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97화 (97/140)

EP.97 용의 산맥 (2)

눈가가 살짝 붉어진 아이리스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나를 보는 누나의 눈길이 게슴츠레 해졌다.

‘뭐 하 다 왔 냐.’

입을 뻐끔거리며 묻는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표정이 일그러진다.

‘고개 끄덕이지 말고 뭐하다 왔냐고.’

“아이리스. 좀 쉬고 있을래?”

“으응.”

누나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고 아이리스에게 말을 걸자, 아이리스가 칭얼거리며 내게 머리를 부볐다. 부비적, 은빛 머리칼이 사르르, 내 품을 간질거린다. 절로 손을 뻗어 살살 쓰다듬고 있으니.

“….”

아주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금방 손을 떼고 말았다.

“누나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알았어요.”

겨우 이 정도 설득만으로 들어주는 아이리스의 착한 심성이 엿보였다. 등을 토닥여주니, 가만 있다 내 품에 한 번 꼬옥 안기고는 떨어졌다.

“얘기 다 하면 부르셔요.”

그렇게 말하고선,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총총 다가온 정령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착하네.”

“착하지.”

“너는 나쁜 새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 한 마디 하고 싶어지다가도,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괜히 한 마디 꺼냈다가 그게 열 마디 되는 게 순식간이니까.

“다리는 좀 어때.”

“어떻기는. 똑같지.”

“보여줘봐.”

“보긴 뭘 보냐. …아니, 야. 오지 마.”

가까이 다가서자 누나가 팔을 휘젓는다. 계약자의 의지에 따라 소정령들이 누나를 둘러싸고 나를 향해 으르렁 댔다.

나름 상급에 가까운 중급 정령들부턴 오히려 살짝씩 물러나 있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신뢰에서인지, 아니면 그저 정령 특유의 직감으로 내가 누나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게 고위 정령들이 빠지고 아기자기한 군소정령들이 누나를 에워싼 채 내게 크릉 크릉 하고 있으니 무섭긴커녕 귀엽기만 했다.

“아니, 야. 오지 말라구. 야!”

다급해 하는 누나를 보는 것도 재밌고.

나는 히죽 웃었다. 품위 없는 웃음인데도, 이상하게 누나 앞에서는 전생의 성격이 자꾸만 나오곤 했다.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그래.”

슬슬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댄 누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울상을 지었다.

“야. 진짜….”

화악!

꽁꽁 싸맨 이불을 빼앗았다. 붕대처럼 감아뒀던 이불을 치우니 드러나는 다리. 삐쩍 마른 채, 질척하고 더러운 마기가 다리에 들러붙어 꿈틀대고 있었다.

“…보지말라구.”

침울해진 얼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미 본 건데 뭐.”

이럴까봐 일부러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굴었다. 되려 진지하게 ‘다리 많이 안 좋아? 나한테 좀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평소답지 않게 굴었다면 누나는 더 속상했을테니까.

그래도 내 덤덤한 태도에 좀 나은지, 울상이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왜 보자구 한 건데. 뭐, 치료제라도 가져왔어?”

“어.”

“…진짜?”

누나의 표정이 바뀐다. 그야 마왕의 저주다. 아예 직격이었어서 소멸할 뻔 했던 나와는 달리 빗겨 맞은 정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영약과 축복으론 치료는커녕 약간의 중화조차 어렵다.

지금까지 저주가 더 번지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누나가 계약한 최상급 정령 옵시디안의 저력이 발휘한 덕분이겠지.

그러니 치료제가 있단 말에 누나가 기대를 감추지 못한다.

“뭐, 뭔데?”

“엘릭서.”

“뭐? 아니. 야. 엘릭서는 진즉….”

“‘최초’ 한 병. 원액 두 병”

“…진즉….”

“‘일곱 날개의 자비’도.”

엘릭서란 단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던 누나의 표정이 다시 반전했다. 기대와 실망, 다시 한 번 기대로 바뀌는 모습들이 썩 볼만 했다.

“그, 그걸 어떻게 가져왔어?”

놀랄 만도 하다. 시중에 풀린 레시피로 만들어진 엘릭서조차, 레시피를 통해 만든 다음 잔뜩 희석시킨 물건임에도 ‘신이 내린 자비’니 ‘천사의 손길’이니 하며 만능치료제 취급을 받고 있는데.

그 중 희석되지 않은 원액 두 병에다.

딱 대륙 전체에 스무 병만 존재하는, 진짜로 천사가 직접 제조한 ‘최초의 엘릭서’를 들고 왔다고 하니.

원액 두 병은 황궁에서 챙긴 거고 ‘최초’는 우리 가문 비고에 있던 걸 꺼내왔다.

여기까지만 해도 누나의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곱 날개의 자비’ 역시 그런 엘릭서 못지 않은 보물.

딱 일곱 번. 어떤 저주든 상관 없이 해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 지팡이라면, 누나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는 단점과, 지팡이가 부리는 권능 이상의 랭크를 지닌 저주는 완전 해주가 불가하다는 것도 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챙겨온 엘릭서도 있으니.

“저주. 해주하자.”

“어, 어어. …괜찮은 거야?”

‘일곱 날개의 자비’를 든 내 손목을 누나가 붙잡았다. ‘왜?’ 하고 물으니, 우물쭈물.

“…나한테만 그렇게 써도. 너는?”

