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57화 (57/140)

EP.57 중간 시험 (1)

일단.

누나랑은 잠깐 헤어지기로 했다.

당장 계약을 맺기엔 준비도 덜 된 상태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찾아온 것이었으니 아카데미에 돌아가기도 해야했으니까.

“내가 알아서 다 준비해놓고 있을테니까, 가서 다른 애들이랑 합의부터 보고 와.”

라고.

아직 아이리스와 제대로 합의가 된 상태가 아니긴 하니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가 도울 건?”

“편지 보낼테니까 거기 적혀 있는 것 좀 보내줘.”

“그 정도야 뭐….”

기왕 아카데미에 가는 거 누나를 데려가고 싶었으나, 누나 쪽에서 오히려 질색을 했다.

“다리도 지금 못 쓰는데 거기 가서 뭐 하냐? 어차피 내년에 거기 입학 할 건데.”

그렇게, 방학이 오기 전에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테일러 영지를 떠났다.

누나 본인은 기억을 잃은 나보다는 다리를 좀 못 쓰는 자기가 낫다며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솔직히 말해 달갑진 않았다.

어쨌든 다리를 못 쓰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언제까지고 누나가 다리를 못 쓰게 둘 수도 없으니, 아카데미로 돌아가는대로 방법을 찾을 셈이었다.

기억을 찾는 방법도 찾아보고.

“스칼렛! 잘 다녀왔니?”

워프 게이트를 타고 아카데미로 돌아오자 레티 누님이 날 반겼다.

이틀만에 보는데도 뭐가 그리 달가운지 품에 폴짝 안겨서 부벼오는 누님을 꼭 안아줬다.

“누님. 나 보고 싶었어?”

“그럼 보고 싶었지. 안 보고 싶었겠니?”

한참동안 누님과 마주 끌어안고서 대화를 나누다, 문득 주변이 조용하단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아무 기척도 없는 걸 알고서 누님을 끌어안았던 것이지만.

“아무도 없네. 원래 이 시간에는 사람이 꽤 많지 않나.”

가까운 거리라면 굳이 워프 게이트를 쓸 필요도 없지만, 본가로 돌아가는 생도와 사용인, 혹은 본가에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시간대 워프 게이트는 늘 활발히 활성화 돼 있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평일 정오 때처럼 인기척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곧 시험 기간이잖니.”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유롭다고 해서 다른 생도들까지 여유로울 리는 없지.

오히려 내 쪽이 다른 생도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하지 않을까.

곧 시험이라고 해도 크게 걱정 되진 않았다.

그나마 내가 자신 없을 법한 필기 위주의 1학년 강의는 교수들이 나를 드랍했고, 실기 위주의 2학년 강의를 듣고 있는 중이니까.

남아 있는 1학년 강의는 ‘고대 마법’과 ‘결투학’인데.

결투학은 1학년 강의 중 가장 실기에 가까운 강의이고, ‘고대 마법’은 애초에 아카데미 내에서 실제로 구현 가능한 게 나밖에 없다.

아무리 이론이 중요하다한들, 내가 수석이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하다.

“자신 있니?”

이러한 계산을 바탕으로 내가 퍽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손장난을 치며 누님이 은근히 물었다.

별로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험?”

“응. 시험이래봐야 대단할 건 없지만, 그래도 아예 준비를 안 한 것과 준비를 한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

음.

“누님이 2학년 수석이잖아.”

고개를 끄덕인 누님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가르릉─. 꼭 고양이마냥 턱이며 뺨을 손바닥에 부비적 대며, 누님이 내 품 위로 부드럽게 올라 탔다.

“누님이 가르쳐주면 되지, 그럼.”

은근한 목소리. 부드러운 살갗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속삭이자, 누님의 눈매가 풀렸다.

“응큼하긴. 뭐가 배우고 싶은데?”

“글쎄.”

레티시아의 허리가 뭉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의 그림자가 겹쳤다.

다음 날.

시험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고대 마법’ 강의를 들으러 가기 위해 허리를 붙잡고 끙끙 앓으며 자체 휴강을 외치는 누님을 침대에 눕혀두고 데이지와 함께 강의실로 향했다.

며칠만에 들어오는지.

오랜만에 내가 출석하자, 강의실 내부의 시선이 순식간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맨 뒤로 가자.”

“네.”

뒤에서 차분히 따라오는 데이지를 데리고, 늘 앉던 맨 뒷줄의 자리에 착석.

그리고 잠시 시간을 보내면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전하.”

서로 달갑게 웃으며 인사를 주고 받고, 아이리스가 옆 자리에 앉는다.

최근 몇주간은 내가 자리를 비우긴 했으나, 학기 초부터 꾸준하던 광경이다.

다른 생도들 역시 이쪽으로 시선을 잠깐 줬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나와 황녀가 맨 뒤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히 부담을 느끼는 듯 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곧 시험기간이기도 하고.

“시험 준비는 잘 돼 가시나요?”

옆에 앉은 아이리스가 물었다.

사실 이 강의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마법 강의의 수석은, 당연히 유일하게 고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일 것이라는 것을.

아이리스도 그걸 모르지 않을텐데, 굳이 이렇게 말을 붙인다는 건….

