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2 시간 신전 (3)
잠시간의 휴식이 끝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발 밑에 쓰러진 거대한 바위 덩어리.
신전을 지키던 가디언이었던 그것을 발로 툭 찼다.
신화 시대의 마법으로 가동하는 골렘이라 처음엔 어떻게 해체라도 해서 내부를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가동이 중지 되며 그 거체를 구성하던 마나가 완전히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신화 시대의 골렘이니 몸체를 이루는 바위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살펴봤더니 그런 것도 아니고.
파밍할 게 없으니 힘들게 싸워 이겼는데도 괜히 힘이 빠졌다.
아무튼.
내가 먼저 휴식을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니 뒤이어 아이리스와 누나도 일어섰다.
쉬고 있어도 괜찮은데.
“좀 더 쉬어도 괜찮은데, 두 사람은.”
성물을 챙기러 가는 건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고.
내가 좀 더 쉬라고 권하자, 서로 눈치를 보던 두 사람 중 누나가 먼저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래. 기왕이면 같이 가고 싶은데, 좀 힘들 것 같다야….”
아이리스를 보니, 그녀도 멋쩍게 웃는다. 하긴, 둘 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이 많이 상한 상태일테니.
“죄송해요….”
사과할 것까지야.
아이리스가 괜히 미안해 하는 것 같길래,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길고 예쁜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오빠?”
스윽 스윽.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리스. 아무렇지도 않게 살살 쓸어내리다, 잔뜩 헝클어뜨린다.
“…아! 하지마요…!”
잔뜩 헝클어진 머리. 아이리스가 울상을 지었다. “빨리 가기나 해.” 누나가 타박했다. 아이리스랑 시시덕 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탁. 가디언의 거대한 몸을 넘어서, 성소에 들어섰다.
푸른 빛으로 가득 찬 성소의 안. 바닥과 벽을 타고 흐르는 푸른빛의 관이 그림을 그리듯 얽히며 은은히 발광하고 있다.
그리고 성소의 중앙. 빛의 관들이 한 데 모이는 곳.
그곳에 찬란히 빛나는 푸른 빛의 보석이 있었다.
아이리스의 성검이 발하는 기적과 같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을 품게 만드는 신의 권능 그 자체.
저것이 바로, 여신이 말했던 시간의 성물.
나는 성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윽….”
손 끝에서 전해져오는 강렬한 위화감에 눈가를 찌푸렸다.
손가락 끝이 일렁거린다. 성물을 주변으로 성소 전체에 펼쳐진 시간의 왜곡. 그 중심지인 성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왜곡의 정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이대로라면 아마 성물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 할 터.
이젠 아무것도 없을 거라더니. 여신이 또 여신 한 건가?
슬슬 정말 화가 나려던 찰나.
「…들리나요?」
머릿속으로, 낯설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낯선 목소리인데도, 경계심이 들지 않는, 어딘가 편안한 목소리. 오히려 그 편이 더욱 의심스럽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미트라?”
「네. …겨우 제 목소리가 닿았나보군요. 다행입니다.」
자애롭고, 따스하게 내 영혼을 감싸는 듯 부드러운, 말 그대로 태양과 빛의 여신이라 할 법한 목소리였다.
듣기는 참으로 좋은 목소리지만, 다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나는 일단 먼저 한 가지 묻기로 했다.
“일부러 우리 엿 먹이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단지, 지금의 저는 볼 수 있는 시야도, 쓸 수 있는 힘도 한정 되어 있다보니…. 사과드려요, 스칼렛.」
그렇단 말이지.
나는 일그러진 내 손가락을 보았다. 강력한 시간의 왜곡으로, 공간마저 비틀려 버린 상태.
“이건 어떻게 가져가면 됩니까.”
「죄송해요. 원래라면 손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설정해두었을테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당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는 것은 대화가 끝나면 성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건가?
내 의문을 물어보자, 여신은 쉽게 긍정했다.
「물론이에요.」
그렇다면 뭐.
태양과 빛의 여신이 어째서 시간의 신전 속 성소에서야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중요한 건 이렇게까지 해서 여신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건데.
내가 품은 의문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것마냥, 여신이 말을 이었다.
「우선 여기까지 온 걸 진심으로 축하해요. 이걸로 기억을 되찾을 준비는 거의 다 되었다고 봐도 무방해요. 우선 마왕 바알의 시련부터 극복해내야겠지만….」
여신이 말 끝을 흐린다. 작게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요.」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스가 성검을 통해 부리는 모든 신성력과 권능이 여신이 빌려준 것이니까.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마따나 거의 대부분의 힘을 잃은 상태로 아이리스를 통해 전폭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더 해달라고 따질 순 없었다.