아. 그렇군. 놈의 권능에 직격한 건 정작 너일텐데 어째서 자기가 이런 것들을 다 받느냐는, 뭐 그런 건가?

나는 다시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그럼 남은 건 내가 먹지 뭐.”

“야. 아니. 잠깐만.”

뭐래.

말리려고 해봤자 소용 없다.

누나가 선택한 동생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아니. 선택한 건 아닌가? 뭐 어때.

「어린 양에게 자비를.」

간단한 시동어.

내 몸을 가득 채우던 막대한 마력이 단숨에 빨려나간다.

동시에 지팡이 끝에 달린 날개가 하나 하나 펴진다. 이미 두 번은 사용되었는지 다섯 장밖에 남지 않은 날개들이 활짝 펴지고, 환한 빛을 뿌린다.

신성하고도 찬란한 빛무리. 마치 성검이 발하는 빛과도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고 악을 멸하는 빛이, 누나의 다리에 닿는다.

톡. 톡, 톡.

마치 빗소리 같이.

톡톡 튀기며, 누나의 다리에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거 느낌 좀 이상, ──으큭.”

어색한 얼굴로 다리를 내려다보던 누나가, 이윽고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뒤틀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노골적인 이유가 나타났다.

치이이이익──!

다리에 들러붙었던 마기가, 맹렬하게 타오르듯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이다.

“윽, 아윽….”

누나는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예 이불을 앙 물었다. 이 와중에도 내 앞에서 엉엉 울긴 싫은가보지. 하여간 고집은.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울고 있는 누나를 달래주고 싶어도, 실시간으로 내 마력이 빨려나가고 있으니 그러기가 힘들었다.

요즘 들어 마력이 바닥날 정도로 혹사하는 일이 좀 잦은 것 같은데.

“아윽. 으극. 윽.”

뿌득. 침대보를 쥐어뜯는 손길에 간단히 찢어진다. 고통스러워 하는 누나를 정령들이 빙글빙글 돌며 걱정스레 내려다본다. 그래도 내가 하는 게 치료라는 걸 알았는지 나를 방해하진 않았다.

“많이 아파?”

이렇게 아파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자연스레 내 목소리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무리 평소에는 원수처럼 티격태격 하는 사이여도 이럴 땐 걱정이 되는 법이다.

“말, 끄으으으으윽. 걸지마, 흑! 시발…!”

나는 얌전히 지팡이를 들었다.

치이이이이익─.

맹렬히 타오르던 기세도 몇 분 지나니 가라앉았다. 다리 전체를 감싸던 저주가 어느덧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다만.

툭, 툭….

날개들이 하나씩 접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두 접힌 날개 중 하나가 뚝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네 번이란 뜻. 나는 지팡이를 미련 없이 아공간에 넣었다. 한 저주에 여러 번 사용은 효과가 없었다.

대신 챙겨온 ‘최초’를 들었다.

“이거 먹자.”

병마개를 따려 하자, 떨리는 손이 내 손목을 탁 잡았다.

“원액, 원액으로 줘 새끼야….”

“왜? 이게 효과 더 좋아.”

“달라면 좀. 줘. 나 아프니까.”

울상으로 그렇게 말하니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최초’는 다시 집어넣고, 원액을 꺼내 마개를 따주자, 떨리는 손을 뻗어온다.

그러다 괜히 흘릴 것 같아서, 나는 누나의 옆으로 가 앉았다.

“기대.”

“뭐…?”

“등 편하게 기대고 고개 젖혀.”

“아니. 뭐….”

말을 안 듣길래 그림자로 누나를 뒤로 당기고, 팔로 살짝 받치곤 목을 위로 젖히게 했다.

“아 해.”

“너 뭐 하냐….”

저주는 거의 해주했지만 그 과정에서 한층 퀭 해진 누나의 얼굴이 가깝게 보였다.

창백하다 못해 시체 같은 피부. 나같이 흡혈귀도 아니면서 왜 이런대. 거기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다크 써클까지. 거기에 느슨하게 걸친 얇은 옷 너머로 보이는 메마른 몸.

아주 골방에 박힌 환자 꼴이다.

“아 해.”

“아 씨….”

다시 입을 벌리라며 재촉하자, 그제야 쪽팔린다는 듯 고개를 살살 흔들더니, 나를 샐쭉 노려다보곤 ‘아….’ 하고 입을 벌린다.

천천히 병을 기울여서 입술을 적신다.

“음….”

“천천히 마셔.”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흘리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셈 치고, 누나에게 천천히 엘릭서를 먹였다.

“옳지.”

꼴깍, 꼴깍….

어린애를 어르듯 옳지, 착하다, 그런 말들을 반복하며 엘릭서를 먹인다. 누나는 나를 노려보면서도, 엘릭서는 또 순순히 받아먹는다. 꼴깍. 소리가 날 때마다 하얗고 마른 목이 울렁였다.

내 눈이 잠시 그 하얀 목에 머물렀음을 느꼈는지, 엘릭서를 삼키는 동안 잠깐 병을 떼었더니 입가를 슥 닦은 누님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미친놈. 그와중에 내 목이 그렇게 탐스럽디? 누가 너 흡혈귀 아니래?”

“그러게.”

내가 순순히 긍정하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누나였다.

….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내가 다시 엘릭서를 먹이기 위해 병을 든 순간이었다.

“…피 먹고싶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