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80화 (80/140)

EP.80 리하르트 (1)

사정 설명을 들은 리하르트는, 파르르 주먹을 쥔 채 떨었다.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무척 분노한 상태였다.

두 눈이 번뜩이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았다. 다만, 타오를 듯 뜨거운 분노를 느끼면서도,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애런이….”

리하르트가 되물었다.

분노와 함께,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자신의 동생이, 막내동생을 상대로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는 게.

게다가 그걸 사주한 것이, 그의 하나 뿐인 형님이라는 것을.

“체페슈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에드윈이 사주한 것이 맞고, 애런이 소문을 퍼뜨린 것 역시 사실이다.”

“….”

리하르트는 말을 잃은 듯 잠시 묵묵하게 서 있었다.

눈 밑 주름이 선명한 중년의 남성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올라간 듯 싶었다.

“애런, 애런이… 왜 그런 겁니까. 애런이 그런 짓을 해서 얻을 이득이…. 혹시 형님께 협박이라도 당한 것은…?”

솔직히 나도, 애런이 왜 버림패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행동했는지는 모르겠다.

놈의 눈치라면, 자신이 에드윈에게 버림 받았다는 것을 알텐데.

아니면, 에드윈에게 따로 뭔가를 전달받았다든가.

둘 다이거나.

나는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나도 잘 모른다만. 이유가 있겠지.”

“그럼, 역시 협박을─.”

그때였다.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애런과 에드윈에게 각각 붙여뒀던 까마귀 중, 애런의 감시를 맡았던 까마귀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 에드윈의 침실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까마귀가 내미는 노트 한 권. 한 눈에 알 수 있는, 겹겹이 노트를 감싸고 있는 보안 마법.

나는 본능적으로, 이 노트의 내용이 중요한 카드가 되리라 느꼈다.

“어떻게 찾았지?”

“애런 황자가 초조한 얼굴로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 들어, 수상한 낌새를 느껴 황태자의 침실과 애런 황자의 침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런가.

나는 노트를 들었다. 리하르트의 동공이 떨리고 있었다.

“리하르트. 그대가 말한대로, 애런 황자가 협박을 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리하르트의 얼굴이 환해진다. 동생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협박으로 인한 강요로 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안도한 듯 했다.

다만.

“협박 당할 소재가 무엇인지는, 확인을 해봐야겠다만.”

노트에 손을 올렸다. 파직, 튀어오르는 전격. 가볍게 무시하고, 노트에 새겨진 보안 마법을 확인했다.

“꽤 수준이 높군.”

못 해도 궁중 마법사급의, 고급 인력이 시간과 정성을 쏟아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귀족의 저택 금고보다도 훨씬 보안이 좋았다.

이 정도면 궁중 마법사쯤 되는 인물에게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이만큼 정성을 들인 보안이라니, 안에 든 내용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마법사 수준이라면, 노트에 걸린 보안 마법의 숫자조차 다 헤아리지 못 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마저도 「해체」를 부여한 마력으로 갖다 대면, 맥 빠질 정도로 순순히 그 효과를 잃고 마력으로 흩어져 버리고 만다.

간단하게 노트의 보안 마법을 해체해 버린 내가, 커버를 잡았다.

“내용을 보지.”

노트를 펼친다.

내 옆에 붙어있던 아이리스도, 동생을 걱정하던 리하르트도 고개를 들이밀고, 노트의 내용물을 함께 읽었다.

“하.”

“….”

헛웃음을 흘리는 나와, 입을 다물어버린 아이리스와 리하르트.

페이지를 넘긴다. 몇 장을 넘기고, 또 넘겨도, 끝나지 않는 애런이 숨겨둔 추악한 비밀들.

“마약도 했군.”

쯧.

나는 혀를 찼다. 보아 하니 일종의 장부 같은데.

그래도 마약이면 약과다. 제국과 성국이 엄격하게 금지하곤 있지만, 암암리에 몰래 사용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자가 마약을 했다, 라는 사실이 퍼지면 그야 당연히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바닥을 치겠지만, 마찬가지로 황자인 애런을 벌하기엔 애매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인신매매까지 엮여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리하르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아이리스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픽 웃었다.

이러니까 에드윈에게 설설 기었겠지. 이런 장부를 작성해둘 거라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어쩌다 에드윈에게 걸려서 빼앗겼단 말인가?

“소아성애에, 시체성애라니. 이건 폭로하는 것도 문제군.”

노트를 덮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보다 보니 역겹기까지 했다.

마약을 했건, 아니면 사람을 죽였건 모두 큰 처벌은 피해갈 수 있는 황자라 하더라도, 어린아이를 뒤에서 사들여 죽인 다음 시간(屍奸)하고서 그 시체를 팔아치우는 짓을 했다라.

