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56화 (56/140)

EP.56 루나 테일러 (3)

조리돌림 on.

누나는 이십 년만에 맛 보는 친동생의 화끈한 돌림에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옛날 같았으면.

음.

아무튼.

어쨌건 조리돌림 하는 게 재밌는 것과 별개로, 일단 누나가 ‘천칭’이랑 키워드에 반응했으니 화제를 다시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천칭의 계약은 왜? 그거 아는 사람 거의 없을텐데.”

새빨개진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간 주제에 회복은 빨라서 평온하게 돌아온 누나가 입을 열었다.

아직 귀는 좀 빨간데.

지적하면 또 발작하겠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긴 해도, 원로 엘프쯤 되면 알지 않나? 나도 거기서 들은 건데.”

“아…. 그 나잇대면 알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잠깐만. 거기 서랍에서 노트 좀.”

아까 종이와 펜을 꺼냈던 곳에서 노트를 하나 꺼내 건네줬다.

“뭔데?”

“기억나는대로 적어둔 설정 노트.”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살펴보던 누나가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얼핏 보니 한글이던데.

“여깄다. 네가 말한 엘프들, 다 삼백살은 넘었지?”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도.”

“전대 용사가 정확히 삼백년 전에 태어났었거든.”

“그래서?”

픽 웃는 누나. 뭐가 그래서냐는 듯, 손에 쥔 펜을 들고 거만하게 까딱거린다.

“뭐긴. 전대 용사가 당시의 성녀랑 천칭의 계약을 맺었다는 거지.”

“오….”

“너 뭘 알고 오… 하는 거냐?”

“대충은.”

둘이 그렇고 그런 걸 했다는 뜻 아닌가?

아니.

근데 그냥, 가소롭단 듯 보는 얼굴이 존나 꼽다.

“야. 천칭이란 게 그리 쉬운 건 줄 알아?”

“넌 뭐 아냐?”

“너보다는 잘 알죠 시팔아.”

“그럼 설명해주시라구요.”

“네가 들어야 설명해주죠 개십동생아.”

“예에.”

씨발럼.

들으란 듯 욕을 뱉은 누나가 손에 든 노트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천칭의 계약은 오직 대칭되는 사람이랑만 맺을 수 있어. 당대의 용사와 성녀가 어떤 종류의 대칭 상대였는지 몰라도 서로 운명적으로 엮인 사이라는 거지.”

“그런데?”

“뭐 그만큼 각별하고 특별한 사이여야 한다는 거지. 응? 무턱대고 막 하는 게 아니라.”

마치 너랑 나는 못 해─.

라고 말하는 듯 한 어조였다만.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 마왕한테 천칭의 시련이라고 받았거든? 못 하면 죽을 듯.”

“…그걸 진즉 말했어야지!”

“아니 뭐. 그리고 영혼의 천칭이면 대상이 누나밖에 없지 않나?”

“야, 뭐, 아니. 꼭 나일 필요 있나? 레티시아나, 뭐 그런 애들도….”

“나 천칭이 세 개인데 레티 누님은 아마 피의 천칭일 듯.”

“미친 근친충 새끼 진짜 뒤져.”

“님이 먼저 레티 누님 얘기 꺼냈잖아요.”

왜 이래.

아무튼 나한테 씨발개새끼좆같은 놈─, 하고 짓씹듯 욕을 지껄이더니, 이윽고 현타라도 온 듯 손에서 노트를 탁 놓아버린 누나가 나를 흘겨봤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는 건데. 천칭 그거.”

“아니 씨발아. 그 전에. 시련은 왜 또 걸린건데?”

“부알 잡았더니 튀어나와서 걸던데.”

“개십부랄 같은 놈.”

“나한테 한 말 아니지?”

“맞다고 하면 맞는지 아닌지 보여준다면 깔 거잖아 십새야.”

