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용의 산맥
출발하기 전 누님과 데이지, 크리스티나, 그리고 안나에게 편지를 써 보내뒀다. 당분간 연락도 힘들어질테니.
그나마 그림자를 통한다면 누님과는 연락이 닿기는 할테지만. 누님에게는 편지로 부탁한 일이 있으니, 누님도 아마 바빠져서 제대로 연락하기 힘들 것이다.
“준비는 다 했어?”
“네에.”
끄덕끄덕.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우리는 황궁을 나섰다.
조용히 떠나기로 하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간 난리가 날 테니 황제에겐 미리 얘기해뒀다.
“…다녀오겠습니다.”
화려한 옷 대신, 여행을 위해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리스가 문 밖에 나서 황궁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가자.’ 숙였던 허리가 올라왔다.
“워프 게이트로 갈 거죠?”
“그래야지. 우리가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여행 가는 기분을 좀 살려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며 아이리스가 웃었다. 나도 픽 웃었다.
노숙도 해본 적 없는 애가 겁도 없는 소리를 하네.
“너 워프 게이트 없이 움직이면 사흘 안에 징징 울걸.”
“아, 아니거든요?”
“너 용의 산맥 넘어갈 때 어떨지 두고본다?”
“그, 그러든가요!”
실 없이 투닥거리며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뭐, 그녀의 말대로 워프 게이트를 쓰고, 온갖 편의 물품과 식량을 아공간에 담은 시점에서 모험이나 탐험 따위의 것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지만.
그것도 용의 산맥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얘기일 뿐. 아마 그곳을 넘어가는 순간 진짜 의미에서의 모험이 우리를 반기겠지.
나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거기 넘어가면 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
“피, 피요? …안 되는 건 아닌데.”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야릇한 상상이라도 하나본데.
아무튼간 어린애가 발랑까져가지곤.
그래도 뭐.
이런 투닥거림도 나쁘지 않았다.
때마침 이른 새벽, 떠오르는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여행자를 반기는 듯 환한 태양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썩 들뜨는 듯 했다.
아이리스한테서 옮았나.
*
워프 게이트를 통해 테일러 영지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 없는 모습. 그나마, 일전엔 누나 옆에만 붙어있던 정령들이 하나둘 거리를 돌아다니며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준다던가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와, 와아.”
“놀랐어?”
“네. 사람 사는 도시에서 정령들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시골이라 그런가?”
얘는 또 듣는 시골 사람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그래도 놀란 심정은 이해가 갔다. 세상 어느 정령이 사람 사는 도시의 논밭을 풍요롭게 해주고, 대장장이의 화로의 불을 피워주고, 선선한 바람을 불게 해준단 말인가?
“다 이유가 있지.”
“뭔데요? 오빠가 데리러 간다는, 그 파티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아이리스는 완전히 설렌 기색이 돼서, 지금부터 만날 정령사가 어떤 사람일지 잔뜩 기대를 품은 듯 했다.
하긴 이 정도로 많은 수의 정령을, 그것도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에 고분고분 따르게 만들 정도로 부리는 정령사는 많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 수준의 정령사는 모두 어디 산골짜기나 협곡 같은 곳에서 은거한 채 도 닦는 노인네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많지 않다 못해 유일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실제론 정령왕급 최상위 정령과 계약하기도 했으니.
“어, 어떤 사람이에요? 이 정도로 많은 정령을 부리는 걸 보면 엄청난 분인 거 같은데.”
수 많은 정령과 교감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아니면 할머니?
조잘조잘 옆에서 참새처럼 떠드는 아이리스.
이제 와 보니 순수히 정령사를 만나는 걸로 들뜬 게 아니라, 아마 살면서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과, 여행 과정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 자체에 신이 나는 것 같았다.
하기사 황궁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길러졌을테니. 안 그래도 모험과 여행 따위 단어에 눈을 빛내는 모습이었다.
영웅담 같은 거라도 즐겁게 읽었는지. 본인이 용사라서 그런 데에 관심이 많았던 건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흔히 동화나 설화에서 나오는, 파티에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해주는 인자한 어르신의 이미지가 생각나서인 듯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왔냐.”
“어.”
“엣.”
우리 파티원이 될 사람은 인자한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니고, 성격 더러운 다크써클 히스테릭 여자인데.
담배만 안 물었다 뿐이지 골방에 틀어박힌 아티스트의 모습을 한 누나가, 대충 걸쳐 입은 가운의 매듭을 동여매며 나를 반겼다.
