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황실 (5)
애런.
클라우디우스 2세의 셋째 아들이며, 무예에 재능은 없지만 뛰어난 처세술과 숫자를 다루는 데에 탁월한 감각을 지녀 훗날 벌어질 내전에서 재무를 담당하게 될 남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루크를, 그러니까, 아이리스를 배신하는 놈.
놈이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야, 적어도 방학은 되어야 돌아올 줄 알았더니. 궁에는 무슨 일이더냐?”
“아버지께서 부르셔서….”
누가 봐도 아이리스 쪽이 상당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
나를 안내해야 하는 아놀드 역시, 표정이 살짝 굳은 상태다.
보아하니 여기서 끼어들어도 상관 없겠군.
아니지.
끼어들어서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이리스가 난처해 하는데.
“그쯤 하지.”
툭.
가볍게, 손을 뻗어 아이리스의 어깨에 올라온 놈의 손을 밀어내 치웠다.
갑작스럽게 옆에서 난입한 손길에 놀란 놈의 눈썹이 꿈틀거리지만, 이내 내 얼굴을 보곤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환하게 웃는 낯짝이 됐다.
“아, 이게 누구십니까? 제국의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기둥! 체페슈 전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
“폐하와 오랜만에 길게 담소를 나눴더니 피곤하다만, 이만 아이리스와 쉬러 가도 괜찮을지.”
노골적인 말 끊기.
이쯤 되니 애런 역시 평정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가가 잘게 떨렸다.
아무리 처세술에 능하다 해도 황자다. 이렇게 대놓고 앞에서 면박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하…. 많이 피곤하신가봅니다. 제가 실례했군요….”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그때 마저 얘기하지.”
다음에 시간이 나면.
말 그대로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을 끝으로, 가타부터 말을 더 붙이는 대신 아이리스의 허리를 팔로 감싸 당기고는 휙 돌아섰다.
“앗.”
“가자, 아이리스.”
아이리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척,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정작 아이리스 역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아놀드.”
“…가시죠!”
멍하니 이쪽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아놀드도, 은근히 신난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커다란 덩치를 으쓱으쓱 거리며 안내하는 기사단장의 뒷모습을 보니 덩달아 흥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놀드 기사단장.”
“부르셨습니까?”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나.”
내가 기억하는 루크는, 성정이 착해 애런을 받아주었을지언정, 그 올곧은 심지와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정신 덕에 애런이 배신했음에도 슬퍼하는 대신 차갑게 마음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겉으론 차갑고 냉혹해 보일지언정, 속으론 상냥하고 자애롭기 그지 없는 그녀라면, 과연 애런의 배신에도 무덤덤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애런을 꺼리는 눈치인 아이리스다. 그런 그녀가 애런을 중히 다뤘다면, 분명 애런이 그 뛰어난 처세술과 철판을 깐 연기 실력으로 아이리스에게 애걸복걸 매달렸을테지.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쳐내야 할 것은, 미리미리 쳐내야했다.
“으음. 알겠습니다.”
아놀드 역시, 내 말의 뜻을 내심 짐작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선 아이리스가 내 소매를 꾹꾹 당기며, “저는 괜찮아요” 같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글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나는 아이리스에게 겁을 주기로 했다.
“한 번만 더 괜찮다는 말 하면 엉덩이 찰싹찰싹 때릴 겁니다.”
“…벼, 변태예요? 어떻게 그런!”
샥. 두 손으로 자기 둔부를 가리는 아이리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스팽킹을 마렵게 하는 건 모르겠지.
가볍게 손을 살짝 들었다.
“히윽.”
겁을 먹은 듯 둔부를 가린 손을 떼지도 못 하고 내 손을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는 아이리스.
나는 앞서 가는 아놀드를 슬쩍 보곤.
“읏.”
두 손을 쓰지 못 해 무방비한 아이리스의 뺨을 약하게 꼬집었다.
“무, 뭐예요.”
“나는 손을 들었을 뿐인데 지레 겁 먹고 엉덩이를 가린 건 아이리스인데요?”
