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잔망용사와 북부공녀
….
침묵이 감돌았다.
어쩐지 들켜서는 안 될 장면을 들켜버린 듯 굳어버린 나와, 마찬가지로 입을 꼭 다문 채 나와 아이리스를 번갈아 강렬히 응시하는 안나.
이마를 짚은 사샤.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떨어지킨커녕 되려 바짝 붙어버린 아이리스.
물론 안나와 나는 이성적인 관계라곤 요만치도 없는 사이다.
아이리스와 팔짱 끼고 데이트 하는 장면을 안나가 봤다고 해도, 그게 뭐 어떻냐는 식으로 굴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안나가 내게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아도.
물론.
설령 안나가 내게 품은 마음이 진짜 연심이라한들 받아줄 마음이 딱히 없던 나로서는, 안나의 그 마음이 단순히 어린 마음에 동경과 헷갈린 것이기를 바랐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안나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이리스에게 눈치를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든 어떻든간에 안나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며, 오히려 나와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는 쪽은 아이리스니까.
여기서 아이리스에게 눈치를 주는 짓거리를 내가 어찌 하겠는가.
오히려 내가 난처해 한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리스가 스스로 떨어지려 하길래, 나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아이리스의 허리를 당겨주었다.
“앗….”
괜찮겠어요? 하고 묻듯 나를 올려다본다.
아까는 냉큼 안나가 보란 듯 팔에 매달리더니. 천성이 용사라 그런가, 심술을 부려도 끝까지 못 가는 게 귀엽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라고. 아이리스를 달래듯 속삭여주니, 그제야 한참이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안나의 입이 열렸다.
“전하께서는.”
내가 없는 사이 꽤나 중앙의 존대 표현에 익숙해졌는지, 안나의 말은 조금 어눌하긴 했어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눈꼬리가 내려가, 처연한 얼굴을 한 안나가 잠시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황녀 전하와는, 어떤 관계…, 이신가요?”
“교제하는 사이입니다.”
“오라버니…!”
내 선택은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이 발언이 미칠 정치적인 영향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히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리스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되려 놀란 건 아이리스였는지, 작은 목소리이나 기겁한 듯 나를 다그쳤다.
확실히 아르카디아 황실과 북부의 크로이체프, 마탑의 프리드리히와 밤의 체페슈라는 세력 구도가 형성 된 지금의 제국에서 체페슈의 가주가 황가의 딸과 교제 중이라고 하니 그 여파가 얼마나 클 지는 굳이 계산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중입니다.”
“뭣….”
“오라버니!”
이번의 대답은 어떻게든 침착을 유지하려던 안나에게도, 조용조용 옆에서 다그치던 아이리스에게도 충격이었는지 양쪽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오라버니…?”
기이한 것을 들었다는 듯 안색이 바뀐 사샤가, 잘못 들은 것인가 하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음.
그렇게 이상한가?
나는 어색한 상황도 풀 겸, 사샤에게 말을 걸었다.
“사샤?”
“…아. 네, 전하.”
“아이리스가 제게 오라버니라고 부른 게, 그리 이상한가요?”
말하고보니 추궁하는 듯 한 대사가 돼 버렸는데.
실제로 사샤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기 직전이라,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질책하는 게 아니라요.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아, 그것이….”
“말하지 마십시오.”
더듬더듬 이으려던 사샤의 말을, 아이리스가 차갑게 끊었다.
순간 오한이 들 정도로 차가워서 순간 북부 설원의 딸은 안나가 아니라 아이리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슬쩍 그녀를 돌아보자, 아이리스가 언제 그리 차갑게 말했냐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오라버니. 그런 건 궁금해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아니라고.”
“네.”
반말 하는 아이리스는 귀엽다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이었는데.
조금 무섭다.
분명 나이는 내가 많은 게 맞는데. 오라버니가 뭐가 이상한 거지?
머쓱하게 입을 다물자, 그제야 안나가 다물었던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전하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의 영애와, 교제 중이시던 게…?”
어눌하고 어설픈 말이긴 하나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안나의 말이었다.
옆에서 사샤가 거들어 줄 것도 없이 그 뜻이 잘 전달 될 수준은 됐다. 예전 같았으면 감개무량 했을텐데.
왜 하필….
“크리스티나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 중입니다.”
“…그렇습니까.”
어딘가 침울해진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안나.
내가 너무 숨김 없이 말 했나.
괜히 미안해지던 그 때. 안나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저와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뜻. 이군요.”
“으잉.”