척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내 누나의 모습에 아이리스가 얼어붙었다. 하긴, 저기 저 깊게 내려온 다크써클에 담배 하나 꼬나물 것처럼 보이는 퇴폐적인 얼굴을 보면 순수한 용사님한텐 충격적이겠지.
다만 충격을 받은 건 아이리스 뿐만이 아닌듯, 무심하게 나를 반기던 누나가 옆의 용사님을 보곤 입을 쩍 벌렸다.
입을 뻐끔뻐끔.
‘황녀 전하가 여기 왜 있어.’
목소리를 안 내고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면서도 꼬박꼬박 황녀 전하라고 부르는군.
나는 두 사람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루나. 이쪽은 황녀님.”
“아, 그, 황녀 전하…?”
“아이리스. 이쪽은 루나. 내 누나야.”
“네엣?”
둘 다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뜬다. 아이리스는 누가 봐도 인간인 누나가 족히 백 년은 넘게 산 나의 누나라는 말에 놀란 듯 했고, 누나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오빠의 누나는, 레티시아 공녀님 아니에요?”
더듬더듬. 아이리스가 꼭 물음표라도 띄운 듯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은 피를 나눈 남매. 여기.”
탁.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나 누나는 영혼을 나눈 남매.”
누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이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시선이었다. 조금 따끔거렸지만 무시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천칭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아. 아아! 그, 그렇군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이리스가 알아서 납득하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머리를 굴린 건지 땀방울이 흐를 정도였다.
“아니, 그.”
누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 무슨 대답이 나올 지 몰라 무섭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처음엔 기대했던 나이 지긋하고 인자한 어르신이 아니라 웬 퇴폐미녀가 나와 굳었다가, 그 다음엔 나의 누나 소리에 깜짝 놀랐던 아이리스가 정신을 차리곤 그렇게 말했다.
언니라.
나는 문득 두 사람의 나이를 떠올렸다.
루나가 한 살 어렸던 것 같은데.
“아, 그, 그러실래요…?”
“아이리스라고 불러도 돼요!”
“아, 아이리스…?”
“네! 기왕이면 말도 편하게 하시구요!”
파르르. 입꼬리가 떨리는 누나가 대답했다.
하긴 뭐. 전생 나이까지 합치면 누나가 더 많으니까.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오빠. 잠깐 저랑 얘기 좀 해요.”
‘이따 보자 너.’
음.
이런.
*
“여자네요?”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이리스가 목소리를 낮추고 나를 추궁했다. 원래 차가운 인상에서, 평소 나를 대하던 때와 달리 날카롭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니 조금 서늘할 정도였다.
“영혼을 나눈 누나….”
“여자네요?”
“그렇지….”
불만스레 나를 노려보던 아이리스가 한숨을 폭 내쉰다.
“저분이 그거예요? 천칭?”
운명, 피, 그리고 영혼.
세 번의 계약을 맺어야 하노라고 미리 얘기해뒀기에, ‘영혼을 나눈 남매’라는 소리에 얼추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런 거면 어쩔 수 없긴 한데요….”
말 그대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리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나를 슬쩍 보곤 다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가 모르는 여자가 또 있진 않죠?”
내가 아이리스에게 얘기해준 상대가 레티 누님과 데이지, 크리스티나 셋이었던가.
여기에 누나까지 포함시키면.
“…지금은 없는데.”
지금은 더 없다. 아이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늘하던 분위기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지금은?”
“한 명 더 생길지도.”
“죽어.”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대답이었으나, 아이리스는 말해놓고도 자기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은 아니에요.”
“알아.”
알지, 그럼.
나는 괜히 미안해질 따름이라,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보다 더 늘진 않을거야.”
“정말로…?”
음.
순간 대수림의 여왕이 떠올라서, 나는 멋쩍은 얼굴로 말을 덧댔다.
“신부는.”
“신부가 아니면 뭔데요?”
“신부는 아기 낳을 사람.”
“신부 아닌 사람은 몇 명인데요?”
“한 명?”
“죽어요.”
뭐.
살벌한 대답이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아이리스를 안았다.
‘하지 마요.’ 차갑게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품에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한참이나 ‘하지 말랬는데.’라거나, ‘나쁜놈아.’하고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윽고 한숨을 쉬며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고마워.”
“알면 잘 해야 돼요.”
“잘 할게.”
“흥.”
훌쩍.
내 품에 고개를 묻은 아이리스의 어깨가 잠시 떨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던 거니까 봐주는 거예요.”
물기 젖은 목소리에, 나는 속삭였다.
“사랑해.”
“나빠.”
나는 나쁜 놈이었다.
다만 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놈이고 싶진 않았다.
“행복하게 해줄게.”
“…그 말 지켜요.”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