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드래곤 하트 (1)
“오빠?”
서늘한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성격과는 다르게 차가운 인상의 아이리스였다. 차가운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좋았어요?”
뒤이어 들려오는 살벌한 말.
나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방긋 웃고 있지만, 두 눈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내 환하게 웃는다.
두 손을 다소곳 하게 모으고 있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나를 찌르려고 성검을 소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찌르는 건 아니겠지?
살짝 무서워졌다.
“아이리스. 우리 일단 나가서 얘기….”
“오빠.”
“응.”
일단 지금 여기서 대화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았다.
바로 내 뒤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누나도 있고. 어쨌든 바로 증거가 있으니 아이리스를 달래주려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리스를 설득해 일단 밖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아이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칼같이 쳐냈다.
“제가 묻잖아요.”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냐구요.”
여기선 무슨 대답이 베스트지.
안 좋았다고 하는 게 최악일 것이다. 어차피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아이리스도 알테고, 그녀를 달래기 위해 누나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좋았다고 하면?
눈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눈만큼은 싸늘한 아이리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달래주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녀가 서운하도록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게 최선이니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아이리스가 한 발짝 다가왔다.
“….”
“…왜 놀라고 그래요?”
순간 성검이라도 뽑아서 달려들까봐 흠칫하자, 아이리스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봐요.”
볼멘소리로 투덜거린 아이리스가, 눈가를 꿈틀이곤 빠르게 다가왔다. 내가 뒤로 물러설 겨를도 없이 바짝 다가와선, 내 멱살을 턱 잡았다.
“오빠 진짜 나쁜 사람인 거 알죠.”
얼마 전까지 나를 동경하던 소녀가 어느덧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존경하던 사람이 이런 난봉꾼일 줄은 몰랐어.”
한탄하듯 그렇게 내뱉은 그녀가, 나를 노려다보곤 중얼거렸다.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게 됐지만, 대신 좋아하게 됐으니까.”
뒷꿈치를 살짝 들었다.
쪽.
보드라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은은한 여인의 향기가 확 풍겼다. 사랑을 한 소녀는 여인이 되는 법이라고 하였던가.
“봐줄게요 일단은.”
빙그레 눈웃음을 지은 아이리스가 살짝 떨어졌다.
“이번 여행동안은 저한테 손대면 안 돼요? 언니랑 경험을 공유하고 싶진 않으니까. 언니는 언니대로. 저는 저대로. 알았죠?”
이제 여행동안 뽀뽀도 안 해줄거야.
메롱.
마치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마냥 내게 혀를 삐죽 내미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나는 그만 웃고야 말았다.
하여간에 착해빠져서는.
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게 메롱메롱 혀를 낼름이던 아이리스가 갑자기 제게 다가오는 나를 보곤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뭐, 뭐예요 갑자기? 오지 마요. 뽀뽀 안 해줄 거라니까? 손 대지 말라니까요?”
그러다 벽에 탁, 등이 부딪치면, “꺅.”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낸다.
아까의 차갑고 무섭던 아이리스는 어디 가고 웬 귀여운 용사님이 당황해서 나를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지.
“웃지 마요….”
뽀뽀 안 해준다는데 웃음이 나와요? 나를 타박하는 목소리다. 괜히 서운하다는 듯 내 정강이를 발 끝으로 툭툭 찬다.
나는 저게 허세라는 것을 알았다. 괜히 자기가 서운하다는 어필을 해서, 갑작스럽게 자신을 벽으로 몰아넣은 나를 피하려는 속셈이리라.
손을 뻗어 아이리스의 턱을 받쳤다. “읏.” 아이리스가 고개를 치들고,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고개를 숙였다.
쪽.
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입맞춤이었다. 혀는 쓰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지도 않고, 풋풋하게 입술을 살짝 대고 부비기만 했다.
꼭 뭔가를 저지를 법한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이런 풋풋한 입맞춤이라니. 아이리스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가, 괜히 나를 밀어내지도 못 하고 두 손이 오므려졌다.
잠시 뒤 내가 떨어지자, 귀까지 빨개진 그녀가 웅얼거렸다.
“뽀뽀 안 해준다니까….”
“네가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한 거니까 괜찮아.”
그런 게 어딨냐며 아이리스가 눈을 치켜떴다. 여전히 귀는 붉어진 채라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까처럼 눈이 서늘하지도 않았고.
내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느낀 듯 했다. 자기가 우습냐며 씩씩댄다.
나는 다시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이 나쁜 사람! 난봉꾼아! 내 입술 돌려내!”
입술을 돌려내라기에 다시 허리를 숙였다. 보드라운 입술이 다시 내 입술과 맞닿았다.
