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104화 (104/140)

EP.104 펠그리온 (4)

블랙 드래곤은 저주 받은 일족이라고 불린다.

질서 대신 혼란과 파괴만을 불러일으키며,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 주변을 오염시키는, 세계의 불순물.

그럼에도 모든 블랙의 일족이 경멸과 멸시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대륙이 하나가 되기 전, 아득한 옛날에, 한 왕국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블랙 드래곤이 있었다.

블랙 드래곤에게 혼돈은 하나의 본능이었다.

레드가 폭력적이고, 블루가 감성적이며, 골드가 탐욕적인 것과도 같이.

그런 본능조차 이겨내고, 왕국 만인의 존경을 받던 블랙 드래곤.

심지어 블랙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화이트와, 그 외의 여러 드래곤들 역시 벗으로 여겼던 별종.

신과 마의 대전쟁 이후 황폐해진 대륙이었기에, 오히려 대륙 곳곳에 남은 오염과 독기를 흡수한 블랙 드래곤의 수호 아래 왕국은 더욱 번영했다.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왕국이 되기도 했다. 마도는 발전했고, 기술은 나날이 진보했다.

언젠가, 수천년 씩이나 사라지지 않고서 대륙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모두 없애고 대륙을 통일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벌써 일만년도 훨씬 더 전의 이야기였다.

한때 존경 받던 수호신이, 사랑하는 아이에게 목숨과 심장을 빼앗기고, 어미의 모든 것을 강탈한 헤츨링이 어미가 수호하던 왕국을 멸망시켰으니.

수 많은 드래곤이 슬퍼했다. 감히 어미를 죽인 패륜아를 찾아내 벌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 헤츨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스칼렛과 루나는 알고 있다.

그 때의 헤츨링이 바로 늙은 흑룡, 펠그리온이라는 것을.

어미가 자신을 죽인 패륜아를 끝끝내 미워하는 대신, 건네준 비보. 혼돈 그 자체라 불리우는 블랙 드래곤을 상징하듯 뒤틀려 있는 모래 시계.

그것을 사용해 드래곤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그리고 그 대가로 급격하게 그 육신이 노화해버렸기에.

시간 섭리를 어긴 용은 그 날 이후 주기적으로 수백 수천의 생물을 포식해, 무너져가는 육신을 일으키고 생명력을 채워야했다.

이따금. 종종 동족포식까지도 벌여댔으니, 들키지 않은 것은 먼 옛적 펠그리온의 어미가 건네준 뒤틀린 모래시계의 덕이다.

그것이 바로 이 늙은 흑룡이 시간의 성물을 갖고자 하는 이유라는 것까지.

오직 이 대륙에서, 스칼렛과 루나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리스에게 말해주진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스스로의 쾌락을 위해 어미를 죽인 사악한 용의 이야기 따위 해주어도 좋을 게 없으니까.

심지어 그 어미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죽인 아이를 걱정했다는 것을, 뭐하러 얘기한단 말인가.

하지만.

“한 번만. 제게 맡겨주세요.”

아이리스가 나섰다. 엘더 드래곤이 올 때까지 방어만 하면 되니, 아이리스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섰다.

마치 눈 앞에서 독기를 줄줄 흘리는 흑룡이야말로, 자신의 숙적이라는 듯 당당하게 성검을 들고서.

그 모습이 마치 전설 속 사악한 용과 맞서 싸우는 용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바보 같아.”

투덜거리는 루나의 목소리. 그럼에도 말리지 않는다. 못 말린다는 듯 되려 픽 웃기까지 한 그녀는, 모든 보조술식을 아이리스에게 돌렸다.

“고마워요. 언니.”

빙긋 웃는 용사의 모습은 어딘가 와닿는 게 있어서, 스칼렛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갤 푹 숙였다.

“…진짜 이번에 될 거 같아?”

“네.”

확인차 묻는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스칼렛은 슬쩍 흑룡을 흘겨보았다. 날개가 찢어지고, 비행하며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다 상당한 데미지를 입어서인지 이쪽을 향해 성급히 달려들진 않았다.

“손.”

“네? 네….”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손이 웬 말이란 말인가? 싶다가도, 오빠가 괜한 소리를 할 리 없으니 순순히 손을 내주는 그녀였다.

마주 잡은 손.

천천히, 블랙 드래곤 펠그리온에 대한 정보가 아이리스에게 전해졌다.

“이건….”

불과 며칠 전 황궁에서 마력 패스를 연결했던 둘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기억들에 아이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펠그리온이 지금까지 수 없이 삼켜 온 생명의 숫자를 헤아릴수록, 용사는 성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더불어 스칼렛이 자신의 잔여 마력까지 상당히 덜어내어 아이리스에게 전달해준 뒤, 그는 지친 듯 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믿는다.”

이건 그에게 도박이었다. 아무리 용사라한들, 아직 그랜드 마스터는커녕 오러 마스터조차 한 발짝 모자란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파티의 명운을 건 것이니, 자칫 하면 전멸할 위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칼렛의 얼굴은 평안했다. 마력을 순식간에 뱉어내느라 안색이 피로함에 물든 것만 제외한다면.

