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101화 (101/140)

EP.101 펠그리온 (1)

워프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우리에게 경비병이 다가왔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제시해주십시오.”

무척 겸손한 태도였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평범한 모험가처럼 옷을 입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아이리스는 용사였고, 나는 최초의 진조 이후 처음 탄생한 진조였다.

게다가 누나조차 최상위 정령 옵시디안이 영체로 누나의 주변을 감싸 지키고 있으니.

일개 경비병이 우리에게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웃으며 아공간에서 백금으로 만들어진 패(牌)를 꺼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신분인지는 보여주되,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리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물건이었다.

왜, 동패 모험가라든가, 은패 용병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보통 동색은 일반 용병과 모험가들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은색은 개중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는 이들, 혹은 기사 견습들이 사용하는 물건.

금색은 기사와 귀족들이 주로 사용한다. 아니면 용병 중에서도 A랭크 이상 판정을 받았거나.

백금은 보통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 사용하는 종류인데. 내가 꺼낸 백금패를 본 경비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위 귀족을 귀찮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겁 먹은 듯 하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백금패를 다시 집어넣었다.

“겁 먹지 않아도 되니 이만 물러가도록.”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누나가 턱짓 하자 경비병이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내가 일행을 이끄는 듯 앞장 서 있으니, 누나의 말만 듣고 물러갔다가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봐 걱정하는 듯 했다.

뭐, 여기까지 와서 경비병이랑 실랑이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살았다는 듯 후다닥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와. 저 이런 거 처음이에요.”

“뭐가?”

“신분증 검사요!”

아이리스는 신난 기색이었다. 하긴, 지금이야 모험가 같은 복장을 하곤 있지만, 평소에 아이리스가 이런 옷을 입은 적이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호위를 안 데리고 다녔을 리도 없고. 어디 나간다 하면 곳곳에서 ‘황녀님이 납신댄다──!!’ 하고 소문을 냈을테니.

이런 경험은 또 색다르겠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그녀를 보니 다행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산맥의 입구에 위치한 모험가들의 도시, 라비타에 입성하게 되었다.

“저, 그럼 이제 모험 하는 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러 가는 건가요?”

신이 난 듯 아이리스가 두 눈을 빛냈다.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아니.”

“왜요? 아무 준비도 없이 모험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책에 적혀있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본 아이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지간한 건 다 아공간에 넣어두고 왔잖아.”

“아.”

그리고 이어지는 내 말에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너무 들뜬 나머지 그건 생각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시무룩해 하니 놀리는 건 그만 둘까.

“그래도 사야할 게 없진 않으니까.”

“뭔데요…?”

나는 답했다.

“사람.”

움찔.

잠시 멈췄던 아이리스가 나를 게슴츠레 노려봤다.

“저 놀리는 거죠?”

“아닌데?”

그때였다. 우리 둘의 그런 실랑이를 지켜보던 누나가 조용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린 게 아닌가. 하기사 누나는 나와 함께 10년 넘게 대륙 곳곳을 다녔던 베테랑이었다. 아이리스가 귀엽고도 우습게 보일만도 했다.

“왜, 왜 웃어요?”

아이리스는 얼굴이 발개졌다. 자기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웃으니 뭔가 부끄러운 짓이라도 해버렸나 하고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을 왜 사긴요. 길잡이가 필요하니까 사죠.”

“…딱히 위험한 마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길잡이를요?”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거다. 아이리스가 누나를 사이비 보듯 본다. 누나는 그 시선에 아랑곳 않고 ‘흥흥’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가르쳐준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그 태도와 자세, 표정에서 그런 의도가 묻어나오는 듯 했다. 아이리스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오히려 ‘용의 산맥’이니까 길잡이가 있죠. 위험한 마물은 없는 대신 그 지형이 무척 험난하고 복잡하니, 길잡이가 일하기에 이만한 곳이 또 어딨겠어요?”

그랬다.

대륙에서 가장 험난한 산맥으로 알려진 용의 산맥. 어중간한 이가 아무 것도 모른 채 들어갔다간 산맥에 갇혀 죽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 그득하게 쌓인 영약과 영초, 영물 따위를 생각하면 산맥 내부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많았다.

결국 그런 수요로부터, 전문적인 ‘길잡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목표야 산맥을 넘어가는 거지만, 다른 모험가들은 산맥 내부를 수색하는 게 목적이지 않은가? 그런 이들에게 산맥 내부 지리를 잘 파악하는 길잡이는 필수였다.

이런 설명에 아이리스의 고개가 다시 기울어졌다.

