의사소통이 원활한 것 같긴 한데.
그때였다.
「루나! 디안한테 똑바로 다시 사과해요!」
“디, 디안?”
옵시디안에서 따온 건가? 하긴 거대 도룡뇽이라 외견이 썩 귀엽게 생겨서, 그런 앙증맞은 호칭이 잘 어울리기도 했다. 다만, 누나도 처음 들어봤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사과했잖아….”
아니. 호칭이 아니라 그냥 사과를 다시 하래서 그런 거구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아파!”
누나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어떻게 나를 때려?”하는 얼굴이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콩.
“악!”
그렇게 몇 차례 더 쥐어박아주니, 처음엔 “나쁜놈아! 내가 때릴 곳이 어딨다고 때려!”하고 씨근거리던 것도 잠시.
“미안…….”
「고우웅….」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니 옵시디안도 입꼬리를 올린 게 꼭 뿌듯해 하는 것처럼 웃으며 받아주었다.
도룡뇽인데 웃는 얼굴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는 게 신기하단 말이지.
「잘 했어요! 이제 서로 사이좋게 지내요!」
“원래 사이는 좋았는데….”
「어허!」
“아 알았다고.”
마치 엄마와 딸을 보는 것 같은 대화다. 아니면 선생님과 학생? 어느 쪽이든 십대 초반의 외모로 보이는 코나가 더 연장자로 보이는 게.
생각해보니 코나가 더 연장자가 맞지 않나?
겉모습만 어리다 뿐 정령이고.
칼리아의 레어에서 산 세월만 해도 백 년이 넘을텐데.
「…으응?」
코나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곤,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상하다. 뭔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는데.」
“난 아무 생각 안 했어.”
「정말요?」
과연 정령의 감이라는 것일까.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에 속으로 감탄하던 사이, 내심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듯 누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박수를 짝 쳐서 시선을 끌었다.
“둘 다 회복이 덜 된 것 같으니 좀 더 쉬었다 가자. 아예 하룻밤 여기서 푹 자고 가는 게 낫겠다.”
“으.”
자기들 때문에 시간이 늦어진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의 안색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돼서 한 행동인데, 기특하다고 생각하면 했지 탓 할 생각은 없는데.
“괜찮아. 오히려 고맙다. 날 그렇게 좋아했어?”
“뭐? 무슨 소리냐? 참 내. 하여튼 자의식과잉이야 그거.”
“네….”
너스레를 떨며 그리 말하니, 반응이 갈렸다. 누나는 어이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고, 아이리스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니. 그, 아니 그러면 나만 이상한 거 같잖아….”
졸지에 아이리스랑 다른 대답을 해버리게 돼서는, 내 눈치를 살피던 누나가 이를 악 물곤 웅얼거렸다.
“조, 조….”
조?
좋아한다고 말하려는 걸까.
아이리스한테 밀리기는 싫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나.
“조….”
조용히 누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이리스도 흘끔 누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주목을 받은 누나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
“…좆까! 씨발아! 나쁜새끼야!”
이런.
아무튼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이리스도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푸흐흐, 웃어대는 우리를 본 누나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기도 지금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건 아나보지.
“그만 웃어!”
*
밤이 되었다. 가디언과 치고 받느라 먼지 투성이가 된 바닥을 대충 청소하고 캠프를 깔았다.
커다란 텐트 속에 자리를 잡고 누우니 뒤따라 아이리스와 누나가 들어왔다.
“벌써 누웠네.”
좀 전의 일로 잔뜩 삐졌다가 겨우 풀린 누나가 툴툴거리며 발로 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자. 여기 누워.”
툭툭. 누워서 옆자리를 두들기니, 우뚝 멈춰 서선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시키는대로 하는 건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또 싫다고 하기는 아쉽고. 오묘한 표정이 돼서는, 우두커니 선 채 망설이고 있다.
“제가 누울래요.”
쏙.
누나가 망설이는 사이, 아이리스가 냉큼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앗.”
망연자실한 목소리. 누나도 본인이 자기도 모르게 뱉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입술을 잘끈 깨문다.
하여튼 진짜.
나는 아이리스가 누운 반대편을 다시 툭툭 가리켰다. 이러려고 가운데에 누웠기도 하고.
“여기 누워.”
“….”
말 없이 꾸물거리며 들어온다.
오른쪽은 아이리스, 왼쪽은 누나인가.
양손의 꽃이라는 거군.
지금까지 며칠이나 이런 식으로 잠을 자긴 했지만, 괜히 확 실감이 되었다. 성물을 얻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둘 다 푹 자둬.”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둘 다 많이 피곤해서 금방 잠이라도 든 모양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일이 있고 나서, 몸의 피로도 있는 상태다. 기절하듯 곯아떨어지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
당장 목표로 했던 것을 이룬 나야 꽤 마음이 편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억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다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드라쿨레아에 들러야 하기도 했고, 여신이 전해준 부탁도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좀 쉬어도 괜찮겠지.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
“자요?”
툭.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를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가볍게 내 가슴팍을 톡 건드리곤,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입술 위로 이불을 끌어와서는, 두 눈만 빼꼼 내민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리스가 보였다.
선명히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담아두고 있었다.
“왜?”
서서히 돌아오는 정신에, 잠기운을 살짝 몰아내고 물어보자, 아이리스가 답했다.
“루나 언니 지금 자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움직여 왼쪽을 살짝 돌아봤다. 피곤했는지 새근거리는 누나가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리스를 보았다.
“자네.”
“그럼.”
아이리스가 머뭇거렸다. 눈 밑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잡고 슬쩍 끌어올려 제 눈을 슥 가리더니.
“…뽀뽀라도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