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 검을 놓지 않은 이유
리하르트 아르카디아.
통일 제국의 2황자.
남 부러울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난 소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느날 그를 실망스럽게 내려다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뭇한 수염과, 날카로운 눈매. 거기에 경지에 오른 초인 특유의 무거운 기세는,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유아를 겁 먹게 하기 충분했다.
막 걸음마를 떼고서, 그때쯤 기사단의 상급 기사로 승급했던 아놀드의 지도를 받아 유아용의 작은 장난감용 검을 쥐었던 리하르트는, 아놀드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단순히 놀이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 시절의, 아무 것도 모르던 리하르트조차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재능은, 아르카디아 황실 역사상 가장 둔재라며 폄훼 되던 그의 형 에드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리하르트도 제 형과 다를 게 없군. 아니. 오히려 더 못하는구나…. 됐다. 장남도 아니니 억지로 검을 쥐게 할 필욘 없겠지. 리하르트는 제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거라.”
실망스러운 기색의 아버지. 그 목소리에 담긴 체념의 뜻을, 어린 리하르트라도 알 수 있었다.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년간 이어져 온 핏줄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책임감, 그리고 그런 자질로만 자식을 평가해야만 했던 아버지로서의 죄책감.
그런 질척하고 어두운 감정들이 뒤섞여, 자조적으로 말했을 뿐인 것을, 그저 어렸던 리하르트가 우연찮게 들었을 뿐이었다고.
나이를 사십이나 먹고 나서야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
리하르트는 자조했다.
그 뒤로도 몇 명의 동생이 생겼다.
…하지만 모두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하나 같이, ‘불량품’ 판정을 받고선, 검이 아니라 다른 것을 손에 쥐게끔 지도받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아르카디아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런 평가를 듣게 할 바에, 아예 검을 쥐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을.
어린 날의 리하르트는 깨닫지 못했다.
그저, 치기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재능 없는 자신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에 검을 휘둘렀을 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덧 십대 중반이 된 리하르트가 평소와 같이 검을 휘두르다, 오늘따라 궁이 떠들석한 것을 느끼곤, 열 살쯤 많아 나이 많은 형과도 같이 여기고 따르던 아놀드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시끄러운데, 무슨 일이 있나?”
“하하. 모르셨습니까? 오늘 아주 귀한 분이 방문하신답니다.”
귀한 분?
아무리 귀한 이라한들 이 대륙에서, 소년의 아버지인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야말로 가장 존귀한 존재이거늘, 어떤 이가 방문하기에 다들 이리도 법석이란 말인가.
소년 리하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영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이기에, 아놀드는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놈이 리하르트냐.”
아버지가 불러, 황제의 알현실에서 마주하게 된 ‘귀한 손님’.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 루비를 녹여 섬세하게 공예한 듯 아름다운 눈동자.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 심드렁한 얼굴마저 퇴폐스럽고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귀한 자태.
그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참으로 시선을 끄는 것들이었음에도.
소년 리하르트의 눈에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치 하나는 빠르군.”
거대한, 거인.
일순간 남자의 몸을 감싼 채, 커다랗게 드리워진 검은 장막. 마치 밤이 지상으로 폭포처럼 떨어진다면 그러할까. 한 없이 검은 어둠의 막을 올려다 보면, 참으로 거대하다 여겼던 그 검디 검은 장막이, 실제로는 거인의 극히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알현실의 천장은 높은 편이나, 결국 건물의 내부일 뿐이다. 그 높이는 아득하지 않다. 그러니 거인은 절로 허리를 숙이고, 알현실의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샹들리에가 환히 빛나던 알현실이, 그림자의 거인이 뒤덮어, 알현실을 어둡게 물들인다.
그 광경은, 오러는커녕 체내에 축적된 마나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단순히 육체만으로 검을 휘둘러오던 리하르트에게 무척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어찌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이런 것은 마치─.
“그만.”
뚝.
아버지의 목소리.
리하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칠흑으로 물들었던 알현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밝아져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인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는 리하르트를 본 황제가 찾아온 ‘손님’을 노려보았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뭐 하는 짓이냐.”
“글쎄. 기감 하나는 쓸만한 듯 해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 여신의 총애를 받은 아르카디아 황실의 주인이자, 적법한 대륙의 통일 황제. 일곱 공작의 지지를 받으며, 그 자신조차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통치자.
