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시점─루나 테일러 (1)
<푸른 장미 정원>이든, <푸른 백합 정원>이든, 그녀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루나 테일러는, 루나 테일러로 태어나고자 바랐던 적이 없었으니까.
사고로 죽고 나서, 태어난 세상.
처음엔 웬 판타지 세상 속, 조금 가난한 시골 영지이긴 해도 귀족 아가씨가 됐다며 들뜨곤 했었다.
이곳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이 한때 즐겨 읽었던 소설 속 세상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모티브로 하고 만든 팬 게임 속 세상이든, 그런 건 좆도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멸망할 가능성이 높은 세상.
멸망을 막기 위해서 예정된 주인공.
그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런 운명이 싫었다. 다치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 아프게 될 테니까.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될 여러 캐릭터들?
명예? 부?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루나는 모든 게 싫었다.
모든 게 가짜였다. 자신이 2차 창작으로 만든 세상이든, 아니면 원작의 세상이든, 어느 쪽이든 창작물 속 세계라는 건 똑같지 않은가.
가짜, 가짜.
가짜투성이.
모든 게 회색빛이었다. 색채 없는 세상이었다.
예정된 미래는 죽음이거나,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밖에 없다.
이런 세상 따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지난 세상에서의 기억을 매일 밤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괜히 자신의 동생이 떠올랐다. 그 놈이라면 뭐가 좀 달랐을까.
아니. 그 놈은 루나 테일러로 태어났다면 TS 됐다며 끔찍하게 여겼겠지.
그렇게, 지난 생에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리면, 루나 테일러의 심정은 안정이 되곤 했다.
….
분명 동생도 그녀와 함께 사고를 당했을텐데, 그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가 그런 것처럼 어딘가로 환생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기적처럼 살아남았을까.
루나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그녀만 죽고 동생 혼자 살아남게 됐을 경우, 혼자 남았을 동생이 자신을 그리워 할 거라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했으며, 그렇다고 동생까지도 죽었길 바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기왕이면 동생은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루나는 생각했다.
참으로 많이 치고받고 싸운 남매지간임에도, 회색빛 색채가 만연한 세상에 홀로 머무르다 보면, 괜히 동생이 그리워지곤 하는 것이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테지만.
“오랜만이다.”
낯섦에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무채색이던 세상 속에, 온풍이 불었다.
다시 만날 일은.
“생긴 게 그대로라 몰라볼 수가 없더군.”
없을 거라고.
“쯧. 마르기는. 뭐라도 좀 먹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열두 살의 루나 테일러는, 멍하게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 루비를 박아넣은 듯 영롱한 적안과, 새하얀 피부. 선이 가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다부진 몸. 그 자태에 서린 고고한 기품.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송곳니.
제국의 기둥.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동생.
비록 검은 머리, 검은 눈도 아니고. 피부도 이것보단 좀 더 탄 느낌이고, 선도 좀 더 굵어야 하는데다, 송곳니도 없어야 하지만.
정말 보자마자, ‘아. 내 동생이구나.’하고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닮은 남자의 모습.
“식사라도 하러 가지.”
“…응.”
루나 테일러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동생과의 재회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일어서긴 했으나, 막상 이렇게 마주 보니 그녀가 늘 회상하던 동생과는 너무 다른 게 아닌가.
“뭘 그렇게 얼어있나.”
우선 그녀의 동생은 저렇게 딱딱한 얼굴로 말을 걸지 않는다.
늘 귀찮은 얼굴이거나, 짜증난 얼굴이거나. 아무튼간 흔한 20대 남자 그 자체였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어떤가.
허리를 곧고,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품위가 깃들어 있으며, 목소리는 고저 없이 딱딱하고 우아했다.
“으.”
어딘가, 낯설었다.
비록 전생의 기억이 있다지만, 육체적으론 열두 살 어린아이인 루나 테일러가, 그 어린 육신의 영향으로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그래서 그녀가 우물쭈물, 굳어 있자 무심히 입을 열었던 동생의…, 스칼렛이 눈이 그녀를 향했다.
“…이런.”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스칼렛의 작은 행동에도 루나의 가녀린 어깨가 떨렸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라, 스칼렛이 허리를 슬쩍 굽혔다.
“바보 같은 것. 내가 뭐 무섭다고….”
차갑고 날카롭던 눈매가 누그러졌다. 지난 백년간 굳어져 온 인상을 억지로 부드럽게 풀고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건네려 무던히 애쓰는 투였다.
그것이 어린 루나에게도 와닿았다.