“네, 전하께서는?”

남들 앞에서 나와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후후. 나름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조금 어렵네요.”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좀 가르쳐줘요, 오라버니.”

움찔.

내 뒤에서 자리를 지키며 서 있던 데이지의 몸이 떨렸다.

그 외에는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지만. 나는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마찬가지로 데이지와 아이리스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대답했다.

“갑자기 그렇게 부르면 놀라잖습니까.”

“놀라셨어요? 전혀 안 놀라신 거 같은데.”

“놀랐습니다. 이래 봬도.”

“흐으응.”

콧소리를 흘린 아이리스가, 이젠 아예 턱을 괴곤 나를 빤히 응시했다.

생글생글 웃는 눈매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까지 띤 채 아무 말 없이 나를 그렇게 응시하고 있으니, 내가 부담스러운 건 둘째 치고 가까운 줄, 그러니까 맨 뒤에서 앞 줄에 있는 생도들이 이쪽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 챘는지 은근히 이쪽을 신경 쓰는 듯 했다.

“….”

앞 줄의 생도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데 입을 열기도 어려웠던지라, 나는 펜을 들었다.

‘뭐 하세요.’

‘오라버니 유혹하는 중이요.’

움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데이지가,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보아하니 은근슬쩍 나와 아이리스가 필담하는 걸 엿 본 모양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이지라면 봐도 상관 없지.

나는 아이리스의 글에 답장하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유혹이요?’

‘유혹이요.’

“전하.”

“…네읏?”

필담 도중.

내 답장을 기다리던 아이리스를 육성으로 부르자 흠칫 놀란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혀 씹은 거 같은데.

발음이 꼬인 게 부끄러웠는지, 아이리스가 한 쪽 손으로 화끈화끈 붉어진 뺨을 가렸다.

“뭔가요….”

“강의가 끝나고 시간 있으십니까?”

….

조용했다.

앞줄 뿐 아니라, 강의실 전체가 한 순간 고요했다.

막상 내 말을 들은 아이리스는 당황한 듯 입을 살짝 벌리곤,

“엣, 아, 네. 시간… 있어요….”

하고 대답할 뿐 강의실 내부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지만.

음.

“오해하실까봐 덧붙입니다만.”

“네….”

내가 말을 잇자, 순간 조용해졌던 강의실의 경직 된 분위기가 풀려간다.

이걸 어쩌지.

“데이트 신청이니 예쁘게 입고 나와주세요.”

“네헷….”

또 혀 깨물었다.

칠칠 맞은 용사 같으니.

….

강의실은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고요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하는 얼굴로, 감히 이쪽을 돌아보진 못 하고 고개가 돌아가려는 걸 겨우겨우 참아내려는 생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체페슈와 황가가 엮인다니, 어마어마한 소식이긴 하지.

나는 모른 척 했다.

옆에서 어버버 거리는 아이리스가 잠시 시간이 지나 제정신이 돌아와서는, 내 발언에 뒤바뀐 강의실 내부 분위기를 눈치 챈 듯 했지만.

뭐.

은근히 나랑 친근하게 굴면서 관계를 보여주려 하길래, 그냥 내가 쐐기를 박은 것 뿐인데?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무시해요?’

‘야’

‘야아!’

나한테 뭐라 말은 못 하겠고, 열심히 펜을 놀리는 아이리스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그마저도 곧 들어온 교수 덕에 멈추게 됐지만.

*

의외로 소문이 그리 퍼지진 않았다.

감히 입에 담기엔 너무 지체 높은 사람들이어서인지,아니면 신빙성이 너무 없다고 여겨져서인지.

어느 쪽이든 생각보다 크게 소문이 나지 않아서 아쉽긴 했으나, 기왕 소문을 내기로 한 거 목표했던 바는 이뤘다.

일단 황실을 찔러보는 것.

제국 천년의 역사 동안 지금껏 쭉 어느 정도 대립하는 스탠스를 유지하며 균형을 맞춰 오던 체페슈의 가주가 황실에 손을 내미는 그림이었으니, 아무리 사람들이 쉬쉬 해서 묻힌 소문이라한들 순식간에 황궁으로 소문이 전해졌으리라.

황실을 굳이 찔러본 이유는 하나였다.

용사인 아이리스를 빼면, 다들 신뢰할 구석이 없는 작자들이었으니까.

이 세계가「푸른 장미 정원」이 아니라 「푸른 백합 정원」이란 것을 알게 되고 누나에게 재차 물어서 확인한 바, 「푸른 장미 정원」에서 존재하던 황자 루크 아르카디아 루트에서 벌어졌던 황실 내 암투가 실제로 「푸른 백합 정원」에서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선 아이리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그녀를, 황실의 견제 따위에 묶이게 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체페슈의 가주고, 설령 제국의 황제라고 할 지라도 내게 함부로 할 순 없으니, 그런 내가 아이리스를 비호하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황실에서 아이리스를 견제한답시고 개짓거리를 벌이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오라버니는 바보야….”

내 얘기를 들은 아이리스는 화도 내지 못 하고, 우물쭈물 거리다 한숨을 푹 쉴 뿐이었지만.

귀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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