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중간 시험 (3)
발광하는 여신을 진정시키고, 아이리스와 좀 더 산책을 즐기다 헤어졌다.
질문의 답은….
극단적으로 표현해 내가 바알의 자리를 대신 하는 수준만 아니면 뭐든 전적으로 지지해주겠다고, 여신에게서 확언을 얻어냈다.
너무 쉽게 대답을 해줘서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
내게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협조를 얻어낼 정도로 내가 여신에게 호의를 산 일이 있었나? 하면 잘 모르겠다.
분명 기억을 잃어가며, 목숨까지 걸고 마왕이랑 싸우긴 했지만, 그 결과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히긴 했지만….
만일의 경우 내가 수틀려서 세계의 멸망까진 아니더라도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대륙의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여신에겐 본말전도가 아닌가?
그럴 생각은 없기야 하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한들, 정말 그것을 믿느냐는 별개이니까.
하지만 여신은 흔쾌히 나에 대해 지지해주기로 했다.
비록 아이리스의 입을 빌어서이긴 하나, 여신쯤 되는 이가 직접 선언한 약속을 깨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스스로의 격을 훼손하는 일일테니.
결국 그만큼 나를 믿으니까, 혹은 그만큼 내게 고마워서, 라는 걸텐데.
잘 모르겠다.
이것도 나중에 누나랑 만나면 얘기해봐야지.
다음날.
‘결투학’의 시험장.
솔직히 말해서, 말이 번지르르 해서 결투학이지 사실은 그냥 실전 대련 수업이나 다름 없다.
학기말에 예정 돼 있는 서열전.
1학년의 결투학 시험은, 입학 후 첫 서열전을 맞이하기 전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중간 점검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련장 위에서 몸을 펴고 있는 나와, 건너편에 서 나를 고요하게 지켜보는 안나.
잠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
“네.”
“…오랜만. 입니다.”
대련장 위는 우리 둘 뿐이다.
학기말의 서열전 때와는 달리, 지켜보는 관중도 없다.
지켜보는 사람은 평가를 위한 교수와 조교 뿐. 다른 시험장에서는 교수 대신 조교만 들어가 있을텐데, 그만큼 우리 둘은 중요하다는 거겠지.
나는 웃으며 안나에게 답했다.
“말하는 게 꽤 능숙해지셨네요.”
“…감사합니다.”
어딘가, 나를 어려워 하는 듯 한 기색.
나를 피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일전에 그녀가 당당히 선언했던 것처럼, 두 눈에는 타오르는 듯 한 열기가 있었다.
누구보다 차가워 보이는 설원의 공주가, 사실은 이렇게나 열정적이다.
그 열기의 대상이 나라는 건 어떨까 싶지만.
아무튼.
보아하니 나를 피하는 건 아니고. 무언가, 미묘하게?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치였다.
“제가 어려워서 그래요?”
“네, 네?”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번쩍 들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도리도리.
이렇게 보니 귀여워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아이리스가 잔망스러우면서도 정작 부끄러움 많은 타입의 여동생이라면, 안나는 소심한 타입의 여동생 같은 느낌이다.
동급생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연상이기도 하고.
백 살 가량이지만.
“어, 어렵, 어렵다니. 그렇지 않습니다….”
손에는 검을 들고서, 파닥파닥 휘저으며 내 말을 부정한다.
검은 내려놓고 해도 될 텐데.
하긴.
곧 시험이고?
그림자를 길게 뽑아 창처럼 쥐었다.
서열전이 아니라 ‘결투학’이니까. 적당히 조절해서 상대해주지 않으면, 뭔가 보여줄 새도 없이 당해버린 안나의 점수가 깎여버릴테니.
“자세한 건.”
“으….”
기세가 변한다.
그림자 창이 손에 쥐이자, 어설프던 안나의 자세가 순식간에 '검사'의 것으로 일변했다.
“시험을 치루고 나서, 남는 시간동안.”
“….”
굳게 다문 입.
나를 꿰뚫을 듯 강렬하게 응시하는 눈빛.
저것이 검성.
시작하라는 교수의 말과 함께, 안나의 몸 주변으로 서리가 피어올랐다.
“그때 차분히 얘기합시다.”
팟─.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신형이 격돌했다.
*
“졌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내 승리.
안나도 예상했던 결과라고 생각했는지, 별로 시무룩한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까지 결투의 여운에 잠긴 상태라, 승패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야.
“…후우. 정말, 대단하십니다….”
처음에는 이제 꽤 능숙해진 중앙의 말로 중얼거리더니,
《저번에도 보긴 했지만 정말로 체페슈 전하가 부리는 그림자는 감탄스러울 정도….》
흥분했는지 어느새 북방 언어로 돌아가서는 신나게 떠들다가,
“앗….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분위기가 조금 식은 것을 깨닫곤 머릴 숙여 사과하는 걸 보니까.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을 붉히곤 눈을 피하는 안나를 구경하고 있자, 마침 시험이 끝났는지 옆 시험장에서 나온 사샤가 이쪽을 보곤 다가왔다.
“전하. 시험은 끝나셨나요?”
“사샤? 오랜만이에요.”
