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 상급 정령, 코나 (1)
「다 왔다.」
칼리아가 천천히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백룡 아니랄까봐, 영역 전체가 얼음과 유리 따위로 시야가 빽빽했다.
“눈 아파.”
나와 같이 영역을 내려다보던 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어디까지나 손님인 우리가 그의 영역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순 없었다. 자기 영역에 민감한 드래곤이니만큼, 눈이 아프답시고 영역에 손을 대려 했다간 화를 낼 수도 있고.
아이리스는 여전히 골골 잠든 채였다. 보아하니 이대로 하루는 꼬박 잠들어 있을 듯 했다.
「내리지.」
쿠웅. 육중한 몸이 발을 딛었다. 이 정도로 큰 소리가 났으니 사방의 얼음과 유리가 깨질 법 한데도 멀쩡하기만 했다. 과연 드래곤의 영역이구나, 하고 누나가 작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고위 정령도 있을 것 같은데.”
“잘 찾아봐.”
이미 중급 이하의 정령은 산맥에 들어와서 수십이나 챙겼으면서, 고위 정령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며 입맛을 다시던 누나였다. 이번 기회에 새 고위 정령이 하나 더 늘면 나쁠 건 없으리라.
“최상급은 없으려나?”
“욕심이 크다 그건.”
탁. 아이리스를 안아든 채 누나와 함께 칼리아의 등에서 내려왔다. 얼음 바닥이라 미끄럽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러진 않았다.
나를 비추는 얼음 바닥을 슬쩍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들어 무심한 듯 나른히 눈을 반쯤 감은 백룡을 올려다 봤다.
“우리는 어디서 지내면 되지?”
「…곧… 안내해줄… 정령이… 올 게다…. 졸립군…. 들어가서… 이만 자야겠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용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둥지로 돌아가는 늙은 용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보아하니 이번 일에 상당히 수명을 깎아먹은 듯 했다. 짧으면 당장 내일에라도 자연에 돌아갈 듯 싶었다.
“그래도 이 편이 더 후회가 없을 거야.”
내 표정이 미묘한 걸 본 누나가 작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를 도와준 이가 영영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괜히 기분이 미묘했다.
“으휴. 가서 쉬기나 하자. 나 힘들다.”
하여튼 솔직하지 못하긴.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켜주려는 누나를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가서 쉬자.”
“안내해준다는 애는 어딨는거야? 정령이랬지? 좀 급이 높은 애려나? 계약해볼까?”
“그러려면 칼리아한테 허락부터 받아야지.”
“지금 자러 갔는데 언제 깰 줄 알고?”
나야 모르지. 내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자 누나가 찡찡거렸다. 누나 아니고 애새끼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새하얀 정령 하나가 포르르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와 씨발.”
새하얀 정령을 마주 본 누나가 감탄사를 뱉었다. 나도 말만 안 했지 상당히 놀란 심정이었다.
「제 이름은 코나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두 분!」
“상급 정령이잖아.”
그것도 최상급에 가까운, 얼음과 수정의 정령.
딱 봐도 옵시디안과 상성이 잘 맞을 것 같은, 누님이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정령이다.
도저히 찾기 힘들 것 같아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던 대상이 눈 앞에 나타나니 누나도 얼떨떨한 듯 했다.
그래도 인사를 받았는데 아무 대답도 없으면 자기 소개를 한 정령이 민망할 것 같아, 어버버 하고 있는 누나를 대신해 답해주었다.
“나는 스칼렛. 이쪽은 루나. 반갑다.”
「와! 저, 최상급 정령은 처음 뵈어요! 너무너무 기쁘다!」
상급 중에서도 제일 격 높은 정령쯤 되니 보자마자 내 정체를 알아차린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헉! 이거 손 잡아도 돼요? 진짜?」
“그럼.”
덥석. 조그마한 정령이 내 손을 붙잡고는 붕붕 흔들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입이 귀에 걸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여러분이 머무르실 곳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내 손을 조물딱 대던 코나가 뒤늦게 제 일을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고는 포르르 날아올랐다.
「따라오세요!」
“가자.”
옆에서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누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아잇! 아, 어, 응. 가자.”
이거 어떡해야 하냐.
옵시디안을 슬쩍 올려다 봤다. 거대한 도룡농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령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의 커다란 두 눈이 끔뻑였다.
…끄덕.
잇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고생이 많구나. 너도.
「여기에서 지내시면 돼요!」
깔끔한 바닥. 얼음이긴 하나, 미끄럽지도 않고, 표면이 까끌까끌 해 번쩍번쩍 빛을 반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실내라고 신경써두긴 했나보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침대.
애초에 드래곤이 침대 따위에서 잘 리가 없으니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며 부랴부랴 준비해둔 거겠지.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아공간에서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깔곤 아이리스를 눕혔다. 아무리 추위를 거의 안 타는 몸이라곤 해도 얼음 덩어리 침대 위에 눕히려니 좀 그랬다.
“음냐.”
잠버릇은 별로 안 좋군.
