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 리하르트 (4)
이번 기회에 에드윈까지 제대로 처리해두지 않으면 뒷일이 귀찮아질테니, 다음으로 미룬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긴 했으나 그렇다고 아주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에드윈을 낚기 위한 미끼도 착실하게 뿌려뒀으니 놈이 미끼를 물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
남은 휴학 일자가 그렇게 여유롭진 않지만, 그 경우에는 아카데미에 요청해 늘려달라고 하면 되는 일이고.
학장이 허허 웃으며 도장을 찍어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예? 휴학 기간 연장 말씀이십니까? 허허,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허락해줄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다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가능의 영역에 있을 뿐, 기왕이면 그런 일 없이 에드윈을 처리하고 복귀하고 싶긴 했다.
아카데미의 생도가 학장에게 그렇게까지 배려를 받는다는 게 미묘한 기분인데다, 기왕지사 다니는 아카데미를 그렇게까지 빼먹고 싶진 않았다.
‘결국 에드윈이 얼마나 빨리 미끼를 무느냐의 문제인데.’
너무 시간이 지연된다 싶으면 처음에 계획했던대로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를 적당히 만들어서 뒤집어 씌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는 에드윈의 성격상 그렇게 늦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리하르트는 내게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했다는 말을 듣곤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에드윈이 악마와 계약했다는 말은 언뜻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도 있음에도 나의 말을 철썩 같이 믿은 이유가 그만큼 나를 신뢰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에드윈의 행실이 여지껏 나빴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리하르트가 곧 다가올 순간을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늘도, 검독수리 기사단과 함께 가열차게 몸을 단련하고 돌아온 리하르트가 나를 보고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공작인 나에게 2황자인 리하르트가 무릎을 꿇는 순간 복잡한 문제들이 생기겠지만, 이렇듯 단 둘이거나 아이리스와 함께 있는 경우 리하르트는 우리 둘에게 극진한 예를 갖춰 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뻘의 오라버니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아이리스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 것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리하르트의 이런 태도는 나에게도 꽤 낯설기는 했다.
지금은 이 세상이 내가 아는 게임 속 세상이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리하르트라는 캐릭터의 배경과 그 결말은, 비록 누나를 통해 설정밖에 전해듣지 못했던 내게 꽤나 감명 깊었기에.
“리하르트.”
“예. 체페슈공.”
나의 부름에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나는 물었다.
“오늘도 어김 없이 검을 휘둘렀나.”
“그렇습니다. 체페슈공이 저를 형님을 벌하는 검으로 쓰겠다고 하였으니, 그 날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드윈은 검을 놓은 지 이십 년도 더 넘지 않았나.”
“음. 체페슈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리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곤, 이윽고 입을 열었다.
“형님은 마스터의 자질이 없을 뿐, 저 따위보단 훨씬 재능 있던 분 아닙니까. 검을 제대로 쥔 적조차 없는 애런을 상대할 때도 진심을 다 해야 했는데, 제가 어찌 한때 마스터가 되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형님을 상대로 방심하겠습니까?”
아, 그렇군.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리하르트는, 진심으로 자신이 에드윈에게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윈보다 뒤떨어지는 재능, 그야말로 범재조차 되지 못하는 둔재.
그런 재능을 부끄럼 없이, 주저조차 없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리하르트의 모습은 그야말로 대인배나 다름 없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그것은 무의식 속에 담긴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표출이었다.
“에드윈이 두려운가.”
나는 한 가지 떠오르는 설정이 있었다.
결국 오러 마스터가 되지 못했던 이십 년 전의, 그러니까, 지금보단 그래도 젊고 혈기왕성 했던 에드윈이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패악질을 부렸었다는 설정이었다.
그 분노는 자신보다 못한 동생들에게 향했고, 개중 에드윈의 분노 중 대부분을 리하르트가 받아내었었다는…, 그런 설정.
그 와중에 또 동생들에게 향할 패악질까지 홀로 감내한 리하르트의 성정을 나타내는, 그러니까 리하르트가 실제로 이만큼 착하고 대단한 인물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었을테지만.
실제로 그 설정 뒷면에 숨겨진 진실은, 지금까지도 리하르트가 에드윈을 두렵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예.”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웃으며, 일견 무던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떨리는 그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용케 내게도 들키지 않았군.”
