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74화 (74/140)

EP.74 황실 (4)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게 자꾸 튀어나오니 원.

황궁에서의 볼일이 끝나고 나면 아이리스를 통해 여신이랑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여신이라면 기억을 찾는 데에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에 대화했을 때 물어볼걸 그랬나.

“편히 말하게, 편히.”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황제가 말했다.

황제의 입장에서야 겉보기만 좀, 아니 많이 다르지 실제 나잇대는 비슷한 동년배에다, 눈치 볼 것도 없이 얼추 대등한 관계이니 편하게 말하라고 하는 걸테지만.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반말하는 것 같아서 좀 묘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여자친구랍시고 그 노인의 막내딸을 데려온 상황이고.

“…그러지.”

그래도 여기서 싫다고 튕기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니,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아이리스. 나한테 힘을 줘.

그녀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더니, 황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둘이 정말로 교제하는 중이라는 겐가?”

나를 보는 시선이 “네놈이? 양심 있는 거냐?”라고 말하는 듯 날카롭게 푹푹 찔러댔다.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저 얼굴이랑 나랑 누가 어떻게 동년배라고 생각하겠는가.

다만 그걸 직접 입 밖으로 말할 수도 없어서,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후….”

황제가 피곤한 기색으로 안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왕년에 잘 나갔을 오러 마스터가 세월에 스러지는 걸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오러 마스터쯤 되는 초인에게 노화란 무엇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다.

일반적인 사람이, 천천히 성장하고서, 고점을 찍고서 다시 천천히 노화해 가는 것과 달리, 경지에 다다른 오러 마스터는 죽기 전까지 노화하지 않는다.

온 몸에 깃든 초월적인 힘이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힘이 다 해버릴 때에, 지금껏 회피해 온 시간의 흐름이 단숨에 초인의 육체를 약하게 만든다.

황제는 빠르면 내년, 늦으면 그 다음해에 죽는다.

지금 와서 그랜드 마스터로 넘어가는 벽을 다시 뚫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푸른 장미 정원」에서, 황제는 마지막까지 벽을 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죽었다.

자신과는 달리 벽을 넘어버린 검성 니콜라이를 향한 질투와 원망과 함께.

게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생에 대한 후회와 원망만을 남기는 바람에,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성국의 지지와 용사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지만 막내인 루크와, 긴 세월 태자로서 자리를 지킨 장남 에드윈.

애초에 루크는 옥좌에 관심도 없는데 어떻게든 용사인 그를 황제로 세우려는 성국과, 그런 성국을 경계하고 용사인 루크를 두려워 한 에드윈, 그리고 그런 둘 사이를 이간질하며 콩고물을 얻어 먹으려 한 나머지 황실의 인원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손은 써둘테지만, 만일 정해진 흐름인 것처럼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경우 아이리스가 내전의 축으로 서서 고생하게 될 텐데. 남자친구 입장에서, 결혼을 생각 중이니 예비 남편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가 영 달가운 상대는 아니지만….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럼 너라면 마음에 들 거 같으냐?”

“아직 딸이 없어서 모르겠군.”

왠지, 대화를 하다보니 마음이 편해지는 게.

나도 모르게 편한 말투로 황제를 대하게 돼 버린다. 황제는 내 능청에 눈가를 찌푸리곤, 건너편에 앉으라는 듯 턱짓했다.

“거기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앉기나 하게. 아이리스, 너도 앉거라.”

내가 먼저 자리에 앉자, 아이리스가 쭈뼛쭈뼛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을 차지하는 것을 본 황제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다더니.”

“글쎄. 다른 아들들보단 잘 키운 것 같다만.”

“…흠.”

그것도 그렇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아이리스는 언제라도 계기만 있다면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상태고, 거기에 더불어 성검의 가호까지 있다.

유난히 인재가 없는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특출나다는 말로 설명 될 수준이 아니었다.

“수백년간 이어져 온 핏줄이 어찌 저 아이한테만 이어졌는지.”

그 말대로다. 북부의 크로이체프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검성」의 재능이 있다면, 황가 역시 대대로 오러 마스터를 배출했다. 아니, 황제의 직계라면 거의 대부분이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

이것은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전수되었던 「검성」과의 차이점이었다.