어떻게 알았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뒤로 몸을 기댄 누나가, 슬쩍 내 몸을 훑어봤다.

“후…. 골 아파.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저주 아니고 시련인 거 보니까 다행이라고. 바알 그새끼 상태가 멀쩡했으면 다시 저번처럼 저주 갈겼겠지.”

“흠….”

“시련이 왜 시련이냐? 무사히 끝내면 보상이 따라오는 대신 과정이 좆 빠지게 힘드니까 시련인 거 아냐. 세상 어느 빌런이 자기 적한테 ‘자 이것만 극복하면 선물 줄게’라고 하냐? 그냥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그것도 그래.”

“그래. 앵간한 저주는 너한테 안 통할 거고, 저번의 그걸 쓰기엔 바알도 몸상태가 씹창이고 하니까 자기가 쓸 수 있는 것 중 제일 좋은 카드랍시고 뽑은 게 그거겠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엉.”

어쩐지 극복하게 된다면 목을 치러 오니 어쩌니 같은 소리를 해대더니.

그냥 내가 죽을 줄 알고 한 소리라는 거네.

하지만 바알도 예상하지 못 한 게 있다.

“근데 우리는 상태창이 있잖아.”

“그렇지.”

“원래는 저주인지 시련인지도 제대로 구분 못 하고 헤매다가 시간 다 썼을걸?”

그렇다.

상태창이 바알이 내게 걸어버린 시련이 뭔지 다 알려준 덕분에,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바알 입장에선 내가 엉뚱한 데에 시간을 쏟거나, 저주가 아니라 시련이란 것을 알아채더라도 정확히 어떤 종류의 시련인지, 어떻게 극복하는지 알지 못 하고 헤매다 죽게 되기를 예상하고 한 행동이었을테지만….

“확실히 다행이긴 하네.”

기왕 말 나온 김에 누나 상태창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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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허락 없이는 열람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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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

눈 앞에 정전기가 튀듯 따끔하더니, 경고문이 떠오른다.

누나 역시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곤.

“내가 훔쳐보지 말랬지.”

“언제.”

“…아. 기억 씨발 언제 찾을래?”

억울하네.

“됐고. 아무튼 어떡하면 되는데. 천칭의 계약 그거 맺어?”

“아…. 아니. 나 말고 또 있다매. 레티시아가 끝이야?”

“황녀. 맞을걸? 운명의 천칭.”

“…그런가? 그럴싸 하긴 한데. 아무튼 걔한텐 허락 받았어? 나보단 걔가 더 중요하지 않나?”

“반 정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거지 반은 뭔데.”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고 결정하겠대.”

“거 시간 많으신가 봐요.”

“없으니까 누나 보러 온 거 아닐까?”

흠칫.

내 말에 잠깐 굳은 누나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

잠깐 뭔가를 고민하는 얼굴이다가,

“…이 씨발. 그럼 난 황녀 꼬시기 전에 시간 아낄 겸 들렀다 이거야? 어?”

“빨리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쪽팔리잖아.”

“….”

아.

입 다물었다.

언제까지 합죽이 모드일지 궁금해서 빤히 쳐다보자, 내 몸이 들썩였다.

“…꺼져! 이따 저녁에 다시 와! 천칭 개념부터 가르쳐줄테니까!”

“개념?”

어제처럼 정령들이 내 몸을 들어 밖으로 옮기는 와중에도, 나는 붉어진 누나의 귀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

“천칭의 개념이 뭔지는 알아?”

저녁.

다시 찾아간 누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정장 차림에 꽤 번듯한 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선생님 모드인가.

다리 아플텐데.

그래도 수업까지 일어서서 하진 않고 침대에 앉아서 하니 다행이라고 봐야하나.

“집중하지?”

“엉.”

탁.

나무 정령들이 가져온 듯한 목판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린 누나가 입을 열었다.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지닌 ‘무게’를 재기 위한 관념적 장치를 보고 ‘천칭’이라 불러.”