괜히 부끄러웠다. 아무리 좀 달라졌다지만, 동생한테 겁이나 내고.
“…맛있는 거 사줘.”
‘그래.’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손을 뻗었다. 꼬옥. 스칼렛의 길다란 손을 어색하게 붙잡는다.
“…가자.”
스칼렛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엔 루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남매는 그렇게 재회했었다.
“아직도 편식하나? 가리지 말고 먹도록.”
“아 씨…. 내가 누난데….”
“누가 봐도 내가 보호자 역할이다.”
밥을 먹을 때.
“거 둔감하기는. 마력 하나 제대로 못 느껴서 어쩔 셈이냐.”
“아니 나는 원래 지구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럼 설명을 잘 해주든가….”
마력 감응 훈련을 할 때.
“저게 갖고 싶나? 사주마.”
“야! 넌 내가 애로 보여?”
“길거리에서 대놓고 반말하지 마라.”
산책 따위를 할 때.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런 식이었다.
스칼렛은 루나와 만날 때면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처음 재회했을 때보다도 한층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말투나 몸짓 등등에 스며든 백 년의 세월이 쉬이 지워지진 않았으나.
루나에게 스칼렛은 무채색의 세상 속 마주하게 된 지난 생의 인연이었다. 그녀는 은연 중에 다시 만난 동생이 유이하게 그녀와 함께 온전하게 채색 된 존재라 여겼다.
그러니 두 사람은, 변해버린 서로를 어색하게 여기면서도 피하진 않았다.
되려 서로의 어색한 모습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곤 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며.
물론 그런 면은 스칼렛보단 루나가 더욱 그러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스칼렛은 이미 백년이 넘게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살아왔고, 그 긴 세월간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스칼렛은 바뀌어버린 자신이 싫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루나는 달랐다. 그녀에게 루나 테일러로 살아온 지난 십여년은 무채색의 시간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허비한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니 루나는 스칼렛에게 은근히 의존하곤 했다. 그것을 스칼렛 역시 알았으나 막지 않았다. 당장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나는 테일러 영지의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오직 그에게만 마음을 열었으니까.
우선 그녀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천천히 다른 인간관계를 늘려주자.
결과적으론 옳은 선택이었다. 스칼렛을 통해 과거에 비해 활발해진 그녀는, 점차 테일러 영지의, 저택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으니까.
다만 그 기저에는 어디까지나 찬연한 색채의 동생의 존재가 깔려 있었다.
재회했을 때만 해도 한 사람 몫의 색채만 품고 있던 동생에게, 시간이 지나며 의존하는 사이, 어느덧 세상이 색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세상이 색을 품은 게 아니었다.
동생이 세상에게 자신의 색을 빌려준 것이다.
언젠가, 아픈 미래밖에 없다며, 그런 운명을 예정한 이 세상을 죽일 듯 저주했던 루나는 스칼렛에게 물었다.
마왕은 어떡하지?
나는 주인공이라, 마왕이랑 싸워야 할 텐데.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많을텐데.
“뭐가 문제야. 나랑 같이 해결하면 되지.”
“아픈 게 싫으면 뒤에서 숨어 있어. 정령사가 왜 그런 걸 걱정해?”
그녀의 동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숨어 있어도 괜찮다고 해줬다.
그러니 그녀에게 세상은 이제 증오스럽지 않았다.
아주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녀도 알았다. 그녀가 편히 뒤에서 쉬는만큼, 숨어있는만큼, 앞에 있어야 할 동생이 더욱 아프고 다치리라는 것을.
그녀가 정령사라 뒤에서 숨어도 된다고 하기엔, 그런 말을 하는 동생조차 후위인 마법사라는 것을.
그러니까 동생의 뒤에서 숨기만 하진 않으리라.
아프겠지만, 다칠테지만, 그래도 동생과 함께 하고자 했다.
“…있잖아.”
“왜.”
“나 강하게 만들어주라.”
“…뭐?”
“히든피스. 어딨는지 알아.”
루나는 동생의 옷깃을 붙잡고 올려다 봤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동생이 있었다. 아주 달라진 줄 알았더니,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끔 보이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랑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보다는, 뭐랄까,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 가족에 대한 친애….
뭐 그런 게 아닐까.
“나랑 같이 다니자. 여행도 할 겸.”
힘들 거라면, 함께 해야지.
“너 혼자 힘들게 만들긴 싫어.”
“아픈 거 무섭다며.”
소녀는 작게 웃었다.
그저 작게 웃고 말았다.
너와 함께라면 아프고 다쳐도 좋아.
속내로 묻어두고 뱉지 못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