“으으, 오라버니가….”
“제가요?”
“엉덩이를 때리신다구….”
“지금 때린다곤 안 했잖아요.”
“….”
심통난 얼굴을 한 아이리스는 꽤 귀여웠다.
그리고 안심한 듯 둔부를 받치던 손을 풀었을 때, 나는 손을 휘둘렀다.
찰싹!
“꺄악!”
“무, 무슨 일이십니까?”
엉덩이를 맞고 팔짝 뛰며 비명을 지른 아이리스의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아놀드.
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장난을 좀 쳤을 뿐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렇습니까?”
아놀드가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자, 아이리스가 두 눈을 부릅 뜨며 내 옆구리를 툭툭 때렸다.
“오라버니!”
별로 아프진 않고, 오히려 성 내는 아이리스가 귀여웠다.
*
아놀드가 안내해준 내가 머무를 방.
내가 요청했던대로, 아놀드는 잠시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아이리스는 씻고 올래요?”
“그럴까요?”
아이리스가 자연스럽게 내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려 하길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씻는 건 네 방에 가서 하렴.”
“…아.”
무척 자연스럽게 욕실을 사용하려던 아이리스를 본 아놀드가 또 새로운 오해를 하는 듯 했지만, 이건 솔직히 어떻게 해명도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아이리스의 업보지 뭐.
얼굴을 붉힌 채 방을 나선 아이리스의 그림자에 까마귀 둘을 붙여두었다. 혹시라도 애런이 다시 다가올지도 모르니까.
“아놀드.”
“예, 전하.”
“아이리스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아놀드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오늘은 나의 안내역을 맡게 됐지만, 아놀드는 궁 내의 영향력으론 한 손으로 꼽힐 인물이었다.
“오러 마스터의 자질을 지닌 것도 아이리스 뿐이지.”
“예.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전하들께서는 전혀….”
“그 와중에 아이리스가 여신의 인정을 받은 용사가 되기까지 했고.”
“….”
아놀드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누누히 말하지만, 대륙의 세력 구도는 아르카디아 황실과 북부의 크로이체프, 그리고 거기에 대립하는 체페슈와 마탑의 프리드리히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체페슈의 가주였다.
그런 나에게, 황실의 상황을 상세히 말해주자니 심적인 부담감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놀드를 조금 달래주기로 했다.
“지금 나는 체페슈의 가주가 아니라, 아이리스의 연인으로 이 자리에 있음을.”
“…제가 지금까지 봐왔던 전하를 믿겠습니다.”
기억이 없으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믿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 …궁 내에서 현재 아이리스의 위치가 어떻지?”
아놀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게 협력하기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기다려주기로 했다. 결국 말해줄테니까.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아주 좋지만은 않습니다. 몇몇 전하께서는 아이리스 전하는 용사이시니 오히려 계승권을 박탈해야 한다고도 주장하고 계십니다.”
“쯧. 성국이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을텐데.”
“성국의 항의를 받는 건 황제 폐하지, 목소리를 내는 전하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다가 분노한 폐하께 징벌을 받으면?”
“한두 분이면 모를까, 목소리를 내지 않는 전하께서도 은근히 그런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시는 바람에….”
즉, 목소리 크게 내는 바람잡이 하나 벌해봤자 소용 없고, 그렇다고 조용히 지지하는 놈들까지 싹 다 벌하자니 남는 놈이 없다 이건가.
“무엇보다 태자 전하께서 그 부류에 속해 있다는 게 큽니다.”
“에드윈.”
“…예.”
짜증이 난 나의 목소리에, 아놀드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에드윈의 설정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나이 오십에 가깝도록 단련했으나 결국 오러 마스터는커녕 벽에 다다르는 것조차 하지 못 한 범재.
아르카디아 황가의 계승자는 다들 오러 마스터였기에, 모두 기본적으로 백오십에 가까운 수명을 지닌다.
게다가 죽기 직전까지는 노화조차 하지 않고 젊은 모습을 유지하니, 선대 황제가 죽지 않고 오래 옥좌를 지켜 태자 노릇을 오십년쯤 해도 그러려니 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황제가 되면, 백 년 정도는 옥좌를 지킬 수 있으니까.