“…입술도둑.”
이건 좀 해명의 여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그녀가 나의 입술을 훔쳐갔기에, 그것을 돌려 받은 것 뿐이었는데, 또 화를 내길래 다시 입술을 빌려줬더니 오히려 다시 입술을 돌려내라며 화를 낸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돌려주기 위해 뽀뽀 했을 뿐인데, 이제는 나를 도둑이라고 불렀다.
이 괘씸한 소녀를 벌하기 위해, 나는 다시 뽀뽀를 했다.
“도둑놈이 또 뺏어갔어!”
또.
“그, 그만해요. 잘못했어요….”
또 한 번.
“힝.”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으앙.”
결국 아이리스가 울상이 됐다. 암만 내게 뽀뽀하지 말라고 해봤자, 내가 뺨을 감싸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면, 저도 모르게 눈을 슬그머니 감는 자기가 부끄러운 듯 했다.
“몰라요!”
아. 도망갔다.
그래도 달래기는 성공한 것 같았다.
*
아이리스를 무난히 달래는 데에 성공한 이후, 며칠간 칼리아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집중했다. 아이리스는 새끼용을 교육시키고, 나는 그런 사이 주변 영역을 정리했다.
칼리아가 자연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곳의 안녕을 위해, 방해가 될 법한 것들을 치우는 과정으로, 상대는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성체 드래곤 세 마리였다.
곧 자연으로 돌아갈 칼리아의 다음으로 산맥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놈들. 레드 드래곤 하나는 산맥의 주인보다는 그저 쟁탈 과정에서 벌어진 싸움을 기대하는 놈이었고, 다른 둘은 그냥 감투를 탐내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확실히 성체 드래곤은 강했다.
펠그리온을 레이드 하며 얻은 영감과, 칼리아의 영역에 가득 찬 마나, 거기에 기억을 잃었다해도 몸에 남아있는, 한때 그랜드의 경지까지 닿았던 흔적까지.
그 모든 것들을 체득하는 데에 이만한 일이 또 없었다.
칼리아는 상당히 만족스러워 했다. 평안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워낙 몸뚱이가 커다래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게 그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칼리아가 나를 불러냈다.
누나는 코나와 계약을 위해 코나를 만나러 가고, 나와 아이리스가 칼리아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어서오게.」
칼리아는 웬 일로 멀쩡히 깨어있었다. 그의 영역에서 지내며, 그가 졸지 않고 멀쩡히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드물었는데.
나와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아가 눈을 움직였다. 거대한 눈동자가 아이리스를 응시했다.
「그대가 아이를 가르친 용사구나. 전에는 잠들어 있느라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었지….」
처음엔 펠그리온과의 사투로 아이리스가 기절했었고, 그 이후엔 칼리아가 잠들어 있느라 두 사람이 이렇듯 제대로 인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리스 역시 살풋 웃으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드래곤 칼리아.”
「그래. 네게는….」
칼리아가 말을 하다 멈췄다. 꼭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더니, 그가 말했다.
「드래곤이란 종족은 살면서 감사 인사 따위를 할 일이 드물단 말이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엇을 주어야 그대가 기뻐할 보답이 될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나.」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칼리아가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아이리스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별로 기대하지 않다가, 갑자기 큰 선물을 받게 돼서 놀란 눈치였다.
“그….”
그러곤 나를 슬쩍 보고는. 뺨을 살짝 부풀린 다음.
“우리 오빠가 바람 좀 못 피게 해주세요.”
「뭐라?」
이번엔 칼리아가 당황한 듯 했다. 늙은 용도 이런 소원은 들어본 적 없다는 듯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스칼렛, 그대여. 그대는 참으로….」
거기까지 말하곤, 드래곤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꼭, “어휴, 너는 진짜…. 아니다, 됐다.” 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용사여, 그런 부탁은 아무래도, 들어주기가 힘들다만….」
“으.”
아이리스는 아쉬운 듯 했다.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곤.
“그럼 정조대 같은 건 없나요?”
「……무엇이라고?」
“잠깐만.”
그건 좀 아니지. 내가 아이리스를 뒤에서 확 잡아끌었다. 키가 작지 않아서, 내 품에 쏙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허리를 끌어안고는 귓불을 앙 깨물었다.
“꺄윽. 하지 말라구요. 제가 여행 중에는 손 대지 말랬죠!”
“그러게 누가 그런 소리 하래? 애초에 안 될 거 알면서 그런 부탁은 왜 해.”
“오빠가 듣고 양심에 좀 찔리라구요!”
내 양심은 이미 동그라미가 된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