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 용의 산맥 (3)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자기가 물어봐놓고 뭐가 그리 수치스러운지, 먹으라는 엘릭서는 안 먹고 제 입술을 잘근 씹어댄다.
“됐으니 아 해.”
“…씨.”
내가 덤덤하게 타박하자, 입술을 비죽 내민다. 이대로 못 들었다는 듯 무시하고 넘어갔다간 분명 삐질테니, 나는 속에 묻어뒀던 말을 꺼냈다.
“몸도 안 좋은 주제에 남한테 줄 게 어딨냐.”
“아니, 뭐, 누가 준댔냐…? 나도 뭐 그냥 얘기해본 거거든? 줄 생각 없었거든?”
“예에.”
그러니 얼른 건강해지게 이거나 먹어.
말하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좀, 묘해져서. 턱을 엄지 손가락으로 붙잡고 꾹 눌러 살짝 입술을 벌리곤 엘릭서 병을 살짝 기울였다.
“읍.”
조잘조잘. 내 말에 뭐가 그리 반박이 하고 싶은지 떠들던 입이 막힌 누나가 나를 노려봤다. 꼴깍, 꼴깍. 잘도 넘어가는 엘릭서를 모두 비운 뒤 다리를 확인했다.
치이익….
아까보다도 훨씬 나아진 상태. 이 상태면 원액 하나를 더 비우면 거의 해주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상한 기력도 회복시킬 겸 ‘최초’를 꺼냈다.
“야. 그거 줘봐.”
“왜.”
“아. 내가 마실 수 있으니까 줘봐 좀.”
고집 부리기는.
그래도 직접 마실 수 있다는 말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리만 불편한지 나머지는 멀쩡한데 직접 엘릭서병을 기울여서 먹여준 내 행동이 지금 와 생각해보니 좀 푼수 같기도 했다.
아니 뭐.
사람이 걱정되고 그러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누나에게 ‘최초’를 건네주자, 고급스럽게 장식 된 병을 받아든 누나가 마개를 따기 위해.
위해.
….
“…따줘.”
하여간에.
나는 누나가 다시 돌려준 병을 들곤 마개를 제거했다. 찰랑거리는 ‘최초’의 향기가 확 풍겼다. 방금 누나에게 먹였던 희석 되지 않은 엘릭서의 원액조차 그 값어치가 어마어마한데도,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엘릭서 원액은 내 손바닥만한 병이었던 반면, ‘최초’는 겨우 내 손가락만한 병인데도.
그것을 누나에게 다시 내밀어주자, 누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병을 들었다.
“이거 진짜 내가 먹어도 돼?”
“그럼 누가 먹는데.”
“네가 먹는다던가.”
“됐어.”
한 마디로 일축하자, 불만스러운 얼굴로 누나가 나를 흘겨보았다. 뭐가 그리 불만일까 싶어,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앉았던 몸을 누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옮겼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아니. 이거 존나 귀한 거잖아.”
“그런데?”
….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찾고 있는지 입술이 잠시 달싹였다.
“그럼 반반 나눠 먹어. 그것만 해도 저주는 해주 될 거 같으니까.”
그냥 혼자 다 먹으라고 하려다, 이것만큼은 양보해주지 않겠다는 듯 나를 노려보는 눈길에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간 아예 끝이 안 날 것 같았으니까. 아이리스가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나는 아까 누나가 마셔서 비어버린 엘릭서 병에, ‘최초’의 3할 가량을 따랐다.
“야. 이거 반 아니잖아.”
눈치 빠르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어, 결국 나머지 반을 맞춰 나눴다.
“마신다.”
“그래.”
이렇게까지 해줬으니까 이제 불만 없겠지.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확실히 ‘최초’쯤 되면, 내게 도움이 크게 되면 됐지 나쁠 건 없으니.
어쩌면 바알의 저주 때문에 영구적으로 잃었던 스탯을 전부는 아니어도 되찾게 될 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시 먹으니 괜히 기분이 들뜨기 시작해서, 나는 ‘최초’를 들이켰다.
향기로운 액체가 내 목을 넘어간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시듯 식도에서부터 뜨거운 열덩어리가 내 목을 적시듯 끈적하게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술 따위의 그것과는 달리, 지금 내 목구멍을 넘어간 이 열덩어리가 한때 천사가 주조한 축복덩어리 그 자체임을.
“윽.”
화악.
온몸을 휘감는 열감. ‘진조’의 몸이라 그런지, ‘최초’의 효능이 금세 보이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과, 온 몸을 쿵쿵 부술 듯 돌아다니는 축복.
마치 우연찮게 영약이라도 먹게 된 삼류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확 확 내 안에서 치솟는 열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아프냐?”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귀 옆에서 속닥대는 누나였다.
나도 지금 온 몸이 욱신거리는데, 저주 때문에 몸도 약해진 이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드는 순간.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안 먹고 뭐 하는──.”
쪽.
