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황실 (2)
길었던 쇼핑을 끝내고, 누님과 데이지를 양 팔에 낀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럭저럭 만족스런 쇼핑이었는지 둘 모두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정작 나는 꽤 피곤해진 상태였지만.
누님과 데이지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 나른하게 늘어진 채였다.
“스칼레엣.”
“왜애.”
침대에 늘어져서, 나른하게 서로 마주 본 채 실실 대며 웃는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그러고 있기만 해도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까.
잠시 그렇게 눈을 마주 하고 아무 말 없이 웃다가, 누님이 꾸물꾸물 몸을 가까이 하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있지. 나 오늘 그거 샀다?”
“뭘 샀는데?”
짐짓 중요한 얘기라는 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게 귀여워, 나 역시 목소리를 낮춰 대답해줬다.
누님이 살풋 눈웃음을 지으며, 내 귀에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엄청 야한 구멍 뚫린 속옷.”
“허.”
표정 관리가 안 됐는지, 그만 헛숨을 뱉어버린 나를 보곤 누님이 실실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다.
“왜? 기대 돼?”
“아니. 그야, 당연히 기대되긴 하지.”
“흐흥. 그런데?”
“그런 속옷을 거기서 팔아? 왜?”
생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옷가게에서, 좀 야한 옷도 아니고 구멍 뚫린 속옷을 도대체 왜 판단 말인가?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다는 얼굴로 물어보자, 누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흣. 스칼렛이 힘들다며 쉬는 사이 가게 뒷문으로 나가서 사온 거야.”
“아.”
옷가게에서 산 게 아니구나.
그럼 설마.
“일부러 나 지치게 한 거야? 나 몰래 다녀오려고?”
“으, 응? 어, 응. 그렇지!”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쇼핑했는데 내가 지쳐서 나가떨어진거구만.
“어디서 산 거야? 속옷 가게에서 그런 걸 파나?”
“으, 으응, 성인용품점….”
“그런 게 용케 여기 있네.”
수요가 있나?
뭐, 나 말고도 알아서 잘 애인을 사귀는 생도들도 있을테니 수요가 아예 없진 않겠지.
나는 슬쩍 옆에 늘어져라 누워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데이지를 보곤, 누님에게 물었다.
“데이지 건?”
“같이 사왔지.”
“잘했어.”
“나 잘했지?” 하고 묻듯 바짝 몸을 가까이 붙이고 부비적 대며 응석을 부리는 누님이다. 기특하다는 의미로 엉덩이를 토닥토닥 만져주자, 으응─, 달콤한 숨을 토하며 내 손에 엉덩이를 비빈다.
“꼴려?”
“몰라.”
“어허. 대답해야지.”
“으으응. 나쁜놈.”
“나 나빠?”
“안 나빠….”
참 나.
귀엽구만.
엉덩이를 꽉 쥐고, 귓불을 앙 깨문다.
“흐읏.”
눈을 가늘게 뜨고, 파르르 떨리는 몸. 그대로 누님을 끌어안고, 작게 속삭인다.
“꼴려?”
“흐응, 응. 꼴려….”
그대로 누님의 젖가슴에 손을 올리고, 단추를 풀기 시작─.
─똑똑.
“아.”
“읏.”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에, 야릇하던 분위기가 단숨하게 풀려버린다. 얼굴을 붉히던 누님이 내 가슴팍을 꾹 밀고는, 스스슥 뒤로 물러나선 흐트러진 차림새를 단정하게 고쳤다.
나도 사람이 찾아온 마당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옷을 고쳐 입곤, 배꼽을 훤히 드러낸 채 색 색 잠들어 있는 데이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똑똑─.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문을 열자, 낯익은 은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눈동자. 눈이 마주치자, 잘게 떨리는 동공.
아이리스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아이리스?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꾸벅, 아이리스가 허리를 숙인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달빛을 받은 은발이 반짝반짝 환히 빛났다.
그나저나 이 시간엔 정말 웬 일이지.
보통 아이리스와 만나는 시간은 이른 낮이거나 늦어도 저녁 쯤인데.
“저기, 급하게 알려드려야 할 게 있어서….”
“뭐길래 그래요? 자아, 당황하지 말고. 심호흡 해봐.”
“네, 네에. 후우─.”
“하아─.”
“하아─.”
“다시 후우─.”
“괘, 괜찮아졌어요.”
흠.
제대로 하는지 배에 손을 얹어보려 했는데, 아쉽게.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곤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아, 저기. 놀라면 안 돼요, 오라버니.”
“아이리스가 그렇게 당황하는 게 나한테는 더 놀라운데요.”
“…아버지가, 오라버니랑 한 번 보고 싶다고….”
“…아.”
황제가 왜? 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곧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힘들까요?”
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은발의 절세미소녀가 그 양반 딸이고, 나랑 사귀는 중이니까.