“이것도 설정집에 있어?”

“설정집에 있는 것도 있고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것도 있고.”

“오.”

내가 작게 감탄하자,“훗” 하고 안경테를 올리며 좋아한다.

쉽기는.

“아무튼 말이지. 예를 들어 네 ‘무게’가 100이라고 치자. 원래는 모두 수평이거나, 조금 달라도 오차범위 이내였는데 너 혼자만.”

“그런데?”

“그럼 천칭은 네가 있는 쪽으로 기울게 될 거 아냐.”

“그렇겠지.”

“그럴 경우 균형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서, ‘천칭’이 네 건너편에 자리할 존재를 선택하는 거야.”

“으음.”

“천칭이 세 개라고 했지?”

“응.”

“네 ‘무게’를 건너편 대칭 상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단 거야.”

“그래서 세 개로 쪼개서 균형을 맞추는 거다?”

“아마 레티시아가 삼십, 아이리스가 삼십, 내가 사십 정도 아닐까?”

들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천칭이라는 건 즉 세계의 시스템이란 거고, 전대 용사나 나처럼 세계의 밸런스를 망가뜨릴만큼 존재감이 커다란 자가 태어났을 때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대칭자를 선택한다는 건데.

의아한 점이 있었다.

“궁금한 점.”

“뭔데?”

“그게 의미가 있나? 밸런스를 맞추겠다고 대칭자를 만들었는데, 정작 대칭자가 천칭이 의도한대로 안 따라주고 같이 균형을 깨버리면?”

즉, 천칭이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무게추로 선택했다한들, 그 사람이 정말로 아무 감정도 이성도 없는 기계가 아닌 이상에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시스템의 의도를 따라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벌써부터 이미 레티 누님은 내가 뭘 하자고 해도 좋다고 할텐데.

“그건 상관 없어. 둘이서 뭘 짜고 치든 간에, 세계의 균형은 유지 되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애초에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그러지는 게 그 균형이라는 거라고. 그러니까 대칭자들도 얌전히 살아만 있음 돼. 그걸로 대칭자의 역할은 끝이야.”

아.

그렇구만.

납득하고 있는 사이 누나가 의기양양 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펼 가슴은 없었지만.

대신 골반에 얹은 손 때문에 괜히 커다란 골반에 눈이 가긴 했지만.

“그리고…. 야. 어디 보냐?”

“아니. 뭐라고 했지? 못 들었다.”

“씁. 아무튼. 그리고 ‘계약’은 대칭자끼리의 억제를 없애는 걸 뜻 해.”

“억제를 없앤다고?”

“그래. 말했잖아. 네 무게가 백이면, 레티시아나 아이리스가 삼십이고 내가 사십 정도일 거라고. 그럼 우리는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천칭’이 정해준대로 서로를 견제하는 데에 존재력을 쓰고 있단 거야.”

“가만히 살아만 있어도 된다는 게.”

“그래. 살아만 있으면 천칭이 알아서 우리 존재력을 조율해준다는 거야.”

조율이라.

나는 내 고유특성 「조율」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우리 사이의 계약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천칭 사이의 계약이기도 해. 그래서 ‘천칭의 계약’이고.”

“무슨 계약인데.”

“천칭에게는 우리가 합심해서 균형을 깨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거지 뭐.”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고.”

대충 예상은 갔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빠져나가던 힘만큼 돌아온다는 거구만.

“근데 절대적인 신뢰라는 게 있나?”

“판정은 천칭이 내려주긴 하는데….”

“천칭이 어떻게 내려주는데.”

이것도 예상이 갔다.

“그, 어, 뭐. ….”

“흠.”

지그시.

“…아무튼! 계약하면 좋긴 할 걸. 레티시아나 아이리스는 삼십, 나는 사십.”

근데 이 여자.

아까부터 묘하게 자기가 10 정도 더 높을 거라고 어필하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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