촉촉한 입술. 아까 마셨던 엘릭서인지,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확 풍겼다. 말캉거리기도 했다. 순간 아득할 정도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던 사고에 내 몸이 굳어있던 사이.
츕.
입술이 벌려지고, 그 틈으로 뜨거운 열이 넘어온다.
아.
이 시발. 미친년.
먹으라고 준 걸 나한테 다 넘기네.
그게 내 마지막 생각이었다.
미친 듯이 내 몸을 휘감는 열감에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
쿵.
쿵, 쿵, 쿵….
미친 듯이 떨리는 심장을 부여 잡은 채, 루나 테일러는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그녀는 생각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라고.
그런데 누가?
…일단 그녀 자신은 아니었으므로, 미친 새끼는 당연히 눈 앞의, 영혼을 나눈 동생이 될 것이다.
그녀는 결백했다.
그도 그럴것이, 세상 어느 누가 ‘최초’ 씩이나 되는 물건을 낼름 받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일곱 날개의 자비’와 엘릭서 원액까지도 하나씩 받아놓고.
그 정도로 루나 테일러는 양심 없지 않았다. 그러니, 뻔뻔하게도, 누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려고 수작 부리는 동생에게 되돌려준 것 뿐이다.
그, 방법이 조금 과격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안 받을테니까?
그러게 누가 나 믿으래?
루나 테일러의 사고방식은 꽤나 뻔뻔했다. 원래 그런 것이라기보단, 흔들린 멘탈을 억지로 부여잡기 위한 자기방어였다.
비록 동생은 기억을 잃었다지만, 그녀에겐 동생과 함께 한 10년의 기억이 있다.
그간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결전의 날에서까지.
그녀의 동생은 어쩌면 죽었어야 할 그녀를 구하고 대신 그 업을 짊어졌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죽지 않고 기억과 힘을 잃은 정도로 끝나긴 했지만. 루나는 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잊어서는 안 됐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는 그 때의 일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동생에게 사과해봤자 의미가 없으니, 기억을 되찾으면 제대로 사과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미친 동생이 자꾸 자신에게 빚을 지워두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래서 조금, 과격하게? 돌려준 것 뿐이니까?
이걸로 옥신각신 하다가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리스에게 미안하니까?
“…. 존나 나쁜 새끼.”
생각하니까 또 화가 치밀었다. 아이리스? 아이리스가 여기 왜 와? 왜?
아니. 이해는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화를 내지 않는 건 별개니까?
루나는 화가 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여자 저 여자 후리고 다니는 후레자식인데, 내가 빚 좀 졌다고 꼭 갚을 필요가 있는 걸까? 내가 눈 감아주는 것만으로도 이 새끼는 나한테 고마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녀와 동생 사이에 어떤 명확한 관계의 고리라곤, 전생의 남매였다는 사실밖에, 정확히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이란 세월간 같이 대륙을 누비며 어지간한 건 다 해보지 않았나.
성적인 행위는 없었더라도, 10년이나 같이 모험 따위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시츄에이션이 있기 마련이다.
함께 잠 잘 자리를 만들고, 식사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별자리를 찾거나, 씻으러 갔다가 의도치 않게 마주친다거나.
그런 것들.
그런 10년의 경험이 쌓여있다면, 그건 딱히 말로 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특별한 관계인 게 지당하지 않나?
…라고.
루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랬는데.
“나는 편지 한 통 없길래 걱정했더니. 뭐? 레티시아를 꼬셔?”
자기 대신 저주에 당한 뒤 연락이 뚝 끊겨 걱정으로 끙끙 앓았던 루나는 그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한 소리 하려 했더니 ‘천칭의 시련’ 때문에 눈 감고 넘어가야 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여자가 더 있댄다.
아주 죽일놈이었다.
죽일까?
…그렇게 생각해도, 결국 루나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손을 뻗어, 의식을 잃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동생의 뺨을 쓰다듬었다.
진짜 나쁜 놈.
그리고 나는 미친년.
“…가서 아이리스 좀 불러줄래?”
루나는 제 옆에서 둥실둥실 떠 있던 바람의 하급정령에게 옆 방에 있을 아이리스를 불렀다.
아무래도 혼자 여기서 동생을 계속 보고 있었다간, 계속 궁상을 떨거나 아니면 사고를 치거나 할 것 같아서였다.
궁상이라면 아까까지 하던 짓을 반복하는 것이고.
사고를 친다는 건.
….
순간 머릿속으로 상상해버린 루나가, 침을 꼴딱 삼켰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목이 말랐다. 뭐 마실 게 없나, 둘러보던 그녀가 동생이 챙겨온 나머지 엘릭서를 발견했다.
원래라면 ‘최초’를 먹고 완전히 해주하고 약해진 몸도 회복했을 것이나, ‘최초’는 이미 동생에게 먹인 뒤였다.
그럼 이건 내가 먹어도 되겠지.
조심스럽게 엘릭서를 들었다.
목이 바짝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