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5 루나 테일러 (2)
팬 게임.
팬 게임?
“뭐라고?”
“내가 만든 팬 게임이라고.”
“뭐가?”
“푸른 장미 정원.”
감히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멍 하니 응시하자, 누나가 보란 듯 다리를 꼬았다.
“끅.”
“미친년.”
저주 때문에 거동도 힘든 다리를 왜 움직여서 혼자 끙끙 앓는 건지.
한숨을 쉬며 낑낑 거리는 누나의 다리를 들어 제자리로 돌려줬다.
“휴.”
“아무튼. 그래서. 뭔데? 제대로 좀 설명해봐.”
내가 닦달하자, 눈동자를 데구륵 굴린 누나가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하더라….”
잠시 말을 고르곤, 큼큼 헛기침을 한 다음.
“원래 「푸른 백합 정원」이라는 소설이 하나 있었거든?”
“소설?”
“그래. 소설. 나름 재미는 있었는데, 너무 고구마 전개도 많고, 게다가 뭐라구 해야하지. 소설적 전개? 그런 게 없다고 해야하나.”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골똘히 고민하던 누나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래. 너무 자세했어.”
“자세했다고?”
“어엉. 묘사에 생략이 없다고 해야하나? 캐릭터 하나하나한테 부여된 서사도 많고, 근데 그걸 또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늘여쓰는 수준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아무튼 인기 없을만한 소설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이게 또 그런 게 있거든. 필이 팍 꽂히는 거.”
“그래서.”
“소설 자체는 노잼이었는데, 캐릭터 설정이라든가 그런 건 나름 괜찮드라고. 그래서 작가한테 메일을 쏴봤지.”
“뭐라고?”
“소설의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팬 게임을 만들어도 될까요? 하고. 순수하게 팬심이니까 상업적으로 활용하지 않겠습니다, 라고도 덧붙였고.”
“그게 「푸른 장미 정원」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루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엔 그냥 쯔꾸르 느낌으로 간단히 만들었지. 브금은 오픈 소스 좀 활용하고. 삽화는 지인들 통해서 싸게싸게 업어오고.”
“씁. 근데?”
“근데 이게 대박이 난 거지.”
“음.”
먼 과거를 떠올리듯 누나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누나에겐 그 때의 기억이 2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일테니.
“아무튼…. 재밌어 보일 거 같아서 만든 거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대충 만든 그게 대박이 나니까 뭔가….”
“제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디까지나 원작자는 그 소설 작가일 거 아냐.”
“판권을 샀지.”
“팔겠대?”
“응. 내가 만든 게임 덕에 덩달아 자기 소설도 유명해져서 좋다고 하던데? 애초에 돈 보고 쓴 글은 아니었나보더라고.”
그렇게 길쭉한 손가락으로 분홍빛 입술을 톡톡 건드리던 누나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지은 죄가 있을 때 태도인데.
“뭔데.”
“뭐가.”
“또 뭔 짓 했어.”
“아니 뭔. …아니. 이거 너한테 이미 한 번 얘기했던거라니까?”
“어쩌라고.”
“이 씨.”
입술을 비죽 내밀던 누나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니. 너 좀 유명하잖아. 그림….”
“근데? …아.”
이 년이 설마.
“네 그림 좀 갖다 썼어….”
“미친년 아냐 이거.”
“치킨 사줬잖아!”
“미쳤냐 진짜?”
“미안….”
아니.
와.
어쩐지 평소랑 다르게 꼭 스탠딩 일러 같은 걸 구도별로 그려달라 하더니.
“얼마 벌었냐.”
“무, 뭐가.”
“내가 준 그림 넣은 게임으로 얼마 벌었냐고.”
“어….”
“얼마.”
“요만큼…?”
누나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펼친다.
“오천은 아닐 거 아냐.”
“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골이 띵 했다.
그래도 뭐.
“어쩐지 용돈이랍시고 몇백씩 보내줄 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린 그림의 장수에 비하면 영 못 미치는 액수이긴 해도, 받았던 돈들을 다 합쳐보면 그냥 가족이니까 좀 싼 가격에 의뢰 받은 셈 쳐도 될 수준이긴 하니까….
용서를 못 해줄 건 없는데.
“존나 서운하네.”
“네….”
“아니. 게임에다 넣을 그림 그려달라고 하면 내가 안 그려줄 것 같았나? 그게 뭐라고 나한테 숨기냐.”
“네…?”
잔뜩 쭈글어든 채“네…”만 반복하던 누나가 고개를 들었다.
“뭐.”
“아니…. 전에는 그런 말 안 해줬는데….”
“기억 잃기 전에?”
“응….”
흠.
뭐지? 진짜 백 년동안 살면서 많이 바뀌긴 했나본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미안….”
“어휴.”
아무튼 이 얘기는 됐고. 시무룩해진 누나의 볼따구를 꼬집었다.
“으그으극.”
“그 얘기는 됐고. 그럼 「푸른 백합 정원」이랑 「푸른 장미 정원」이랑 또 다른 거 뭐 있는데.”
“끙. 일단, 아으 아퍼. 일단 네임드 남캐들이 원래는 여캐고….”
“그리고?”
“레티시아가 원래는 악역이 아니고….”
“아니 씹련아.”
“뭐어!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 원래 갈등 요소가 있어야 재밌어지는 법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확실히 우리가 각각 루나 테일러랑 스칼렛 체페슈로 환생할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것 같긴 한데.
“나는 씨발 기억 잃고 레티 누님 꼬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줄 알어?”
“…뭐? 꼬셔?”
