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50화 (50/140)

EP.50 잔망용사

아카데미에 복귀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테일러 영지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루나 테일러가 나의 누나로 추측되는 상황이긴하나, 확실하지 않은 추측이니만큼 편지의 내용은 사뭇 고상스런 미사여구로 가득한, 안부를 묻는 내용 뿐이었다.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어떤 형태로든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답장이 오겠지.

그 다음은 누님을 불러 대략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

적어도 아이리스에게 말해줬던만큼은 누님에게도 공평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 마왕과 악마의 정체 같은 정보를 공유했다.

그 중에서도.

“흐응.”

“누님?”

“흐으응.”

“…뭐가 그리 화났어?”

“아니. 그냥. 네가 기억을 잃은 게, 다 그놈 때문이라는 거지?”

누님은 내가 기억을 잃은 원흉이자, 내게 저주를 내렸다는 마왕에게 끝 모를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악마니 마왕이니 하는 것을 떠들고 다녀봤자 혼란만 늘어날 뿐, 현재로썬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그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곧장 성국으로 찾아갔을 기세였다.

“…그래서. 그 저주라는 것을 해주하려면, 천칭의 계약이란 것을 맺어야 한다는 거니?”

“일단은.”

“그 대상 중 하나고 나고?”

“그렇지.”

“다른 사람은 누군데?”

“….”

내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자, 누님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어서 말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얼굴이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황녀랑, …루나 테일러.”

“아이리스 황녀? …그건 알겠는데. 루나 테일러는 누구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누구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대륙에서 나름 이름을 날렸다곤하나, 과연 그것이 특별한가? 하고 묻는다면 누님이나 아이리스에 비하자면 턱 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전생의 누나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가 누님이 나를 어떤 눈으로 쳐다볼지도 대충 상상이 가고.

내가 대답하지 못 하고 눈을 굴리고 있자, 이내 누님이 먼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옛날에 네가 몇 번 말하던 걔구나.”

“알아?”

“응. 네가 저택을 비우고 몇 달씩 자리를 비우고 돌아올 때 종종 같이 다니던 애라고, 말해줬었잖니.”

“…그랬구나.”

“…이상하네. 혹시 기억 돌아왔니?”

“아니. 아직.”

그런가.

기억을 잃기 전에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고, 그러니까 루나 테일러로 환생한 누나가 내 편지를 본다면 어떻게든 답장해줄 것이라 예상한 것이긴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루나 테일러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누님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야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은 저택을 비웠다가 돌아온 뒤고, 그렇다면 저택을 비울 때 함께 다닌다는 루나 테일러가 누님의 입장에서 의심스럽게 보일 법도 한데도.

누님은 내게 한 번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해?”

“뭐가.”

“내가 왜 루나 테일러에 대해서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는지?”

“…아무래도?”

“네가 나한테 말했었어. 그녀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라고.”

그리 말하곤, 화사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누님.

나는 허리를 숙이고 누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아들였다.

다정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그리며, 누님은 속삭였다.

“네 말이니까 믿어.”

“….”

그렇구나.

나는 말 없이 누님을 끌어안았다.

바보 같이 착한 여자 같으니라고. 내가 말했다고 철썩 같이 믿다니. 이런 푼수를 어떡해야 좋을까.

누님의 부드러운 품에 안긴 채 작게 중얼거렸다.

“걱정되니까 평생 내 옆에 끼고 살아야겠어.”

“무, 뭘?”

“누님을.”

“무슨 소리래니….”

“싫어?”

“그야 좋지만….”

그래도 역시. 기억이 없다는 건 불편하다. 과거의 내가 한 말을 믿는 누님의 모습을 보자니 질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질투라니. 참으로 볼품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하루 빨리 기억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것은 나 개인의 일이고.

아카데미는 한창 중간시험 시즌이었다.

정확히는 3주 가까이 되는 시간이 남긴 했으나, 학기말의 서열전을 대비하여 중간시험에 필기와 실기 시험을 모두 몰아서 치기 때문에, 중간 시험의 난이도는 둘째치고서라도 그 범위가 상당했다.

우선 이론 수업에서 다루는 필기는 물론이고, 간혹 실험 등을 다루는 이론 수업은 실험 실기까지 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전투학 따위의 실기 수업은 아예 날을 잡고서 마물 따위를 토벌하는 시험을 수행하기 때문에 일정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간혹 이론과 실기를 섞은 하이브리드형 시험도 있다고 하던데.

이론에서 배운 것들을 실기에서 얼마나 잘 쓰는지를 본다고.

아무튼 아카데미는 전체적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2주씩이나 학업을 빠진 나 역시, 실기는 몰라도 이론은 일단 봐둬야 했으니 이론 위주로 누님에게 배우는 중이었고.

