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89화 (89/140)

EP.89 계승자 (2)

아쉬워 하는 누님을 달래주고, 나는 리하르트를 불렀다.

“그나저나, 정말로 해버리네요…. 악마랑 계약.”

이미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을 해버렸다고 알고 있는 리하르트와 달리, 내게서 전후 사정을 들은 아이리스가 찝찝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까요.”

“이대로 가다간 몰락밖에 안 남았다 싶으니 그랬겠지.”

다급해진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눈 앞에 동앗줄이 내려왔으니, 잡고 싶어졌겠지.

하지만 그것이 썩은 동앗줄이었을 뿐이다.

나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부러 평소와 달리 헝클이듯 슥슥 머리를 만져주니, 심각한 표정이던 그녀도 왁왁 내 손을 피했다.

동앗줄이랍시고 악마와 계약하는 책을 준 나의 책임이 없진 않겠지.

하지만 아이리스도, 나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제국의 황태자라면, 설령 그 생명이 다하여도 선택해선 안 되는 거였으니까.

기회가 온다면 악마의 편에 붙어버리는 기회주의자에게, 제관을 물려줄 순 없다.

실제로 배드 엔딩 루트에선 황제가 된 에드윈이 강림한 바알에게 냉큼 항복해서 전향하기도 했으니.

“잘 됐지. 이번 기회에 솎아낼 수도 있고.”

심란해진 얼굴의 아이리스를 달래주며, 옆에서 코웃음 치는 누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악마와 계약을 해버린 시점에서 에드윈의 황태자 지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아예 황가의 신분을 박탈당했다고 봐도 되겠지만.

아이리스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으니 됐나.

그렇게 생각할 때,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리하르트 전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아놀드였다.

아이리스를 군주로 모시기로 한 사람이니만큼, 리하르트를 부르는 겸 그에게도 얘기를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다.

“들어오세요.”

내 옆에서 시무룩한 얼굴이던 아이리스는 어느새 짐짓 근엄한 얼굴을 하곤, 아놀드와 리하르트를 들였다. 처음엔 리하르트의 모심을 받는 것 자체를 어색해 하던 그녀는 지금 와서는 퍽 익숙하게 리하르트를 대하게 되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두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은 경지에 오른 오러 마스터에, 한 명은 가진 바 무예의 깊이는 얕아도 명망 높은 황가의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대세가 아이리스에게 어느 정도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에드윈도 저질렀을테지만.

저지른 짓의 규모가 너무 컸다.

“두 사람. 에드윈의 얘기는 들었나요?”

“…악마와 계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질문을 내리는 아이리스와, 침중한 얼굴로 답하는 리하르트. 아놀드의 안색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에드윈을 부를 때에 오라버니라는 말조차 붙이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용사였다. 여신에게 선택받아, 악(惡)과 마(魔)를 멸하라는 사명을 내려받은 자.

그렇기에, 에드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아이리스의 목소리엔 진득한 경멸이 서려있었다.

“이번에,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었습니다.”

실제론 그 땐 아직 계약하기 전이었고, 오늘에서야 계약하게 된 것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아이리스도 참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능숙히 했다. 연기에 소질이 있나.

“그건….”

입을 다문 리하르트의 대신, 아놀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드윈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이 제국의 황태자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게 맞느냐 하는 질문에, 아이리스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일말의 여지도 없는 긍정에 아놀드는 탄식했다.

“그렇군요….”

침묵을 지키던 리하르트의 말이었다. 분노, 두려움, 실망과 후회가 뒤섞인 목소리에, 듣고 있던 아이리스마저 눈을 질끈 감고야 말 정도였다.

같은 가족이기에, 리하르트가 느끼고 있을 분노에 공감하듯.

잠시 후, 아이리스의 눈이 뜨였다. 덤덤히 전해야 할 사실을 전하듯 읊조렸다.

“그와 계약한 악마의 이름은 나베리우스와 플라우로스, 안드로말리우스. 셋입니다.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라는 건지, 셋 씩이나 계약에 나서줬네요.”

“형님….”

제국의 황태자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리에 피가 마르는 기분일텐데, 그 상대가 셋이나 된다고 하니 리하르트는 탄식을 뱉고야 말았다.

바알이 칩거에 나선 덕에, 원래라면 차근차근 차원을 넘어왔을 놈들이 길이 막히니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에드윈이 접촉하자마자 몸이 달아서 셋 씩이나 달라붙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두 사람이, 나란히 아이리스에게 진언했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결연한 목소리였다. 아이리스의 손이 떨렸다. 나는 아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떨림이 멎고, 아이리스 역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하르트에게 명합니다.”

“예.”

“그대는 에드윈을 찌를 비수가 되어주세요.”

“받들겠습니다.”