혼자서 신나게 떠들던 게 부끄러웠는지 입을 다물었던 안나가, 나와 사샤가 즐겁게 떠드는 걸 보니 심통이 났는지 사샤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읏. 뭐예요, 공녀님.”
《시험은 잘 쳤어?》
“네…. ”
슬쩍 내 눈치를 살핀 사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왜 중앙말 안 쓰세요? 이제 잘 하시잖아요.”
“그러게요. 저한테는 비밀로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안나?”
“읏…!”
냉큼 사샤의 편을 들며, 안나의 이름을 불러주니 금세 뺨이 새빨개진다.
“사샤. 아무래도 안나가 저를 어려워 하는 것 같아요. 어떡하면 좋죠?”
부끄러워 하는 안나 몰래 사샤에게 눈치를 주자, 사샤가 방긋 웃었다.
짓궂은 소악마의 미소였다.
“그러게요! 이런, 공녀님! 전하를 곤란하게 하면 어떡해요!”
“으, 으….”
안나가 나를 어려워 한다.
사실 인간 관계에서, 사람을 대하기 어려워 하는 게 뭐 그리 큰 잘못이겠는가?
사샤도 나도, 심지어 안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되려 마음 편하게 조리돌림이 가능하다.
진지하게 문제 삼을 수 없는 문제니까.
“전하께서 상처 받으시면 어떡해요, 공녀님!”
“맞습니다. 안나가 자꾸 저를 피하면, 상처받을지도 몰라요.”
“으…! 안 피했, 습니다…!”
아예 쐐기를 박아버리자, 그제야 안나가 빽 대꾸했다.
히죽.
잘 걸렸다는 듯 사샤가 웃는다.
저거저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를 놀리는 거에 신바람이 들어서는.
“정말요? 안 피해요?”
《안 피한다니까!》
“어? 근데 왜 중앙 말 안 써요? 전하를 따돌림 하시려구요? 따돌림은 나빠요, 공녀님!”
“너어…!”
사샤의 이죽거림에 화를 내면서도 내 눈치를 보듯 다시 말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바뀌었다.
이 와중에도 착실하게 사샤의 조언은 따르네.
사이가 좋은 주종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안 피해! 안 어려워 해!”
꺄악꺄악.
사샤와 안나가 난리다. 주변의 시선이 몰릴까 싶어 미리 그림자로 소리를 차단 시켜놓길 잘 했다.
일단, 시험도 끝났으니.
짝짝.
박수로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일단 어디를 좀 갈까요. 오랜만에, 셋이서요.”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몇 번 방문했기 때문인지, 안나는 나를 거리낌 없이 그녀의 기숙사로 안내했다.
여기서 아이리스에게 했던 것처럼 “외간 남자를 함부로 들이네” 같이 소리를 한다면 그건 진짜 눈치 없는 새끼거나 아니면 그냥 안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것일텐데, 나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도 않고 안나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미리 구비가 돼 있던 다과를 사샤가 가져오고, 안나와 사샤가 내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았다.
“….”
내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있으니 자연스럽게 침묵 상태다.
안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우물쭈물 대는 상태고, 사샤는 그런 안나를 옆에서 은근히 재촉 하는 중.
“…많이 완숙해지셨더군요, 안나.”
“…핫. 네, 네? 아…! 감사합니다…!”
내가 먼저 입을 여니 화들짝 놀란다.
무슨 얘기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데.
옆에서 사샤가 “으휴, 푼수” 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그간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몰랐는데, 귀엽네요.”
“저, 저 말인가요?”
“그럼 사샤한테 하는 소리겠어요?”
어딘지 미묘한 표정의 사샤.
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나.
“사샤는 처음부터 저랑 대화가 잘 통했잖아요. 귀엽지 않다는 게 아니라.”
….
이건 좀 작업 거는 듯 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오해는 풀린 것 같은데, 사샤의 미묘한 표정은 그대로다.
조금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쿠키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오독. 오독.
입 안에서 바스라지는 달콤한 쿠키. 입맛을 다시며 사샤가 내어준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말을 이었다.
“검술은… 원래부터 제가 감히 평가할 경지가 아니었으니, 그 외를 평가해보자면…. 아,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해 혹여 기분 나쁘시다면 하지 않겠습니다만.”
“아, 아뇨! 부탁드립니다!”
“네에. …으음. 전체적인 수준이 한 단계 올랐다고 느꼈어요. 움직이는 속도도, 검을 내지르는 빠르기도, 전체적인 상황 판단 능력도….”
거기까지 말하곤, 목을 축이듯 차를 한 모금 다시 넘긴 뒤.
“기껏 해봐야 두 달 전에 한 번 겨뤄본 제가 평가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동안 많이 성장하네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좀 이상한 광경이긴 했다.
나랑 안나는 같은 1학년이었고, 방금까지 서로 실기시험으로 결투까지 하고 오지 않았던가?
내 나이가 실제로는 백살이니 어쩌니 해도, 기억이 없는 나한테 안나는 그냥 조금 어린 내 또래다.
그런 상대에게 이렇게 윗사람이 평가하는 듯한 눈높이에서 평가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는데….
“감, 감사합니다. …영광, 킁, …입니다….”
왜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