“그럼 우리는 길잡이가 필요 없는 게 맞지 않아요?”

아무리 산맥이 험난하다한들 단순히 돌파가 목적이라면 아이리스의 말도 틀리진 않지만.

“말했잖아. 용 잡아야 한다고.”

정확히는, 나중에 마왕한테 전향하는 드래곤이 하나 있다.

이미 지금쯤 마왕과 접촉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마왕이 강림하자마자 전향해서 동족들을 죽인 걸 보면, 마왕이 강림하기 전부터 계획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왕이 강림하자마자 줄을 바꿔탄 것이거나.

어느 쪽이건 지금 잡아 죽여야 했다.

블랙 드래곤, 펠그리온을.

“지, 진짜 드래곤을 잡는다구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길잡이가 필요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다른 드래곤의 영역에 들어가는 일 없이 피하고, 놈의 레어에 도달해야 했기에.

물론 길잡이라고 어느 곳에 블랙드래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드래곤의 영역’인 곳들은 모두 외우고 있을 것이다. 길잡이를 데리고 드래곤의 영역을 하나씩 찾아가다 보면 펠그리온의 레어를 찾을 수도 있겠지.

아이리스는 드래곤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겁에 질린 듯 하더니, 놈이 마왕의 편이라고 설명하니 마음을 다잡곤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로운 용사님이라니까.

우리 일행은 모험가 길드를 찾았다. 모험가의 영향력이 꽤 큰 도시여서인지 길드의 크기도 꽤 커다랬다.

딸랑.

문이 열리며 울린 방울소리에 길드 내부에 죽치고 앉아있던 모험가들의 시선이 순간 쏠렸다.

“야. 저기 봐.”

“엉? 뭐를. …오.”

수군대는 목소리. 썩 거슬리긴 했으나 놔두기로 했다. 실제로 이쪽에 확 모였던 시선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계속 보기에는, 누나도 아이리스도, 보는 사람이 오히려 부담을 느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아우라를 풍겨댔으니까.

카운터로 다가가자 긴장한 안색의 직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 어쩐 일로 오셨나요?”

“산맥 안쪽 깊이 들어갈 실버 이상의 길잡이.”

대부분의 길잡이는 브론즈다. 산맥의 지리를 외울지언정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또 개인의 무력을 기르지도 않는, 거의 약초꾼과 비슷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실버 이상의 길잡이는 그렇기에 흔치 않다. 일신의 무력이 상당함에도 길잡이를 하는 이들은 그만한 사정이 있거나, 별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들은 직원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 실버 등급 이상의 길잡이는 당장 구하기 어렵습니다만….”

쿵.

아공간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직원의 눈은 물론, 뒤에서 이쪽을 은근히 훔쳐보던 이들이 숨을 삼켰다.

“저거 다 백금화 아냐…?!”

“저게 다 얼마냐 씨발…! 저거면 평생은 먹고 살겠는데?”

“니가 일주일 안에 도박으로 다 털린다에 내 부랄 왼쪽 건다.”

“이 씹새끼…. ……나를 너무 잘 알아 너는!”

뒤가 시끄럽다. 아무튼 그 정도로 큰 액수를 보수로 내놨다. 수도만 아니라면 대륙 어딜 가서도 널찍한 저택을 짓고 남은 여생 정도는 편히 살다 갈 수 있을 정도로.

대개 용병들은 한 번 의뢰를 수락한 다음에라면 모를까, 수락하기 전에는 의뢰자를 갑으로 대하지 않았다. 의뢰 과정에서 좆같이 군다 싶으면 의뢰를 받지 않고 돌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 수락하고 나면 극진히 고객으로 모신다지만.

하지만 그것도 금액이 일정 수준 이하일 경우의 얘기다.

이만한 금액이라면, 상대가 골드 등급이어도 내가 갑이었다. 누구든 원하는대로 지명할 수 있을 정도다.

당연히 직원이 다급히 윗사람에게 콜을 날렸다.

“그, 조,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부장님께서….”

“일 없다. 실버 등급. 길잡이. 내일 이 시간까지 구해놔. 의뢰를 잘 완수하면 두 배를 더 줄테니.”

굳이 지부장을 만날 생각은 없어서, 주머니를 다시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큰 액수에 숨을 삼켰던 이들이 그제야 아공간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다시 한 번 기함했다.

“저거 아공간이냐? 아티펙트도 아니고 마법?”

“아공간을 마법으로 부리는 마법사라고? 씨발, 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네.”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