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3 계승자 (3)
솔직하지 못한 노인네 같으니.
언제든 도와줄 수 있도록 그림자를 미리 전개해두었던 것이 무색하게, 타이밍 좋게 나타난 황제의 뒷모습에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리하르트가 무척 잘 해줬어.”
미약하지만 오러의 각성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임 속의 수많은 루트에서, 오직 단 하나의 루트에서만 오러를 각성했던 리하르트다.
그마저도 배드 엔딩의, 아이리스, 그러니까 루크를 지키다가 오러를 각성한 채 싸우다 결국 전사해버리는.
비록 이제야 첫 발을 내딛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럼 나도 이쪽 일에 좀 더 집중해볼까.’
스륵.
발 밑으로 돌아온 그림자.
만일을 대비해서긴 하지만, 복잡하게 수식을 굴리는 와중에 그림자까지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두통에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아이리스는 여신을 통해 마법적 지식을 전해들을 순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마법적 기초가 부족했다.
반대로 나는 아크 메이지를 넘어 그랜드 메이지의 경지에까지 다다랐던 육체가 있었다. 대신 기억을 잃었기에, 자질과 육신만 남았을 뿐 쌓아올렸던 대부분의 마법적 지식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니 여신이 전해주는 마법적 지식들을 내가 엮는다. 에드윈이 미끼를 물기까지를 기다리며, 나는 수백 수천가지의 마법 수식들을 필요한 부분에서 발췌해 새로운 술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원간 영적 연결 탐색’만을 위한 술식이 만들어졌다.
허나 아주 급하게, 수천 가지의 수식에서 필요한 부분들만을 도려내 얼기설기 꼬매 붙인 술식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좋게 말해도 조잡한 술식이었다.
제대로 된 술식이, 중학교 과정 수학 문제처럼 손쉽게 풀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급조해낸 술식은 질문도 똑같고 도출해내는 답도 같은데, 학부생에게 요구할 법한 풀이 과정의 서술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 과정을 지켜본 여신은, 마법적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자신이 전해주기만 하는 수천 가지의 술식 중 원하는 것만 골라 만든 어설픈 술식이 제대로 유의미하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경악했다고 아이리스가 말했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머리가 지금 존나게 아픈데.
찡그린 내 얼굴을 본 것일까, 내가 전개하는 술식에 성검의 권능을 부여해, 에드윈과 계약한 악마들의 진체가 위치하는 좌표를 추적하던 아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아.”
마저 찾아.
뒷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으으아아아아아!!〉
갈라졌던 상체를 재생시켜, 너덜너덜해진 꼴로 일어선 에드윈. 미리 황제에게도 말해뒀으니 죽이진 않겠지. 놈을 죽였다가 계약이 끊기면 곤란해진다.
쾅! 쾅!
질척질척.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마기가 폭산했다. 이 자리에 있는 군단의 어느 마족보다도 많은 마기. 정작 그것을 다루는 주인이 유감인 것과는 별개로, 세 악마가 나눠준 마기의 양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다만.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늙어 약해진 노인네라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다. 거의 폭주하듯 마기를 일으켜 터뜨려 폭발적인 힘을 내는 에드윈을 꼭 어린아이 상대하듯 가지고 놀고 있다.
촉수의 형태를 갖춰 꿈틀거리는 마기가 황제가 휘두르는 유스티아의 날에 토막이 나면, 그 단면에서부터 빠르게 타오르듯 사멸했다.
〈아아아악!〉
그 마기를 다루는 주체인 에드윈 역시, 타오르는 고통에 발작하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것이 국보, 유스티아.
아르카디아 황가에 내려오는 여신의 총애의 산물.
아이리스가 지닌 성검만큼은 아니지만, 마(魔)를 멸(滅)하는 권능을 부리는 성검의 하나다.
나는 전장을 살폈다.
사고(思考)의 대부분을 술식을 전개하는 데에 할애하는 중이라, 단순히 눈길을 돌리는 것 뿐인데도 그마저도 깨질 것 같은 두통을 참아야 했다.
“거의 다 정리 됐다! 놈들의 멱을 따버려라!”
“예─!”
아놀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에 호응하는 기사들. 마족 군단의 목이 하나씩 바닥을 굴렀다.
얼마 남지 않은 마족 중, 기사들의 합공으로 온 몸에 자상을 입은 마족이, 이제까지 다른 마족들이 그래왔듯 최후의 발악으로 마기를 폭주시켰다.
〈쿠오오오!〉
폭주하는 놈의 앞으로, 거구의 기사단장이 내달렸다. 그 육중한 몸으로도, 다른 어떤 기사보다도 빠르게.
“제국을 위하여─!”
기사단장이 그리 외치며 검을 번쩍 들면, 꽈르릉, 번개가 치듯 그의 오러가 검신을 휘감았다.
“아르카디아를─ 위하여──!!”
자신(內)의 한계를 넘어, 외부(外)에까지 간섭하는 자.
초인(超人)의 검은, 그 순간은 하나의 거대한 망치가 되었고.
콰앙!
가히 3m쯤 되어보이던 마족마저 작아보일 정도로 거대한 망치가, 내리찍었다.
───!!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 그 속에 섞인 비명. 유리가 깨지는 소리. 바닥이 부서지는 소리. 그 모든 소음이 한데 섞였다.
전장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동시에.
“…오빠! 찾았어요!”
“좌표는?”
“여기!”
