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아르카디아 (4)
“리하르트 오라버니는 아마 수련장에 있을 거예요. 검독수리 기사단이랑 함께요.”
“그렇구나.”
그렇겠지. 내 기억상의 리하르트 역시도,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노력가였으니까.
다만 아이리스에게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몰랐던 사실을 아이리스 덕에 알게 됐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오라버니께 사람을 보낼까요?”
내가 맞장구를 치며 반응해주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아이리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하르트와 내가 접촉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까마귀를 보내둘게. 아이리스가 보냈다고 하면 될 거야.”
“으음. 그럼 이걸 가져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아이리스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도장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한 쌍의 날개를 펼친 검독수리 한 마리가 그려진 도장은, 황실의 일원임을 입증하는 물건이었다.
“이걸 리하르트 오라버니께 보여드리면, 오라버니도 믿을거예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리스가 건넨 도장을 받아 까마귀에게 전달했다. 스륵, 그림자에 스며들어 까마귀가 자취를 감췄다.
“언제봐도 놀라워요. 까마귀들은….”
아이리스의 눈이 까마귀가 사라진 그림자에 한동안 머물렀다. 오러 마스터인 아놀드조차 눈치 채지 못했으니, 확실히 놀라울만도 하다.
그보다, 황궁에 까마귀를 풀어놓는 건 신경쓰지 않는 건가.
나를 믿어서…, 라고 생각하면 기분은 좋았다.
나는 여전히 그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황궁에도 있잖아. 첩보부.”
“있지만요…. 조금 다르잖아요?”
아이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하긴, 내가 있으면 언제든 다시 되살려 낼 수 있는데다, 다들 내 권능을 빌려 그림자 속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까마귀가 이런 분야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긴 할테지.
게다가 내 권능을 나눠쓰는 것이라, 서로 간 유기적인 움직임도 가능하고.
황궁의 첩보부에도 인재가 없는 건 아닐테지만, 개인은 집단을 이기지 못하고, 까마귀들은 나의 권능과 통솔 아래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고 봐야하니 아무래도.
“정면 승부에선 아무래도 검독수리 기사단한테 밀리잖아, 그래도.”
“비교 대상이 황실 정예 기사단인 점에서 대단한 거잖아요.”
그것도 그런가.
하긴. 순수히 전투만을 위해 구성된 최고의 정예 기사단과, 네 부대 중 두 개 부대만이 전투용 부대인 까마귀가 비교가 가능하단 시점에서 엄청난 거긴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가 가능하다 뿐, 실제로 정면으로 맞붙을 경우 십중팔구는 까마귀 쪽이 순식간에 밀리겠지.
“그림자 속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요.”
“별 거 없어. 물 속이랑 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식으로.
시시한 잡담 따위를 나누고 있으니, 리하르트에게 보냈던 까마귀가 돌아왔다.
“명하신대로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무릎 위에 앉혀뒀던 아이리스가 급히 일어나 자리를 비키려 했다. 일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덥석 잡고는, 재차 무릎 위에 앉혔다.
“부, 부끄러워. 내려줘요.”
“뭐가 부끄러워?”
“저 사람이 보잖아요!”
단 둘인 건 상관 없는데,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스킨쉽은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
그럼.
“꺄아아악! 어딜 만져!”
나는 대뜸 아이리스의 엉덩이를 잡았다. 예상했던대로 하이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바둥바둥, 다리를 흔들며 벗어나려는 아이리스를 단단히 붙잡았다.
“놔요! 놔아! 또 만질 거잖아!”
“얌전히 안 있으면 또 만질 거야.”
그렇게 말하니 귀신 같이 잠잠해졌다.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진 채로.
놀리는 맛이 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재밌다.
한참을 그렇게 투닥거리고 나니, 제3자가 앞에서 보고 있단 것을 뒤늦게 깨달은 아이리스가 아예 터질 듯한 얼굴로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곤 웅얼거렸다.
“난 이제 몰라요. 알아서 해….”
토닥토닥. 등을 가볍게 만져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가 뭐라고 했지?”
우리 둘이 그렇게 한참동안 장난치는 사이 단 한 번도 꿈쩍하지 않았던 까마귀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늘 자정에 찾아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까마귀는 아까 아이리스가 내주었던 도장을 내밀곤, 다시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갔어요?”
“응.”