“…아니. 그게 중요해?”
“이 미친 근친충 새끼!”
나를 팍 밀어내는 손길. 힘이 없어서 그런가 밀리지는 않았다.
내가 꿈쩍 않으니 되려 이번엔 누나 쪽에서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리곤.
“가까이 오지 마 변태 새끼야!”
“아니 변태라는 말은 존나 너무하네. 지가 할 말인가?”
나를 향해 휙휙 삿대질을 하며 바락바락 소리 친다. 덕분에 누나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 정령들이 나를 위협하듯 기세를 부풀리는데….
“아니 뭐. 이게 내 잘못이냐? 니가 나한테 이상한 설정 가르친 게 잘못이지.”
“이상한 설정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게임에선 그게 정사야!”
“근데 씨팔아 여기는 네가 만든 세상이 아니라 백합 정원인가 하는 원작 세상이라매.”
“기억 잃기 전에는 말해줬었으니까 세이프…!”
돌겠네.
“그럼 원래 레티 누님 역할은 뭐였는데?”
“하나 뿐인 동생을 잃고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다 루나 테일러한테 '구원' 받고 착해지는 캐릭터….”
“미친련… 미친련….”
“백살 먹은 틀딱이 그런 말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말투 존나 어색해.”
“닥쳐.”
지금은 이십대니까.
“어지럽네 진짜.”
“아니, 뭐, 그래도, 꼬셨으니까 된 거 아닐까?”
“죽고싶냐?”
“…아니, 뭐.”
누나는 잠시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어떻게 꼬셨는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알아서 잘.”
“이 씨.”
내가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잠시 투덜거리던 누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 묻고 싶은 건 없고? 하나 남았을 거 같은데.”
“어쩌다 마왕이랑 싸운 거냐, 우리가?”
“음. 거기 옆 서랍에서 펜이랑 종이 꺼내봐봐.”
“여기.”
건네준 종이를 펼친 누나가, 펜으로 맨 윗줄부터 천천히 채우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하려니 어려운 건가.
길다란 실을 죽 긋고는, 왼쪽 맨 첫 지점을 펜으로 콕 찍었다.
“자, 봐. 여기가 우리가 처음 만난 시점.”
“응.”
그 옆으로 죽 선을 다시 긋고는, 중간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가 마왕이 강림한 시점.”
“흠.”
“아까 레티시아가 동생을 잃고 무기력해졌다고 했잖아.”
“그랬지.”
“원래 너는 여기서 죽었을 거야.”
“갑자기 확 들어오네.”
“예상은 했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톡톡….
누나가 펜 끝을 종이에 대고 슬쩍 비비자, 잉크가 번져 종이의 면이 더럽혀진다.
“원래 역사에서 스칼렛 체페슈는 마왕이 강림한 직후, 마왕을 다시 차원 너머로 송환시키는 댓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전개였다는 거지.”
“여기선 우리 둘이 합공해서 목숨을 부지한 거고?”
“일단은. 히든 피스 같은 것도 캐둬서 스펙이 오른 것도 있고.”
으음.
생각할 수록 어째 점점 더 내가 용사에 가까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여신은?”
“어. 만나봤어?”
“아니.”
“하긴…. 우리가 한창 마왕 강림 막겠다고 대륙을 들쑤실 때에도 꿈에 한 번 나온 게 끝이었어. 중요한 정보도 거의 못 얻었고.”
“흠.”
“그나마 도움이 됐던 게 마왕이 강림하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줬다 정도? 이것도 거의 다 알아낸 상태에서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정도밖에 안 됐지만.”
잠시 머릿속으로 들어온 정보를 취합했다.
원래 내 기억상 악마의 첫 등장은 루나 테일러의 입학 이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년은 더 남은 시점이었을텐데, 지금은 이미 소멸하고 없어진 부알은….
아.
“야.”
“왜.”
“악마가 진체로 강림하는 거랑, 계약자를 통해 강림하는 거랑 많이 다르냐?”
“존나 다르지. 후자는 일단 계약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출력이 거의 고자 수준이 될걸.”
역시.
“즉. 원래 역사에서 마왕이 강림하는 것을 스칼렛이 어찌저찌 막아내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히는 데에는 실패해서, 악마들이 여유롭게 진체로 하나씩 차근차근 넘어왔다?”
“엉…. 그렇겠지?”
“그리고 지금은 마왕이 치명상 입고 회복 중이라, 악마들이 급한대로 빠르게 넘어올 수 있는 편법으로 계약을 골랐다?”
“엥. 뭐. 너 악마랑 싸웠어?”
“부알.”
“개씹부랄 같은 이름이네.”
“입에 걸레 문 거 봐라.”
“조까쇼.”
“어? 까?”
“치워 씨발아!”
아무튼.
어쩐지 치명상을 입고 회복 중이어야 할 마왕이 무리한 몸으로 나한테 좆같은 시련을 내렸나 했더니.
이미 원작보다는 훨씬 궁지에 몰린 상황이란 거구만.
“야.”
“왜.”
“천칭의 계약이 뭔지 아냐.”
“….”
천칭의 계약.
그 단어를 듣자마자 꾹 다물린 누나의 새하얀 피부가, 금세 붉게 확 달아올랐다.
“…이, 미친놈. 친누나한테….”
“아니. 아냐고 묻는데 뭔 소리야. 니 뭔 생각하냐?”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건 아닌데.
그게 오해가 아닐 지도 모르기는 한데.
근데 일단 좆 같은 소리 듣기 좆 같으니까 내가 먼저 조리돌림을 시전했다.
“씨발럼….”
효과는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