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95화 (95/140)

EP.95 계승자 - 후일담

깜짝 놀란 리하르트의 두 눈이 나와 아이리스를 향했다. 아니. 리하르트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들이 놀란 듯 술렁였다.

그나마 미리 얘기를 나눴던 아놀드만이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그게 정녕 네 소원이더냐?”

황제의 눈이 아이리스를 응시했다.

아이리스는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나를 향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묻는 듯한 눈길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기가 황제에 어울리는 인재는 아니라고 하더군.”

“…으음. 내 눈에는 조만간 벽을 넘을 듯 싶다만.”

다시 한 번 대전이 술렁였다.

그것은 나이가 채 약관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벌써 벽을 넘기 직전이란 사실에 놀란 것이기도 하고, 또 그런 그녀가 제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에 다시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훌륭한 황제 폐하가 될 자신이 없다더군.”

“흠.”

내가 덧붙인 부연설명에 황제가 슬쩍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런 면에서는 리하르트가 더욱 뛰어나기는 했다. 아이리스가 못 난 게 아니라, 리하르트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아이리스가 용사이기 때문인 것도 있을텐데.

여신의 총애를 받은 아이리스의 몸에는 은은한, 신성하고도 위엄 있는 아우라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나나 황제, 아놀드, 혹은 그녀와 어렸을 적부터 봐왔을 그녀의 형제자매쯤 되지 않으면, 아이리스의 그 신비하고도 고고한 분위기는 타인의 접근을 막아낸다.

반면 리하르트는 황족이면서도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 단련하고, 또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

거기다 그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 기감에 예민한 감각이, 선천적으로 타인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저 사람은 왠지 나에 대해서 잘 알아. 내가 불편하지 않게 분위기를 잘 이끌어 가.’

그런 인식을 이끌어내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를 끌어모으기 쉬운 쪽이 리하르트라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허나, 제국의 황제라는 것은 단순히 지지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알지 않느냐.”

그렇다.

단순히 민중의 지지를 넘어, 귀족들의 지지까지. 대륙 만인의 지지를 모은다한들, 제국의 황제 자리는 그들의 지지만으로 유지되는 위치가 아니었다.

여신의 총애를 받아, 마스터의 자질을 핏줄을 통해 전승시켜, 대륙의 균형을 유지한다.

대륙을 통일할 때부터 제국이 자신들의 대륙 통일과 통치를 위래 고수해왔던 전략적인 입장을 고려해야 했다.

물론.

나도 아이리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왔다.

지난 밤.

“저, 리하르트 오라버니한테 계승권을 양보할 생각이에요.”

내 품에 안긴 아이리스가 내게 그리 속삭거렸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그녀가 다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 어디 말해보라는 듯 등을 쓸었다.

‘으응.’ 얕은 숨을 뱉은 아이리스가 내 옷깃을 약하게 쥐곤 입을 열었다.

“제국을 잘 통치할 자신이 없어요. 저는 용사고, 마왕을 쓰러뜨리는 사명이 있어요.”

“마왕을 쓰러뜨리기 전에는 제국을 통치할 수 없다?”

“네. 무척 바쁜 나날일테니까요. 아버지가 정정하시면 모르겠지만….”

말끝을 흐리는 아이리스. 그 말대로 황제의 수명이 그리 길게 남진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무척 고된 일일 거예요.”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마왕이지, 그 여신과 격을 나란히 하는 신격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이 어린 여자아이가 짊어진 사명이라기엔, 무척 무거웠다.

“…하지만 제 사명인걸요. 포기할 순 없어요. 기필코 마왕을 쓰러뜨릴 거예요. 하지만….”

아.

나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 챘다. 아이리스는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척 부끄럽고, 또 죄스럽다는 듯 내 눈치를 살폈지만.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면, 쉬고 싶다는 거구나.”

“…네.”

그랬다.

아무렴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 평생의 숙원이자 사명으로 세상을 구하고 난 뒤, 제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녀에게 있을까?

타고나길 권력욕과 명예욕이 있는 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누릴 권력은 이미 지금껏 잔뜩 누렸을 아이리스였다.

“사치스런 황궁의 생활을 즐기며, 제국을 통치하기보단, 되려 어디 조용한 곳에서 사랑하는 이와 단 둘이 살고 싶어요.”

용사가 돼서. 제국의 황녀가, 이렇게 의무를 져버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리다니….

시무룩한 얼굴로, 내게 실망했냐는 듯 울상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리스의 뺨을 꼬집었다.

“아으으읏!”

정말 아프다는 듯 파닥거리는 그녀를 놓아주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 같이 쉬자.”