그것이 굳건한 신뢰임을 아이리스는 알았다.

“…네!”

그러니, 아이리스 역시, 자신을 신뢰해준 두 사람에게, 결과로 보답하고자 했다.

화악─!

성검이 빛을 발했다. 웅혼하고도 신성한 오러였다.

「여신의 사냥개가,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녀가 홀로 검을 쥔 채 다가오자, 사태를 파악한 흑룡이 분노와 굴욕에 일그러진 얼굴로 짓씹듯 으르렁거렸다.

용사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담담히 입을 열었다.

“거악(巨惡)에게 묻노라.”

「뭐라?」

이것은 하나의 심판.

세계의 질서를 일그러뜨린 악을, 질서의 진정한 수호자이자, 대륙의 구원자로 언젠가 여신에게 선택 받은 용사의 과업.

“그대는 떳떳한가?”

블랙 드래곤은 답하지 않았다. 이 문답이 의미가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여, 독기를 뿌리며 용사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런가.”

아이리스는 성검을 치켜들었다. 다가오는 발톱을 향해, 그대로 내려친다.

아르카디아 제국칠검.

제 일검(第 一劍) 구름 베기.

카─그그그그그극!

성검과 용의 발톱이 맞부딪쳤다. 거대한 용에 비해 한 없이 작고 나약해 보이는 인간의 육신이 밀려나지 않고서, 발톱과 합을 겨루었다.

「미개한 것이…!」

결과에 경악한 것은 펠그리온이었다. 이 작은 여신의 사냥개가,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그 결과를 이끌어낸 아이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전신에서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스칼렛이 전해준 힘이기도 했으며.

「너는 내가 택한 용사다.」

악(惡)을 단죄할 때, 비로소 진정 진가를 발휘하는, 선택 받은 성검의 주인.

여신의 총애가, 전신에 가득 차 있었다.

「태양의 여신인 이 내가, 너를 나의 용사로 택했다는 것이란다.」

여신의 다정한 목소리.

하지만 아이리스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는, 용사가 아니어도 여기 섰을 거예요.’

「그러니?」

당돌한 대답에도 여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아이리스는 속으로 말을 이었다.

‘이길 수 없을 것 같아도, 설령 여기서 부러진다해도, 저는 싸웠을 거예요. 그 땐 지금처럼 혼자 나서진 않았겠지만.’

「어째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여신의 은근한 목소리에 아이리스는 단호히 답했다.

“그것이 올바른 일이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흑룡이 포효했다. 산맥이 울리는 피어. 가진 마력을 거의 다 쓴 스칼렛과 루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흑룡의 입에서 불꽃이 끓었다. 저주를 품은 흑염. 다시 한 번 브레스가 쏘아지려 했다.

그때였다.

「그래.」

여신이, 무척 대견하다는 듯 아이리스에게 속삭였다.

「올바르다 믿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자. 그렇기에 아이리스, 네가 나의 용사인 것이란다.」

성검의 빛이 한층 더 찬란해졌다. 성검에 피어오른 찬란하고도 아득한 빛이 꺼질 줄 몰랐다.

마치 세상을 밝히는 태양과도 같이.

「그런 의미에서 네가 사모하는 남자는, 용사라고 부르기엔 자질이 모자랐단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여신이 작게 웃었다. 성검을 쥔 아이리스의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적어도 용사라는 자리만큼은, 네가 저 남자보다 더 어울린다는 뜻이야.」

두 손에 하나의 태양을 들고서, 번쩍 치켜들고는.

끓어오르는 독기의 불꽃을 향해서.

“단 죄───!!”

내리친다.

*

────.

거대한 힘의 충돌. 처음에는 빛을 불사르듯 보이던 검은 불꽃이, 이윽고 한층 힘을 키운 빛의 기둥에 되려 잡아먹힌 뒤.

아이리스는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아른거리는 듯 한 느낌에 성검을 고쳐잡았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벽이 허물어지는 듯 한 느낌이 가슴을 간질거렸다.

잠시 뒤.

푸화악!

힘의 충돌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했던 흙먼지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육신을 반절 넘게 줄여 겨우 제 몸을 유지한 블랙 드래곤이 튀어나왔다.

방금의 일격에서 상당한 생명력의 손실이 있었는지, 거의 엘더급에 달하던 격이 보통의 성체급 드래곤 수준으로 격하된 상태였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년…!」

으르렁 거리는 블랙 드래곤은, 힘겹게 수복한 육신임에도 군데군데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두 눈이 흑룡에게 닿았다.

….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성검을 고쳐쥐고, 다시 한 발자국.

「감히 나를 우습게 봐──!!」

포효하며 내지르는 손톱을 흘리고.

「여신의 사냥개가!」

브레스는 여전히 막강한 신성력을 줄기줄기 뱉어내는 성검으로 막아내고서.

「하찮은 인간 계집애 따위에게…!!」

저주. 독 마법 따위는 신성력으로 해주. 혹은 마력탄 따위를 하나하나 쳐내고.

하염 없이.

스스로 휘두르는 검에 조금씩 빠져가면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음 순간.

“…?”

아이리스는 세상에 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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