게다가 그 상대가….

“웃기는 짓을 하고 있었군.”

노스페라투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이 정도쯤 되니 오히려 폭로했다가 이후 찾아올 뒷감당이 더 무서울 정도였다.

게임에서 나오지 않았던 뒷 설정이 이런 거였다니.

“어찌할테냐, 리하르트. 네 말대로 애런은 에드윈에게 협박 당하던 것이 맞는 듯 한데.”

내 질문에, 리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악 다문 입술이 찢겨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분노와, 정의감, 그리고 슬픔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억지로 쥐어짜내듯, 리하르트가 말했다.

두 눈이 형형이 빛나는 듯 했다.

“제가…, 못난 저라도 믿어주신다면, 제가 애런을 벌하겠습니다. 기필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황궁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리하르트가 애런에게 다가갔다.

“애런.”

“아, 형님. 오늘 훈련은 쉬는 겁니까? 사람이 역시 좀 쉬면서 훈련도 하고 해야….”

능청스럽게 대답을 잇는 애런을 보며, 리하르트는 작게 이를 갈았다. 지금도 애런이 아이리스를 음해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와중인데도, 오히려 더더욱 태연한 얼굴로 자신은 그런 일과 관련이 없다는 듯이 구는 그 태도에, 리하르트는 경멸이 일었다.

이런 녀석을, 지금까지 동생이라고 생각했다니.

“형님.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결투다.”

툭.

리하르트가, 자신의 장갑을 벗어 애런에게 던졌다.

애런의 가슴팍을 때린 장갑이, 힘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이 광경을 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로 한 마디씩 씹어내듯 뱉어내는 리하르트의 눈이, 당혹스러워 하는 애런을 노려보았다.

“네 죄를… 너는 알겠지. 검을 들어라.”

“형님…!”

애런이 다급히 외쳤다.

“왜, 왜 그러십니까! 결투라니요! 제가 형님이랑 왜…!”

“정말 모른다고 할 셈이냐!”

평소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만을 보여주던 2황자의, 분노로 가득 찬 외침에,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전하께서 애런 전하께 결투를 신청하셨다…?”

“다른 분도 아니고 리하르트 전하께서…?”

그럼, 애런 전하께서 정말 뭔가를 저지르신 거 아냐?

아이리스 전하를 음해한 것도 애런 전하고?

그런 인식이, 서서히 퍼져 나간다.

그걸 위해, 스칼렛이 리하르트를 고른 것이다.

가장 신뢰 받는 황자.

태자가 된 이후 검을 놓고 정치질과 인맥 쌓기에 열중하는 황태자 에드윈과 달리, 사십을 넘은 나이가 되면서 하루도 검을 놓지 않은 적이 없는 그였다.

그렇다면 그가 재능이 있는가? 물으면, 오히려 에드윈보다도 못 한 재능을 타고 난 그였다.

그는 종종, 자신과 함께 단련하는 기사들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형님보다 아우가 못날수도 있는 일이지. 나는 형님보다 약한 게 부끄럽지 않네. 다만 앞으로도 노력할 뿐이지.”

누구보다 재능이 없는 자이면서,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막내 아이리스를 질투하지도, 시기하지도 않고, 되려 주변의 시기와 질투에 괴로워 할까 걱정하는 선인.

그런 리하르트의 말이기에,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스칼렛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런은 이걸로 끝이고.’

지금 상황에서 에드윈이 반응이 어떨지 살피기 위해 슬쩍 눈을 돌려, 에드윈을 보았다. 겉으론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으나, 스칼렛은 알고 있다.

지난 밤 애런을 조종하기 위한 도구였던, 애런의 장부가 자신의 침실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에드윈이 당황하던 것을.

보아하니 장부가 사라졌단 것을 애런에게는 당연히 말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궁지에 몰렸으니 슬슬 이를 드러내겠지.’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라도 문다. 하물며 제국의 황태자인 에드윈이다. 숨겨둔 한 수가 있을테지.

어제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다. 장부가 에드윈의 손에 있는 한, 애런을 버리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애런은 에드윈을 배신하지 못하니까.

단순히 아이리스를 음해하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말이 나오는 것보다, 장부에 적힌 내용 중 하나라도 유출 되는 쪽이 애런에겐 더욱 치명적이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런을 조종하는 데에 사용하던 장부가 스칼렛의 손에 들어와 버렸다.

애런의 몰락은 에드윈에게도 위협이 된다.

모든 걸 다 들켜버린 애런이, 에드윈까지 끌어내리려 할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나올 거냐.’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그렇기에, 스칼렛은 더욱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