리하르트가 한 손을 심장에 대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눈과 목소리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한때 에드윈을 두려워 하던, 과거의 상처에 떨던 사내는 더이상 없었다.

그저 황실을, 아르카디아 제국을, 그리고 대륙을 위해 검을 들기로 맹세한 기사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리스의 시선이 아놀드를 향했다.

“아놀드.”

“예. 전하.”

“황실의 핏줄이라면, 아마 에드윈과 계약한 악마들도 최대한 거들어 보려 할 겁니다. 본인이 직접 강림하진 못하더라도 휘하 군단을 넘겨주는 정도는 할테죠. 기사단을 끌고서, 더러운 마족이 이곳에 흙발을 내딛지 못하게 하세요.”

“받들겠습니다.”

리하르트도, 아놀드도 결연한 목소리였다.

두 사람도, 아이리스도. 그리고 나와 누님까지도. 생각하는 바는 다를 지 몰라도, 이 일을 실패해선 안 된다는 인식은 모두 같았다.

그리 어렵진 않을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이 방심해서는 안 됐다.

*

다음 날.

대전회의.

옥좌 위에 앉은 황제가 피곤한 얼굴로 대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옥좌 가까이에 자리한 에드윈과 리하르트, 아이리스를 비롯한 그의 자식들과, 그 옆으로 도열한 대신들.

회의가 시작하기 전 황제에게 에드윈의 악행을 알렸다. 황제는 진노하기에 앞서, 피곤한 얼굴이 되어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아서 하거라.”

사실상 전권의 위임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오늘 회의를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넘겼다. 어차피 곧 벌어질 개판에 오늘 다뤘던 안건들은 모조리 묻힐 것을 알기에.

“오늘따라 기사단의 수가 좀 많지 않나?”

“그런가? 잘 모르겠군. 애런 전하의 만행 탓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 큰일 날 소릴 하는군. 애런은 이제 평민 신분인데 감히 전하라고 부르면 큰일나는 거 모르나?”

“아이쿠.”

평소 황제의 옆을 지키던 아놀드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평소 대전을 지키던 기사단의 기사 역시, 그 수가 꽤 많았고.

대신들은 그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얼마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겠거니 하고 신경을 껐다.

그리고.

“죄인 에드윈은 죗값을 치루라!”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대신들이 고개를 들고, 경악했다.

황제의 바로 옆을 지키는 아놀드와, 한 턱 낮은 곳에서 각각 좌우에 서 있던 에드윈과 리하르트였다.

그런데 지금은 리하르트가 감히 황제의 앞에서 검을 빼들고 에드윈을 향해 휘두르는 게 아닌가.

푸욱!

선혈이 튀었다.

“저, 전하!”

“에드윈 전하!”

“리하르트 전하!”

삽시간에 대전이 혼란에 물들었다. 리하르트의 지지자, 에드윈의 지지자, 그리고 순전히 황제를 걱정하는 이들까지. 가지각색의 이들이 경악한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고.

이윽고.

“큭, 크. 크아아악!”

복부와 가슴 사이를 검으로 깊게 찔린 에드윈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바닥을 흠뻑 적신 선혈이 울컥울컥 상처 부위에서 새어나왔다. 이대로라면 황태자가 죽어버린다! 대신들이 다급히 사제를 부르려 했다.

“사제, 사제는! 사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이놈들! 비키지 못할까?!”

패닉에 빠진 대신들이 대전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을, 검독수리 기사단이 막아섰다.

“아직은 안 됩니다.”

“이놈! 그게 무슨 소리냐!”

“어, 어어! 저거, 저거 보시오!”

완고한 기사의 태도에 수염을 기른 한 대신이 역정을 터뜨리려 할 때,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무엇을 보란 말─, 허억!”

남자의 손 끝에는, 분명 검에 찔려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할 황태자가, 피 대신 짙고도 끈적거리는 마기를 복부에서 왈칵왈칵 쏟아내고 있는 광경이었다.

〈리이이하르트으으으으으───!!〉

아까처럼 찢어지는 듯 하면서, 한층 더, 웅웅 울리고, 듣는 이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거슬리는 목소리.

황태자 에드윈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의 몸이 단숨에 마기에 집어삼켜졌다.

리하르트가 검을 고쳐쥐었다.

“하하. 악마놈과 계약하기 전 형님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이건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만.”

그래도.

“나랑 한 번 좀 놀아주시오. 어렸을 땐 내가 많이 맞았잖나? 형님도 이번 기회에 동생의 서러움을 겪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그는 시간끌기용. 아이리스와 스칼렛이, 에드윈이 계약한 악마들의 차원 너머 좌표를 쫓아 확실하게 본체에 타격을 주기 전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부알 때와는 달리, 셋이나 되는 악마의 계약이 얽혀 있어 단숨에 본체를 찾아내기 어려웠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겨버려도, 상관 없겠지?”

덤비시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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