그런 아버지와 편히 대답을 주고 받는 상대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더더욱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손님’의 대답을 통해, 방금 소년이 본 것이, 오직 그 한 사람만을 노리고서 그 본색을 드러낸 것임을 깨달았기에.
리하르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본 ‘손님’이 웃었다.
“너무 겁을 주고 말았나.”
그러고 보니 소개가 아직이었지.
날카롭던 눈매는 어느새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무서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사람쯤이라는 인식으로 ‘손님’에 대한 인식이 변할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스칼렛 체페슈. 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테지.”
그것이, 리하르트가 기억하는 체페슈공과의 첫 만남이었다.
*
리하르트는 스칼렛의 관심을 이끈 듯 했다.
정작 소년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이는 분명 엄청난 기연임에 틀림 없었다.
아직 어렸던 소년에게, 아버지는 그저 소년을 방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소년은 증명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재능이 없다 여겨 포기했던 자신이, 아버지의 바람을 이뤄드리겠노라고. 그리 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얻고 싶었다.
체페슈 공작은 그런 의미에서 스승으로써 제격이었다. 아버지는 재능이 없다 생각해 포기했던 소년에게 흥미를 품었으며, 동시에 아버지 못지 않은, 아니, 사실은 아버지보다도 뛰어난 그에게 사사받는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 생각했었다.
“들어줄 수 없다.”
스승의 되어달라는 요청에, 공작이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않았다면.
“어째서!”
어린 소년은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기감이 뛰어나다고 칭찬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와서 받아줄 수 없다니, 그럼 어째서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무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자신을 칭찬했단 말인가?
이는 리하르트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이럴 순 없었다.
그래서, 감히 황제인 아버지와 대등하다 알려진 공작에게 대들고야 말았다.
“내가 당신의 옷깃 하나라도 스친다면,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 존대인지 반말인지 모를 이상한 말투에 공작은 기묘히 웃으면서도, 또 그 제안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지났다.
리하르트는 틈만 나면 공작에게 승부를 걸었다. 목검 하나를 들고 감히 그 체페슈 공작에게 덤벼드는 최초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모두가 황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저 황제의 관심을 끌고자 매일 억지로 단련하는 줄 알았더니, 저 정도쯤 하면 그야 진심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들 은근히 리하르트를 응원하게 되었다.
다만.
그야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런 일에서도 공작은 손속을 봐주지 않았다.
“으으으윽….”
“아이고. 전하, 괜찮으십니까?”
열 번 도전해서, 열 번 모두 일 합만에 나동그라졌다. 일 합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마저도 공작이 손대중을 아주 많이, 그러니까, 윙윙 날아다니는 모기를 죽이기는커녕 기절조차 시키지 않기 위해 힘을 빼고 손을 휘두른 수준으로 해주었다는 것을, 황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이 결투를 지켜보던 아놀드도, 직접 공작에게 덤볐던 리하르트조차 알 수 있었다.
“재미 없구나.”
공작은 그쯤 하니 슬슬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오직 흥미 본위로 어울려주던 것이니, 이만하면 됐다는 뜻이었다. 리하르트는 급해졌다. 다리가 부러진 듯 아팠으나, 절뚝이며 일어나서는, 다시 한 번 공작을 불러세웠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다오!”
흠.
공작이 팔짱을 꼈다. 미간을 찌푸리고, 리하르트를 응시했다. 처음에 저랬을 땐 아주 죽는 줄 알았으나, 지금은 공작이 자신을 그저 관찰 중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공작의 입이 열렸다.
“이런 면모를 내가 좋아하긴 했다만.”
의아하고 영문 모를 소리였다.
좋아하긴 했다, 라는 것은 과거형이지 않은가. 그와 공작이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의문이 들긴 했으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허락한 거지요!”
아까는 반말이더니 지금은 또 존대인가.
하여간에 웃기는 놈이로군.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하르트가 다시 덤벼들었다가.
“크으으윽!”
다시 일 합만에 나동그라지곤, 그대로 기절했다.
허둥지둥 황자를 챙기는 아놀드에게, 공작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나오라고 해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아놀드는 의아했으나 명령대로 하기로 했다. 아무렴 누구의 명령인데 불복하겠는가. 게다가, 공작의 말은 황자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준다는 것 같지 않은가.
은근 리하르트를 응원하던 궁내 인사들 중에서는 아놀드도 있었다. 그는 내일도 황자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다만 이 경험 자체를 귀하게 여겼기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음에 무척이나 기꺼워했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아놀드는 자기 일이라도 된 양 껄껄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