덮어주었던 이불을 발로 차는 걸 보곤 혀를 찼다. 지금까진 그냥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자서 몰랐는데.
「그럼 쉬고 계세요!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여기 여기, 이거에 마력을 넣어주시면 제가 바로 올게요!」
똑.
제 얼음 날개의 끄트머리를 부숴서 내게 건네준 코나가 손을 흔들며 숙소를 나갔다.
음.
“누나.”
“어어?”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계약할 거야?”
“…그, 아니, 음.”
아까는 큰 소리 치더니, 정작 눈 앞에 나타나니 말을 가린다.
하긴 보통 정령도 아니고, 최상급이나 다름 없는 상급 정령이다. 보아하니 이 넓은 영역에서 칼리아를 수행하는 정령은 코나 하나 뿐인 것 같고.
단순히 영역 내에서 살아가는 정령들과는 다르다. 곧 수명이 다 하는, 로드를 제외하면 가장 가진 바 영향력 있고 강력한 힘을 지닌 엘더급 드래곤을 수행하는 정령인 것이다.
아무리 대정령사인 누나라고 해도 대뜸 계약하자는 말을 꺼내긴 영 자신이 안 나는 듯 했다.
“아니. 나도 하고 싶기야 한데….”
이거 봐라.
나는 도룡뇽 모습을 한 거대한 정령을 올려다 봤다.
「구오옹….」
옵시디안이 낮게 울었다. 최상급 정령임에도, 계약자인 누나 말곤 의사소통이 안 되는 정령이라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약자인 누나의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좋은 내용은 아닌 듯 했다.
“야. 너무한다. 내가 지금 일부러 그러냐? 그냥, 각이 안 보이니까 그러지.”
투닥. 도룡뇽의 부드럽고 촉촉해 보이는 배를 누나가 팔꿈치로 꾹꾹 눌렀다.
「무오옹….」
한심하다는 듯 길게 이어지는 정령의 울음소리. 누나가 씩씩 거리면서도, 할 말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말했다.
“각이 없긴 왜 없어?”
“뭐?”
누나가 고개를 휙 든다.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 비슷한 게 보여서 좀 무서웠다. 내가 고개를 슬쩍 돌리자, 옵시디안 괴롭히기를 끝낸 누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멱살 잡힐 것 같아서 슬쩍 피하니까,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오빠!!!”
“이 씨발 미친년.”
어질어질하네.
“오빠. 무슨 각?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응?”
“와. 욕해도 모른 척 하네.”
슬금슬금 손을 뻗어 내 바지 밑단을 붙잡는다. 절이라도 할 기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설에도 아랑곳 않고 세상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근데 평소 반쯤 찌들어 버린 피폐 그 자체로 보이는 인간이 어울리지도 않게 착한 얼굴을 지으니 그 미묘한 언밸런스 때문에 더 무섭기만 했다.
“아 오빠아앙.”
“내가 무슨 오빠야 지랄하지마!”
소름 돋아.
“아 왜. 나보다 백년은 넘게 사랏짜나.”
혀 짧은 소리.
혀 짧게 만들어버릴까?
“아이이잉. 오빠앙.”
그때였다. ‘흐.’ 하고, 내 등 뒤에서 얕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뚝. 누나의 애걸이 멈췄다. 눈동자가 떨렸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라곤, 아이리스밖에 없었다.
“……야.”
누나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목소리는 살벌한데 얼굴은 수치심에 죽을 듯이 빨개져 있었다. 진짜 보고 있는데 절로 안쓰러워져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보니까 아이리스가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감고 실실 웃고 있었다.
“아냐. 쟤 자.”
“…진짜? 다 걸 수 있냐?”
“어. 다 걸고.”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누나가, 뻘쭘하게 나한테 무릎 꿇고 올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일어섰다.
“…그래서 무슨 방법인데?”
“뭐긴.”
코나가 세입자라면 집 주인은 칼리아였다. 그리고 칼리아는 당장 오늘내일 하는 노인네고.
“집주인부터 꼬셔야지.”
잠들어 있을 것 같긴 한데.
원래 그 나잇대쯤 되면 자는 거랑 깨어있는 거랑 별 차이 없는 법이다. 깨어있다가도 어느새 잠들어 있고, 잠들었다가도 눈을 슬쩍 뜨기도 하고.
“그 영감을 어떻게 꼬셔? 이제 곧 갈 양반이라 뇌물도 안 먹힐텐데.”
“곧 갈 양반이니까 꼬실 수 있는거지.”
원래 드래곤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때 자기 물건에 크게 미련이 없다. 코나는 물건이 아니긴 하지만.
“안 그래도 가는 길 편하게 가고 싶어하는 양반인데, 부탁 몇 개 들어주면 될 거야.”
주변 영역 정리 좀 해달라거나.
말썽부리는 어린 드래곤 예절 교육 같은 거.
아니면, 뭐, 다음 산맥의 주인한테 인수인계 도와주기.
그런 거.
“하나같이 존나 빡세 보이는데.”
원래 사흘 정도 쉬다 가려 했는데 더 걸릴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