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84화 (84/140)

EP.84 변함 없는 것 (1)

리하르트는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서도 긴가민가 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내가 형님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표정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얼빵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이 사십 먹은 아저씨에게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뭘 그리 놀라나. 네가 에드윈보다 강하다. 그 사실을 나와 아이리스가 보증해줄 뿐인 것을.”

나는 무심한 말투로, 리하르트에게 무척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나도 아이리스도, 당연히 리하르트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로 내 눈에도 리하르트가 에드윈에게 질 것 같진 않았다.

리하르트는 모르겠지만, 나와 아이리스의 눈에는 보인다.

리하르트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음을.

물론 마스터는커녕, 오러를 흐릿하게나마 형성하는 단계조차 무리인 반푼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사십년이란 세월간 쌓아올린 검술은 이십 년간 검을 쥐지 않은 배불뚝이가 상대할 수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적어도 클라우디우스 2세의 자식들 중, 아이리스를 제외하면 리하르트를 순수하게 검술로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유일한 변수라면, 에드윈에게 두려움을 품은 리하르트가 에드윈을 상대하며 심적인 부담감에 약해지는 것 정도일테지만.

나는 리하르트가 그것마저 극복해내리라 믿었다.

아마 나 뿐 아니라 아이리스도, 리하르트를 믿고 있으리라.

“….”

혼란스러워 보이는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라, 나는 오늘 하루는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라며 그를 내보냈다.

내게 방에서 떠밀려 나가면서, 별다른 대답 없이 두 발로 방을 나서는 리하르트의 멍한 얼굴을 떠올려 보자면 머릿속이 퍽 복잡해진 듯 했다.

아무튼.

리하르트를 그렇게 내보내고 나니, 나와 아이리스 단 둘이 방 안에 남게 되었다.

“아이리스. 여신님이랑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아, 여신님이랑요?”

마침 아이리스에게 여신과의 대화할 수 있게 부탁하려고 했었으니 지금 시간을 좀 내서 물어보기로 했다.

내 부탁에 아이리스가 잠깐 손목을 만지작 거리더니, 옅은 빛무리가 은은하게 손목에서 반짝거렸다.

“말씀하세요.”

“내 기억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데.”

일전에, 아이리스를 통해 여신에게 똑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그 때 여신은 나의 부탁에 난색을 표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 말을 전하는 아이리스의 표정이 무척 진중해서, 나중에 사정 설명을 듣기로 하고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이제 슬슬 여신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설정대로라면 바알의 강림까지 시간이 많이 남긴 한데다, 실제로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바알에게 치명상을 입힌 덕에 그보다 상황이 좋긴 하지만.

반대로, 너무 많은 변화가 생긴 탓에 나와 누나가 기억하는 시계열이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기억을 잃어버린 채일 수는 없었다.

내 각오가 전해진 건지, 아이리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신이 말을 전하는 듯, 아이리스의 손목에서 빛무리가 은은하게 번졌다.

잠시 뒤, 아이리스의 입이 열렸다.

“…현재 여신님을 비롯한 천계의 신격들께선 마왕 바알에게 지상에 관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수단을 제약 당한 상태라고 하셔요.”

아이리스가 꺼낸 것은, 지금까지는 꽁꽁 숨겨져만 있던 천계와 마계의 세력 구도였다. 여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아이리스도 지금 처음 듣는 얘기인지, 말하는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유를 말해주고 싶어도, 현재 천계의 정보 하나를 지상에 전달할 때마다 소모되는 인과율이 상당하므로 양해를 구하고 싶다고 하시네요…. …아, 단순한 대화나 이미 오빠가 알고 있는 정보는 괜찮다고 하셔요.”

아마 ‘정보를 전하는 것도 제한이 있다’라는 정보를 전하면서도 상당한 소모가 있었을 것이다.

이 정보를 통해,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설명이 있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나는 대충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린 뒤,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기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으음. 보통 저주로 인한 기억상실은 저주의 해주와 함께 기억이 돌아오는데, 오빠의 경우는 권능에 가까운 저주였던 것을 힘겹게 상쇄해낸 것이라…, 이 경우엔 아예 새로운 방법을 써야한다고 하네요.”

새로운 경우?

내 의문에 답하듯, 아이리스가 말을 이어갔다.