술식을 위해 나와 마력을 공유하던 아이리스였다. 그녀가 연결 된 마력 패스를 통해 세 좌표를 넘겨주었다. 머릿속에 새겨지는 차원 너머의 공간 좌표.
나는 빼곡하게 전개해두었던 술식을 해체했다. 차르르륵. 소리와 함께, 얽히고 섥힌 마력회로가 풀려나간다.
동시에 과부하 된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다.
〈끄어, 끄아아. 아, 아….〉
촤악.
촤악.
에드윈은 이미 인간의 형체 대신, 마기가 똘똘 뭉쳐 베인 곳을 힘겹게 재생하는 동그란 덩어리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질척거리는 마기가 언제고 흐물텅 그 이음새를 연결하지 못하고 풀려버릴지 모를 정도로.
그런 꼴의 에드윈이 천천히 재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빛나는 명검을 든 노인 오러 마스터가, 무심히 놈의 몸뚱이를 갈랐다.
….
나는 과부하 됐던 마력로를 진정시키며 노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무리 늙고 쇠약해졌다한들 그 단단한 등만큼은 굳건했건만.
지금의 그는 참으로 약해보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에드윈이 천하의 쓰레기라한들, 노인은 에드윈의 아버지였다.
그런 그에게, 에드윈이 재생하지 못하게 몇 번이고 계속 칼질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니.
“이봐. 제노.”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아니라.
어릴 적의 한때에 사용하였던 그 이름에.
치켜들었던 노인의 팔이 우뚝 멈췄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든 팔만 내렸을 뿐이었다.
뭐냐고.
왜 불렀느냐고.
그리 묻는 듯 한 모습에,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이만 보내줘.”
“…그러지.”
“…내가 해도 괜찮다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흥.
그렇게 코웃음을 친 황제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스스로 매듭 지어야 함을, 나도 황제도 모두 알고 있으므로, 나의 말은 정말 그저 한 번 물어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 아, 아아, 아버지…. 접니다. 아버지 아들. 첫째요. 첫쨉니다….〉
곧 자신의 질긴 생명줄이 끊김을 직감한 놈이, 애절하게 제 아비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울부짖음임을 늙은 황제는 알 것이다.
저렇듯 타인에게서 빌려온 힘으로 어설프게 완성한 불사성은, 없느니만 못하다.
한 번 죽어 부활할 때마다, 그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만일 도플갱어가 있다면.
도플갱어가 본체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과연 도플갱어는 진짜가 될 수 있나?
원래 그 사람의 지인이던 다른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도 도플갱어를 진짜로 대할 수 있는가?
지금의 에드윈은, 그 겉껍데기를 뒤집어 쓴 마족이다.
그것을, 황제는 안다.
그런데도.
〈아브, 아버, 아버지. 아브지이….”
참으로 영악하게도, 쇠 긁는 듯 불쾌하던 목소리마저 생전의 그것으로 되돌린 놈이, 애절하게 노인에게 매달렸다.
황제가 치켜든 검이 떨렸다.
나는 혀를 찼다.
아무리 직접 하겠다곤 했어도, 그것이 스스로 이 일을 매듭 짓는 일이기에 필요한 일이라한들, 곧 수명이 다 할 노인네에게 직접 자식의 목을 따버리라 하는 건 가혹한 일이었기에.
“아브지, 아버, 아버지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벌벌 떨리는 황제의 팔은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고 나서 욕을 먹더라도, 내가 끝내주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손을 든 순간.
“에드윈.”
“예, 예, 예에 아버지.”
나지막히 자식의 이름을 부른 황제와, 다급하게 대답하며 하나 남은 눈을 빛내는 놈.
데굴 굴리며 살길을 찾는 꼴이 역겨워, 그림자를 일으키려 할 때.
“미안하다.”
“…ㅇ─?”
번쩍.
한 차례 섬광이 번뜩였다.
에드윈의 목소리를 흉내내던 그것은 대답조차 끝내지 못 한 채, 그 숨통이 끊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황제의 오러.
나는 그것이 노인이 삶의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기에. 허나, 나는 다시 마력을 움직였다. 이대로 끝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좌표 추적은 끝나 있었다.
죽어버린 에드윈의 육신에서, 놈의 영혼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저것이 악마들에게 계약을 위해 내놓은 놈의 영혼.
나는 재빠르게 「추적」을 부여한 「선」을 놈에게 찔러넣었다.
놈의 영혼이, 계약에 따라 차원 너머의 악마에게 전송되기 위해, 악마들의 ‘계약’을 통한 차원이동이 ‘집행’ 되었고.
미리 준비를 끝마쳤던 아이리스가 성검을 치켜들었다.
계약의 집행 과정에서 열린 차원문, 그 너머로 넘어가는 놈의 영혼과, 그것에 붙여두어 현세와 차원 너머 마계를 연결해둔 나의 마력로.
거기에 찾아두었던 좌표값. 아이리스의 일격이, 세 악마의 진체를 타격할 수 있도록 연결해두었던 ‘길’을 설정했다. 「추적」「갈래」「연동」「유도」「필중」 다섯 가지를 「부여」 해서 만든 길이었다.
성검이 맹렬하게 빛을 뿌렸다.
옆에 서 있는 나도, 그 열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어지럽게 대전을 더럽혔던 마족 군단의 시체가 성검이 퍼뜨리는 빛에 산화했다.
아이리스가 한 발짝 걸었다.
쿠웅.
대기가 떨렸다.
성검이.
“단죄──!”
찬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