보통 황제가 옥좌를 물려받을 때의 평균적인 나이가 오십이고, 첫 아이를 얻는 건 그 후로 오십 년 뒤.
그 오십 년 동안은 황후를 들이지 않거나, 아니면 황후를 들이되 비슷한 경지로 똑같이 불로장생 하는 여인을 들인다.
헌데,
“에드윈은 평범한 인간이니.”
“예….”
이번 대의 태자는, 백오십년을 늙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초인이 아니다.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 해진, 나이 오십의 배불뚝이 아저씨인 것이다.
초조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대로 황제가 되어봐야, 길어도 십년에서 이십년밖에 즐기지 못한다.
“그나마 태자비는 진즉 들여 아이는 낳았다고 했나.”
“그렇습니다만….”
그 아이조차 어느 정도 자질은 있을지언정 마스터가 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고.
이쯤 되면 이번 세대 황가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 와중에 아이리스는 오러 마스터까지 이제 겨우 몇 발자국이지.”
에드윈의 초조한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픽 웃었다. 아놀드가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보였다.
“무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새파랗게 어린 막내에게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심정도 이해한다.”
“…전하.”
“하지만 아르카디아가 어째서 아르카디아인가.”
이 거대한 대륙을 어째서 통일할 수 있었나. 이 넓은 대륙의, 수 없이 많은 귀족들을 모두 무릎 꿇릴 수 있었나.
그것은 체페슈도, 크로이체프도, 프리드리히도 가능하다.
허나 결국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황제는 아르카디아였다.
“황제와, 그의 핏줄로 이어지는 오러 마스터의 핏줄 덕이 아닌가.”
단순히 황제 개인 뿐 아니라, 직계라면 모두가 오러 마스터의 자질을 타고나, 빠르든 늦든 간에 모두 마스터 레벨의 초인까지 도달한다.
그렇기에 계승권 경쟁이 치열해질 것임을 알면서도, 황제는 대대로 많은 자식들을 태어나게 했다.
황제가 되지 못 한 형제들은, 아이를 낳더라도 오러 마스터의 자질을 이어주지 못했다.
아르카디아 황실이, 빛의 여신에게서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직계에게만 여신의 총애가 머무르기 때문이겠지.
즉, 오러 마스터의 자질이 없다면, 그 자질을 물려줄 수 없는 이라면, 여신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놀드.”
“…예.”
“그대는 누구의 편인가.”
빛의 용사.
오러 마스터를 뛰어넘어, 그랜드 마스터의 자질을 지닌 단 한 사람.
“…아이리스 전하이십니다.”
아이리스.
“그렇군.”
나는 그림자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마귀를 조용히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아놀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오러 마스터인 그조차, 내 그림자 속에 숨어든 까마귀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 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 했다.
만일 내 앞이 아니었다면,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기함하며 까마귀의 목을 치려 했을테지.
“에드윈에게 전하라.”
“하명하소서.”
“끄나풀을 부려 귀여운 짓거리를 하더군. 까마귀가 지켜보고 있노라고 전해두도록.”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까마귀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아놀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끄나풀이라고 하심은…?”
“애런.”
나는 웃었다.
“아놀드. 그대는 나를 막을텐가?”
“….”
“에드윈도, 애런도 그대가 지켜야 할 황실의 일원일텐데.”
아놀드의 안색이 굳었다.
나는 여유로웠다. 만일 이대로 아놀드가 자리를 박찬다면, 내 그림자에 숨어 있는 다섯 마리의 ‘발톱’이 그를 제압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놀드의 선택은 달랐다.
천천히, 내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아이리스 전하께서 제관을 물려받으신다면.”
진중한, 기사의 목소리였다.
평생을 황실을 위해 한 몸 바쳐온, 수 없이 많은 벽을 넘어 경지에 다다른 초인의 굳건한 충성심.
“체페슈 전하께서도, 저의 주군이 되겠지요.”
기사서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