다수의 오러 마스터. 한 명만 있어도 전장의 판도가 뒤바뀔 초인이, 한 명 두 명을 넘어 열 명에 가깝다면, 그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억제력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르카디아 황실은 제국의 황가일 수 있었고, 대륙의 통일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도, 클라우디우스 2세의 자식 중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인 건 아이리스가 유일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대에겐.”

대충 상황이 굴러가는 걸 파악했다.

아이리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수없이 자식을 낳았음에도 오러 마스터의 자질을 지닌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황실의 직계는 모두 오러 마스터’라는, 황실의 특별함을 내세워 제국을 통치했을 그 권위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이다.

거기에 오러 마스터조차 되지 못한 이가 태자가 되어 다음 세대에 제관을 물려받는다는 사실 자체도 상당한 반발이 생겼을테니.

그 때, 원래라면 황실과 서로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던 체페슈 쪽에서, 되려 황실을 지지해준다면.

“…하나만 묻겠네.”

“듣지.”

황제의 가라앉은 목소리.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예상이 갔다.

“아이리스를 아내로 삼겠다는 건, 태자를 지지해주겠다는 건가?”

순간 옆에서 아이리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마 황제가 보는 앞이 아니었다면 내 손을 꼬옥 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겠지.

뭐, 아이리스가 황제 자리에 탐을 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만약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아이리스를 만나면서 그런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있다는 것에 서운해서 그러는 쪽에 가깝겠지.

나는 아이리스를 안심시켜줄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아니라고?”

“그저 좋아서 만나는 것일 뿐, 정치적인 속셈은 전혀.”

아이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고.

황제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네 양심은 어디 갔나?”

아 글쎄.

겉보기로는 당신이랑 내가 아니라, 나랑 아이리스가 동년배라니까?

“이 제국에서 제일 부유한 놈이 도둑놈이라니.”

황제가 삐딱한 얼굴로 나를 비꼰다.

거 참.

*

황제와의 대담이 끝났다.

마지막에 나서는 우리 둘을 보며, 황제가 아이리스를 불러세웠다.

“아이리스.”

“네, 아버지.”

“…행복하더냐?”

그것은 아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한 질문에 가까웠으리라.

우리가 이 알현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은연 중에 풍겨오던 위정자의 위엄까지도 집어치운 채, 순수히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도 지을 줄 아는 인간이었는가.

아이리스는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

잠시 입을 다문 채 아이리스를 물끄러미 보던 노인은, 이내 시선을 내게 돌렸다.

나를 보는 시선이 썩 달가워 보이진 않았다. 나도 당신 그리 달갑지 않아.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던 황제는, 끝끝내 황제가 아니라 아이리스의 아버지이길 택한 듯 했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아이리스의 표정까지 덩달아 복잡미묘해졌다.

기억이 없으니 단언할 수 없지만, 황제의 성격상 아이리스에게 그리 살갑게 대해주진 않았을테니.

나는 입을 여는 대신 아이리스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오라버니….”

아이리스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살짝 간질거렸다.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문을 닫고 나오니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해주었던 아놀드가 다가왔다.

“나오셨습니까!”

“아놀드 기사단장.”

아까 잠깐 본 게 끝이지만, 정말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머무르실 곳으로 이 아놀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이리스는?”

“아…. 저도 오라버니를 따라가도 될까요, 아놀드?”

듣기에 따라서, 아주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아놀드 역시 잠깐 표정이 멍해졌다가, 이윽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물론이지요! 두 분의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이거 분명 뭔가 오해한 거겠지.

정정해줘야 하나 싶다가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주 틀린 오해가 아니기도 하고. 게다가 아이리스는….

“아니, 그게, 아니, 아….”

당황하고 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는 것도 나름 쏠쏠하게 재미있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아이리스와 좀 더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볼 셈이던 나로서는 역시 오해를 정정하지 않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냐! 아이리스, 언제 돌아온 게냐!”

칼칼하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저 복도의 끝에서 아이리스의 은발보단 오히려 회색에 가까운 잿빛 머리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궁에 돌아왔다면 이 오라비를 만나러 왔어야지!”

“…아, 네. 애런 오라버니….”

떨떠름한 아이리스의 반응과, 낯익은 이름.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새끼, 원작에서 루크의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에드윈이 심어둔 첩자이던 새끼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