옆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슬쩍 돌아보니 아이리스가“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하는 표정을 한 채, 내 팔을 꽈악 조이고 있었다.
아까 사샤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아이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공녀님? 그게 무슨 소리….”
평소 은은한 미소 대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과, 누구에게나 조곤조곤 다정하게 대해주던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샤는 슬쩍 한 발 빠져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끼기엔 판이 너무 커졌다고 판단한 듯 했다.
안나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다.
“한 명이면 모를까. 둘이라면 셋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설픈 말투까지 겹치니,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리스의 표정을 살피니, 도발이라도 당한 듯 한 기세였다.
“크로이체프 대공 전하께서, 따님이 다…, 아니, 세 번째로 들어간다는데 반기실 지 모르겠네요?”
“그것은 피차일반. 입니다. 순서를 따지자면, 크리스티나 영애가. 첫 번째입니다.”
큭.
아이리스가 눈가를 찌푸렸다.
들어온 순서대로 따질 거면 아이리스도 결국 두 번째에 불과한데, 그럼 나나 너나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말이었으니.
그렇다고 권위를 내세워 자신이 첫 번째라고 주장한다면, 후발주자가 첫 번째를 주장할 당위성이 생기니 안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얘기가 된다….
과연. 안나가 뽐 내듯 어깨를 피는 게 이해가 됐다.
다만….
아이리스가 나를 배려 해 다른 두 명의 얘기는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순서만 따지자면 아이리스가 네 번째고 안나가 다섯 번째라는 게 문제다.
실제로 아이리스가 네 번째에 만족할 리도 없고.
일단 과열 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로 했다.
둘의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둘 다 그만.”
“….”
내가 중재하니 둘 모두 불만스럽긴 해도 다툼을 멈췄다. 그나마 내 말이 통하니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일단…. 이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단 둘이서요.”
“…단 둘이서. 말입니까?”
우선 안나에게 타협책을 내놓았다.
당장 납득이 필요한 건 아이리스가 아니라 안나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우선 안나는 설득 했고.
“사샤?”
“네, 전하.”
“다음에 초대할테니, 공녀와 함께 찾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이걸로 마무리하고. 우두커니 서서 무언가 고민하는 안나와, 그녀를 질질 끌고 가는 사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
“아이리스?”
“네. 오라버니.”
삐졌나.
잠시 아이리스를 말 없이 지켜보자,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잖아요. 그쵸?”
“그렇죠.”
“교제하게 된 계기는 둘째치고, 교제 중인 건 맞잖아요. 진지하게.”
“네.”
“그럼 제가 질투해도 이상한 건 아니죠?”
“이상할 게 뭐 있겠어요.”
“…그냥. 사랑이 있어서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까…. 걱정 돼서.”
“뭐가 걱정 됐나요. 아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아이리스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말할까, 말까,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눈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질투 같은 거나 하는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하시면 어떡하나, 같은 거요.”
거 참.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으응.”
“생각하면 어쩌게요.”
“…몰라요.”
바보 같긴. 고개를 푹 숙인 아이리스의 침울해진 모습이 썩 귀여웠으나, 이 상태로 계속 둘 수도 없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손을 뻗어 어깨에 손바닥을 올렸다. 토닥토닥. 두어번 가볍게 다독이곤, 침울해진 아이리스를 끌어안았다.
“으─.”
“정말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진짜로?”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나 좋아해요?”
“그건 차차 알아가는 걸로.”
“힝.”
슬슬 기가 살아나서 장난 치는 거 보니까 괜찮아진 모양이다.
그렇게 아이리스와의 산책 데이트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어 품에 안긴 채 코를 킁킁 대는 누님의 등을 쓰다듬고 있으니, 까마귀가 그림자 속에서 올라왔다.
“다른 여자 냄새…. 내가 지워야 해….”
몸을 부비적 비비는 누님을 두고 까마귀가 전한 서신을 받았다.
“이건?”
“테일러 영지로 보내셨던 편지의 답장입니다.”
그렇군.
나는 괜히 새삼스런 기분에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봤다.
이 안에, 내 누나의 답장이 들어있을 수도 있단 뜻이다.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괜히 두근거리는 기분을 잠시 즐기다, 편지 봉투를 뜯었다.
내 품에 몸을 비비적 부비던 누님이 슬쩍 편지 쪽으로 시선을 줬다. 내용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으응? 무슨 뜻이야, 이거?”
편지의 내용물을 확인한 누님은 의아한 듯 의문을 표했다.
그야, 편지지에는 큼지막하게[ㅗ]라고 적혀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