“지금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마워요.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스칼렛?」
여신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말씀하시죠.”
「시련을 무사히 극복해내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
나는 여신에게 되물었다.
“무엇을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내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물자, 여신이 말을 이었다.
「당신을, 당신의 누이를, 체페슈를 위해서.」
그리고.
여신이 잠시 말을 멈췄다. 다음으로 할 말을 고르는 듯 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솔직히.
내가 스칼렛이 아니었다면.
내 누나가 루나 테일러가 되지 않았다면.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마왕과 싸워야 할 운명이 아니었다면.
마왕과 싸우는 일 따위엔 관심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가정일 뿐인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배제해봤자,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 선택의 결과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것조차 나는 받아들였다. 레티시아가, 나의 새로운 누님이 바로 그 증거다.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마왕과의 싸움에 앞장 서 있다. 내게 마음을 준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그러니 세상을 위해서라는 여신의 말만큼, 나를 움직이게 하는 문장은 없으리라.
「…고마워요.」
여신의 목소리만 전해 듣는 상황인데도, 마치 눈 앞에서 여신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 빠르게 얘기할게요.」
더 길게 유지하기엔 힘도 모자라고, 언제 바알에게 들킬지 모른다고.
「들킨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이렇게 몰래 대화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하긴.
바알 몰래 놈의 계획 따위를 전달해주는 건데 들켜버리면 의미가 없긴 할 테지.
나는 여신이 전해주는 정보를 들으며 머릿속에 정리했다.
여신이 말해주는 내용은,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문제도 있어서, ‘역시나’ 하다가도.
“….”
들으면 들을수록.
“…아니.”
정말로?
하는 생각이 들다가.
“…진짭니까?”
「네.」
“하.”
끝끝내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얘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괜찮으세요?」
만일 지금 여신에게서 얘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니 눈 앞이 아찔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달이 뜬 시간대의 진조인데도 두통이 밀려왔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여신의 목소리엔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부탁한다는 말을 바꾸진 않았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정확히는 우리의 일인가.
이번에도 아이리스의 도움은 반드시 받아야만 할테니까.
누님의 도움도 필요할테고.
문득 나를 도와줄 사람이 꽤 많다는 게 느껴졌다.
「다 여자지만요.」
“시간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
내 말에 여신이 작게 키득댔다. 뭐가 그리 재밌다고.
「그래도 고마워요.」
여신의 기척이 점점 희미해져간다. 나와의 연결이 점점 끊어져 가는 중인 듯 했다.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 여신이 말했다.
「아이리스 좀 잘 챙겨주고요.」
거 참.
장모님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아니지. 장모님이라도 365일 지켜보고 있진 않을텐데, 여신은 아이리스 손에 깃들어서 내내 지켜보고 있으니까 더할지도.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여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나니, 성물의 주변에 강력하게 펼쳐져 있던 시간왜곡파장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손을 뻗어, 성물에 손가락 끝을 대었다.
파앗─! 환한 빛을 내뿜으며, 성물이 내 안으로 녹아들어간다.
나는 내 안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시간의 성물.
소유자의 바람에 맞춰 기능을 정하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비보. 내 안에 새롭게 자리 잡은 이 보물은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을 수집해 조금씩 공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성물이 스며든 주먹을 쥐었다 펴 본다.
딱히 변한 건 없었다. 다만 괜히 미묘한 기분이라, 몇 분이나 묵묵히 주먹을 내려다 보았다.
이만 돌아갈까.
누나도 아이리스도 기다리고 있을테고.
성소의 밖으로 나서자, 마침 기다리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성소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둘이 여기서 뭐….”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오빠! 괜찮아요? 무슨 일 있던 거 아니죠?”
얘네 왜 이래.
나는 찰싹 달라붙어서 나를 여기저기 살펴보는 두 사람을 어안이 벙벙해져서 내려다봤다.
“걱정돼서 안에 들어가보려 했는데,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안 들어가지구…!”
“옵시디안이랑 코나가 같이 해제해보려 했는데 안 되니까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나는 거의 울먹거리는 두 사람을 달랬다.
“별로 오래 안 있었는데 뭐 그리 걱정….”
“다섯 시간도 넘게 있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지.
아.
나는 깨달았다.
성소가 성물을 중심으로 시간을 왜곡시켰듯, 성소의 안팎 역시 시간의 왜곡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여신이 손을 써줘서 말도 안 될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던 모양이지만.
아무튼 내가 삼십 분 정도를 성소 안에서 보낸 사이 밖에서는 그새 다섯 시간이나 지난 모양이었다.
“이 새끼! 안에서 뭐 했어! 어!”
일단 두 사람부터 달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