그래. 딸이 남자친구를 사귄다는데, 만나고 싶어질 수도 있지.
근데 아버지란 인간이 황제고, 딸 남자친구는 황제 못지 않은 위세를 지닌 공작이라 스케일이 좀 커서 문제지.
황제가 정말 나를 순수하게 딸 남자친구로 생각해서 불렀을 리는 없을테고.
그래도? 황가랑 대립하던 건 내 할아버지랑 아버지지 내가 아닌데 상관 없지 않나?
일단, 내 눈치를 살피는 아이리스를 달래기로 했다.
“뭘 그리 겁 먹고 있어. 괜찮아요. 같이 가요.”
“…정말로?”
고개를 끄덕여주자 표정이 환해진다.
음.
“일단 들어올래요? 누님이랑도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아, 네.”
아이리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밖에서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은 누님이 새침하게 의자에 앉아 아이리스를 흘겨봤다.
“아, 그.”
“이쪽은 내 누님.”
어색하게 누님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리스가 좀 불쌍해서, 소개를 좀 해주기로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퉁명스런 누님의 대답.
야한 짓을 하다 말고 아이리스 때문에 끊겨서 심통이 난 것 같은데.
덕분에 아이리스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다.
나는 괜히 심술을 부리는 누님의 뺨을 쭉 꼬집었다.
“사이 좋게 지내, 누님.”
“아흐아…!”
누님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힌다. 지켜보는 아이리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녀에겐 일전에 대략의 사정과 함께 누님과 나의 관계도 알려주었으니.
아이리스 뿐 아니라 누님도 똑같이 나와 천칭의 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대라고 하니, 아이리스도 납득하긴 어려워도 이해한 듯 했었다.
다만,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영 적응이 안 되는 눈치.
“이거 놔아…!”
손톱을 세우는 누님을 피해 뺨을 놔줬더니, “씨이”하고 나를 노려본다. 빨개진 볼을 부여잡고 씩씩 거리다, 누님의 눈길이 아이리스를 향했다.
“전하.”
“네, 네?”
“스칼렛이랑 결혼할 생각이신가요?”
“엣.”
갑작스럽게 꽉 찬 돌직구. 아이리스가 얼어버렸다.
대답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리는 아이리스를, 대답을 들을 때까진 안 놓겠다는 듯 지그시 응시하는 누님.
결국 아이리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마도, 요….”
“그럼 제가 스칼렛의 첫째 겸 시누이니까 말 좀 편하게 해도 되죠?”
완전 제멋대로다.
나는 누님의 뒤 없는 돌격에 깜짝 놀라서, 아이리스의 반응을 살폈다. 이거는 아무래도 아이리스도 조금 화내지 않을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첫 번째는 당연히 저잖아요.”
아.
거기서 반응하는구나?
“흐응.”
누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이리스를 흘겨본다. 아이리스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은근한 신경전.
먼저 입을 연 것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던 누님이었다.
“첫 번째라고 주장하면서, 스칼렛이랑 아직도 말을 트지 않았네요?”
“읏. 그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글쎄. 제 눈에는 그냥 어색해서 그런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아이리스가 나를 휙 돌아봤다. 정말이냐는 듯 매서운 눈길에, 나는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아이리스.”
“거 봐요! 오라버니가 괜찮으시다잖아요!”
“흥. 그걸 어떻게 눈 앞에 대놓고 말하겠어? 그렇지, 스칼렛?”
“하하.”
여기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리도 없고, 아니라고 해봤자 “눈 앞에서 대놓고 말 못 한다”라고 하면 제자리 걸음이다.
누님도 짓궂긴.
“오라버니이…!”
여기선 아이리스의 편을 들어줄까 하다가, 울상 짓는 아이리스를 보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아이리스가 기대를 담아 나를 올려다 본다. 나는 괜히 뜸을 들였다. 아이리스의 부드러운 어깨를 살살 만지다가.
“오빠, 라고 불러보렴.”
“…!”
깜짝 놀란 표정.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듯한, 배신감에 떠는 얼굴.
두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지, 진짜로 저 어색해요…?”
이만큼 놀렸으면 됐나?
“아뇨. 그냥 재미로.”
“나빠!”
“그래도 오빠라고는 한 번 불려봤으면 좋겠어요.”
“…오, 오빠…?”
귀엽긴.
아무튼. 나름 성공적인 소개라면 소개였다. 누님이랑 아이리스가 묘한 라이벌 구도를 만드는 것 같긴 한데.
음.
여기에 누나까지 들어오면 어떻게 되지?
난장판이 벌어질 것 같긴 한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건 일단 황제가 나를 불렀다는 거니까.
“수도엔 언제 들리면 될까요?”
“아버지는 가급적 빨리 와달라고….”
이거 참.
아카데미에 다니긴 하는데, 정작 아카데미가 아니라 밖을 더 많이 다니는 것 같은데.
진짜 계속 다닐 의미가 있나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