“…가, 같이요?”

“그래. 사랑하는 사람이랑 쉬고 싶다며.”

아이리스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뭐, 바알을 죽이고 나면 나도 내 사람들을 데리고 한적하게 살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여신의 총애는 어쩌고.”

대대로 오러 마스터의 자질을 물려주고, 시기가 다를 뿐 모두 결국 벽을 넘어 마스터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여신의 총애.

황실과 여신의 맹약이었기에, 황제는 마스터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 마스터가 아닌 리하르트가 황제가 되면, 그 맹약이 깨져버리게 되는데.

아이리스가 히히 웃었다.

“제가 여신님한테 다 여쭤봤는데요. 지금은 마왕 때문에 힘을 거의 다 써서, 용사의 운명인 저한테 내려줄 축복밖에 없었대요.”

“그렇구나.”

“그래서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면, 리하르트 오라버니에게도 총애를 내려달라고 하려구요.”

음.

그래?

얘기를 듣고 나니 들은 생각이, 만일 마왕이 없었다면, 여신의 힘이 모자라지 않았다면, 에드윈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모자란 재능을 탓하지 않고 마스터가 되어 황제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리하르트라는 예시가 있으니, 마왕이 없었을 세계의 에드윈에게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안 들었다.

똑같이 재능 없다 못해 아예 범재라고 부르기에도 처참할 수준의 재능인 리하르트가 오히려 오러를 각성한 지금의 세상을 떠올리면, 결국 에드윈보단 리하르트가 백배 나으니까.

“왜 리하르트만?”

“어…. 어차피 다른 언니들이나 오라버니들은 검을 쥐는 거에 딱히 관심 없거든요.”

“여신님은 허락해줬고?”

“물론이죠.”

그럼 뭐.

괜찮겠지.

여신이 보증해줬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간밤에 아이리스와 나눴던 대화를, 아이리스가 품은 미래의 꿈이나 황제 자리가 싫어서 같은 내용은 뺀 채 요약해서 황제와 리하르트에게 얘기해줬더니, 둘의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두 사람 중,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도 못한 해결책이로군.”

미묘하게 한숨 섞인 듯한 말이었다.

“리하르트의 나이가 이제 거의 오십이다만. 마왕을 죽이면 이놈이 바로 벽을 넘게 되는 건 아닐 거 아니냐.”

아무래도 그렇다. 어디까지나 여신의 총애는 마스터의 자질을 내려주고, 그 자질이 발현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는 것이니까.

만일 마왕을 죽이는 데에 10년이 걸린다 치면, 이미 나이 육십이 되어버린 리하르트가 그때부터 마스터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해야한다는 건데.

리하르트도 황제의 말을 듣다 보니 미심쩍은 얼굴을 한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아이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5년 안에 해보겠습니다.”

“허.”

5년이라.

황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수 천년은 묵었을 차원 너머의 괴물을 5년 안에 죽이겠다고.’ 그리 말하는 노인의 표정이 상당히 긴가민가 한 듯 해, 내가 한 마디 얹기로 했다.

“잠깐. 5년이라니.”

“음?”

역시 무리냐? 하고, 한 발짝 나선 나를 보는 황제였다. 리하르트 역시 ‘아무리 그래도 5년은 너무 빠르지….’ 하는 생각이 두 눈에 읽힐 정도였다.

“3년이면 충분하다.”

“….”

미친놈.

황제는 나가라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아이리스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이상한 놈한테 물들어 버린 막내딸을 보는 시선이었다.

음.

틀린 말은 아닌가.

*

우리는 곧바로 황실의 비고에 들렀다. ‘태양의 눈’을 챙겨야 했으므로. 황제가 넌지시 원하는 게 있다면 하나 정도 더 꺼내가도 된다고 했어서, 나는 엘릭서를 챙겼다.

엘릭서가 아무리 귀하다지만, 통일 제국의 비고이니만큼 엘릭서의 양은 꽤 많았다. 한두 병 정도 챙겨도 상관 없으리라.

거기에 성국이 제국과의 친교를 상징하기 위해 보내준 비보 '일곱 날개의 자비'까지.

이 정도면 아픈 다리에 달라붙은 저주도 좀 어찌 해결할 수 있겠지.

기왕이면 리하르트의 황태자 즉위식을 보고 가고 싶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내일 아침 아이리스와 떠나기로 했다.

“테일러 영지에 들렀다 가자.”

“네? 네. 그곳은 왜요?”

어차피 가는 길목에 있기도 했으니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의아해 하는 아이리스에게 웃으며 답했다.

“파티원 데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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