“하하. 그렇습니까? 정작 늘어야 할 검술은 안 늘고 이런 능청만 늘어난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능청을 떨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으나, 나는 이제와서 그의 역할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에드윈을 찌르기에 가장 적합한 비수가 리하르트라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리하르트가 개인적인 문제를 품고 있긴 하나….
“따라와라.”
“예? 아, 예.”
무심히 말을 뱉곤 뒤돌아섰다. 뒤에서 급히 일어나 나를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며, 나는 그를 아이리스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아이리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잠깐 대답을 기다렸다.
“….”
침묵. 문 너머에서 기척은 느껴지는데, 대답이 없었다.
그럼 더 기다려줄 필요 없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단장을 하고 있었는지 말끔히 차려 입고서 머리를 틀어올려 묶고 있던 아이리스가 멈칫 굳고는, 나와 리하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제, 제가 노크 해달라고 했죠.”
“노크 했다.”
“…못 들었어요.”
거짓말이 분명했다.
노크 소리를 듣곤 부랴부랴 옷을 갖춰 입은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옷을 갈아입었다면 벗은 게 어딘가에 있을텐데.
….
아이리스의 손목에서 은은하게 사그라드는 빛알갱이가, 매우 흐릿하게 눈에 잡혔다.
성검을 수납하는 아공간을 이용했나.
나는 괜히 심술궂게 웃었다.
“성검을 두는 공간에 개인적인 물품을 수납하다니, 여신님이 화내시면 어쩌려고.”
“여신님한테 허락 받았으니까 괜찮….”
내 말에 울컥했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박하다, 자신의 말이 결국 내 말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이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씨.”
결국 본전도 못 찾은 그녀가 발을 동동 굴리다,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잠깐만 나가봐요. 정리 좀 하게….”
만약 나 혼자였다면 그대로 눌러 앉아서 아이리스가 방 청소를 하는 과정을 지켜봤겠지만, 옆에 리하르트를 끼고 왔으니 그럴 수도 없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얼떨결에 나를 따라왔다가 모시기로 한 주군이자 딸뻘 동생인 아이리스에게 나와 함께 타박을 들은 리하르트는 얼떨떨한 얼굴이지만, 놔두면 적응하겠거니 싶었다.
잠시 후.
문 앞에서 리하르트와 멍하니 서 있으니, 문 너머로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살짝 토라진 얼굴의 아이리스가 우리를 맞이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오빠는 그렇다고 쳐도, 리하르트… 까지.”
리하르트의 서약을 받은 그 날 이후, 아이리스는 의식적으로 리하르트를 혈육이 아닌 한 명의 기사로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상당히 어색한 듯 했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아니면 이 관계가 유지 될 수도 있고. 막내 동생을 모시는 오빠라는 관계이니, 평범하기만 한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이대로 아이리스가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고 나면, 황가의 일원이자 아놀드와 함께 가장 먼저 아이리스에게 충성한 리하르트가 최측근이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아무튼 그것도 다 나중의 일일테지만.
나는 아이리스를 찾아온 목적을 설명하기로 했다.
“아이리스. 네가 보기에, 리하르트와 에드윈이 결투하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마스터의 경지가 목전인 너라면, 쉬이 알 수 있잖니.”
그렇다.
이번에 황실에서의 경험이, 아이리스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주었는지, 그녀는 한 단계 진일보 한 상태였다.
조만간 벽을 넘어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벽을 넘고 나면 누님이랑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러 마스터가 코 앞인 그녀다. 내 질문에 되려 인상을 쓰곤,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나를 본다.
“뭐 그런 비교를 해요? 당연히 리하르트 오라… 리하르트가 이기지.”
그렇다는데?
나는 얼떨떨한 얼굴의 리하르트를 돌아봤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도 차단하기 위해 다시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만약의 경우는?”
“만약의 경우요? 음. 에드윈이 사실 마법사였다거나 하면 모르겠는데요.”
마법사면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 결국 만약의 경우도 없다는 뜻이군.
그나저나 이제 에드윈도 오라버니가 아니라 그냥 에드윈인가.
나는 아이리스의 그런 사소하면서도 착실한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