“시간신전에 위치한 성물이 오빠가 지닌 기억의 파편을 수집해줄 거래요. 파편을 수집한 다음엔….”

“다음엔?”

“달의 신전에 가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 라고.”

애매모호한 말이다.

꼭 기억을 되찾는 게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여신이 내게 거짓말 할 이유도 없으니 믿어야겠지.

“시간신전이라.”

설정상으로만 아는 곳이다.

게임상에서도 언급만 되고, 스토리가 진행 되며 대륙에 온갖 혼란이 벌어져도 결국 시간신전만큼은 끝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설정집에서조차 그 위치를 불분명하게 해뒀다며 누나가 투덜거렸던 기억이 있다.

정작 그 누나가 만든 게임 설정집이었다는 게 아이러니 하지만.

결국 누나도 게임을 만들면서 원작자에게 시간신전의 설정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아마도 원작자의 정체는.

….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위치는?”

“대륙 극동부 용의 산맥 너머…래요.”

용의 산맥이라.

드래곤이라도 만나고 오겠는데.

“그래.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해. 고마워.”

이 정도면 나름 만족스러운 정보였다. 나는 사이에서 수고해준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가드릴까요…?”

고개를 숙이고, 내 손길을 받아들이던 아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 끝을 흐린다. 나는 의외의 말에 잠깐 손을 멈췄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자리를 비워서 어쩌려고.”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과, 대륙 극동부에 자리한 용의 산맥을 넘어가는 것은 정말 차원의 다른 수준의 문제였다.

차기 계승권의 선두 주자인 아이리스가 그런 곳에 다녀오겠다는 것을 환영하는 이는 경쟁자인 에드윈 뿐이겠지.

그러니 아이리스를 데려갈 순 없었다.

아이리스도 그 사실을 알텐데. 나는 고개를 숙여, 아이리스와 눈을 맞췄다.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가 불안해?”

“…걱정되니까요.”

무엇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내 물음에, 아이리스가 눈을 피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윽고 내 가슴팍에 이마를 콩 기댄다.

“이미 많은 것을 잃었잖아요, 오빠는.”

기억도, 그간 쌓아올렸던 막강한 힘조차도.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울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간 티내지 않았던 그녀의 속내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물론 바알의 수작 덕에 기억을 잃은 것도 맞고, 수없는 기연과 자기단련을 통해 쌓아올렸을 스탯의 거진 대부분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냉혹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리스가 아니라 나의 일이 아닌가.

정작 당사자인 나보다 그녀가 더욱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리하르트가 아까 전에 이런 기분이었는가.

그 때.

아이리스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을 찾은 오빠가,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떡해요….”

아.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이리스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리스는 기억을 잃은 나밖에 모른다. 백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제 부모의 목까지 뜯어버린 철혈의 공작이 아니라, 깨어난 지 몇 달밖에 안 된 나밖에.

나조차도 기억을 되찾은 나의 성격이 어떨지, 지금의 나의 자아가 백년이란 세월의 비대함에 짓눌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지곤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위해, 나와 누님의 몰락을 막기 위해 기억을 되찾겠노라 각오했다.

하지만 철혈의 공작을 존경하던 황녀 아이리스는, 존경이란 감정을 품었던 자리에 대신 기억 잃은 나를 품어 사랑하게 되었다.

“무서워요….”

아이리스의 어깨가 떨렸다. 기껏 사랑하게 된 남자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까봐.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그 남자가 기억을 되찾게 도와야 한다는, 그런 마음까지도.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인으로써의 아이리스와, 선량하고 올곧은 용사 아이리스의 가치관이, 치열하게 부딪쳐서.

아이리스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울상으로 일그러져, 어찌 할 줄 모르는 연약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읏.”

나는 아이리스를 끌어안았다. 흠칫 떨리는 몸. 한층 작아진 것처럼 느껴지는 아이리스의 몸이, 내 품에 안겼다.

“…죄송해요. 이런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힘 없는 목소리였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아이리스의 뒷목을 감싸고, 턱을 잡아 살짝 들어올렸다.

“오빠? …읍.”

의아한 듯 나를 부르던 그녀의 입이 틀어막혔다.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 확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

두 눈을 부릅 뜬 아이리스의 몸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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