“….”
투닥투닥. 아이리스가 손으로 내 가슴팍을 때렸다. 별로 아프진 않았다. 솜방망이 같은 느낌. 아이리스도 그냥 투정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부끄럽단 말이에요.”
“알았어. 안 할게.”
할 거지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리스를 달랬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7시가 막 넘은 시각이었다. 아이리스의 허리를 붙잡고, 여전히 꿍얼거리는 중이던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리하르트가 오려면 다섯 시간 정도 남았네?”
“네? 네에, 그런데…, 앗. 자, 잠깐.”
뭐. 별 거 안 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장난을 조금.
간지럽힌다거나, 야한 키스를 쪽쪽 하면서 애를 태운다거나.
그런 걸 하며 시간을 보냈다.
*
자정.
아이리스는 한참 전에,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이대로 리하르트를 맞이할 수 없다며 씻고 나와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아이리스.”
“안 돼요.”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변태 같은 거….”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내가 눈을 굴리자, 아이리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동경하던 분이 사실은 그냥 푼수 변태라는 사실에 환상이 깨지는 거 같은 기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흘깃 노려보곤, 슬쩍 눈을 내리깐 다음 말을 덧붙인다.
“대신 그만큼 좋아하게 되긴 했는데….”
괜히 내가 상처받았을까봐 눈치 보는 점이 귀엽다.
아이리스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장난스레 말했다.
“원래 백만큼 동경한다고 치면, 지금은 얼마나인데?”
“으, 으음.”
“오십?”
“십…?”
그건 좀 너무 낮지 않나.
그래도.
“그럼 지금 구십만큼 좋아해?”
“……백구십?”
슬쩍, 나를 흘겨봤다가, 다시 눈을 돌려 내 시선을 피한다.
우물쭈물, 입술을 오물거리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잘도 그런 부끄런 소리를 하는 아이리스가 무척 귀여웠다.
“백구십? 이백이 최대야?”
“백이 최대예요.”
“근데 난 왜 백구십이지?”
“……엄청엄청 좋아하니까…….”
한계돌파 같은 건가.
아무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이윽고.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괜찮겠나?”
“아, 리하르트 오라버니…. 들어오세요.”
부드럽게 열리는 문, 잿빛 머리의 미남자가 문을 열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남자, 리하르트 아르카디아는 내 옆에 밀착해 있는 아이리스를 보곤 살짝 굳었다가, 이내 옆에 있는 나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까이 걸어왔다.
“두 사람의 관계가 범상치 않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확실히 무척 가까운 듯 하구나. 아이리스.”
“오라버니….”
그제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단 걸 떠올렸는지 아이리스가 슬쩍 떨어지려 했지만, 나는 일부러 보여주듯 아이리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에 붙였다.
아까 까마귀 앞에서 수치스런 경험을 했던 게 오버랩 됐는지 아이리스의 몸이 벌벌 떨렸지만 모른 척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페슈공.”
“음. 많이 늙었군. 겉보기론 나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데, 내가 존대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농담으로 한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내 쪽이 훨씬 동안인 건 맞으니까.
내 입장에선 나이 사십줄이 넘은 아저씨가 나한테 존댓말 쓰고 싶어하는 건 같아서 떨떠름했다.
반대로 리하르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아이리스를 흘긋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난이었다.”
“그렇겠죠….”
가볍게 한숨을 쉬는 리하르트. 나는 슬쩍 그의 몸을 훑었다. 배불뚝이인 에드윈과 달리, 매일 성실하게 단련해 어느 정도 완성 돼 있는 몸이었다.
“요즘도 매일 단련을 하나?”
“예. 매일 거르지 않고 합니다.”
쿵쿵.
리하르트는,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넘치는 듯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리스는 안다.
이 남자야말로, 황제의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재능 없는, 범재에도 미치지 못 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아마 리하르트 본인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검을 쥐었다.
“그런가.”
그의 형이, 결국 벽에 도달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좌절해버렸을 때, 리하르트는 포기하기보다,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리하르트는 믿지 않는다.
다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형처럼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검을 놓지 않았다.
경지가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자기 증명일 뿐이니.
내가 아는 리하르트 아르카디아는 그런 남자였다.
나는 그런 노력가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기에, 우리를 돕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리라.
“네 도움이 필요하다. 리하르트.”
“경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