프리드리히 측에 악마 계약자인 엘프 왕자의 시신을 전송하고 연구와 분석 협력 요청서 따위를 쓰기도 하고, 개인적인 볼일까지 처리하고 나니 남는 여가 시간이 많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흐읏. 앙, 하윽. 으긋.”

“아, 으응. 하읏…. 주인님….”

누님과 데이지를 예뻐해주거나.

“앗, 아, 후읏. 스칼렛 님….”

크리스티나의 기숙사에 몰래 찾아가 몸을 섞거나.

뭐 그런 것들까지 하고 나면, 남는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 하나 더.

“오라버니─.”

“아. 전하.”

요즘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잔망스러운 황녀와 만나기까지.

자기도 대놓고 크게 부르기는 좀 그랬는지 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말해놓고선, 뺨을 부풀린 황녀가 투덜거렸다.

“전하라뇨. 그게 아니잖아요.”

“아이리스.”

“맞아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리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쪽 팔을 내줬다. 기다렸다는 듯 냉큼 팔짱을 낀 아이리스가 작게 웃었다.

경박하지 않고 기품 있는 미소였다.

“에스코트 해주실 거죠, 오라버니?”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붙어있으면 무슨 소문이 퍼질 지 모릅니다만.”

“뭐 어떤가요. 우리는 진짜로 교제하는 사이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크리스티나와 관련한 염문도 상당히 퍼져있을텐데. 황녀와 팔짱을 끼고 걸어다닌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퍼진다라.

내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에, 아이리스가 바짝 몸을 밀어붙였다.

“아니면. 오라버니는 내가 싫어?”

“…아니.”

팔에 닿아, 부드럽게 뭉클거리는 젖가슴의 느낌.

아주 크진 않았다. 누님이나 크리스티나에 비교할 것도 없이, 데이지보다도 작다.

그렇다고 아주 작진 않아서, 착실하게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다.

‘일부러 더 달라붙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니. 단순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은근히 그러는 것 같은데.

고아하고 단정하던 황녀는 어디 가고, 잔망스럽고 요망한 소악마가 있었다.

말이 소악마지 키 크고 다리 길쭉하고 가슴도 탐스러운 악마─용사한테 악마라고 했다간 불경죄일 듯 하니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리스를 끼고서 걷고 있자니, 잠깐의 침묵에 질렸는지 아이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네, 전하.”

“…….”

“전하?”

“…….”

“아이리스.”

“네에.”

참 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하나, 괜히 과장스레 연극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이거. 데이트 같지 않나요?”

…?

“데이트 맞습니다만.”

“…에.”

“에스코트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에. 그냥 산책하잔 뜻….”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이리스가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며 멈춰서더니, 내 시선을 피해 땅을 발 끝으로 콕콕 찌른다.

음.

잔망스럽게 굴 줄만 알았더니.

생각해보니 연애경험이라곤 전혀 없을 숫처녀이지 않은가.

나는 손을 뻗어서, 홍조 띤 얼굴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이리스의 뺨을 콕 찔렀다.

누님과 비슷할 정도로 새하얗던 얼굴은, 홍조로 잔뜩 붉어져 이렇게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보였다.

“히약!”

분명 입학실 날때만 해도, 당당 고귀 단아하던 황녀였는데.

품위 있던 아이리스 황녀도, 잔망스럽던 여동생도 온데간데 없이, 부끄럼 많은 소녀만 남았다.

“누가 팔짱 끼고 걸으면서 그냥 산책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모, 모, 모르거든요? 그냥─, 그냥.”

“그냥?”

“겨,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거니까…. 꼭 데이트가 아니더라도 만날 수 있는 거잖아요….”

이 귀여운 여자를 어찌 하면 좋을까.

“아이리스.”

“왜요.”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남녀가 아무 목적 없이 만나는 것을 보통 데이트라고 부릅니다.”

“엣.”

“네.”

“그치만 데이트라는 건 같이 차도 마시고 독서도 하고 쇼핑도 하고 산책하는 게…?”

“거기서 산책만 해도 데이트는 데이틉니다.”

“그런….”

처음 접하는 정보에 혼란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그, 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읽던 책에서….”

“제목은요?”

“‘나의 백마 탄 도련님’이라고….”

로맨스 소설이잖아.

아니. 여성향 게임 속 세계이니만큼,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것들이 오히려 이 세계에서는 통용되는 상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가 지금 하는 건 데이트가 맞습니다.”

“그런…,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준비하고 나왔을텐데…!”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하고 나온 걸로 보이는데. 이게 준비가 덜 된 것이었단 뜻인가?

아이리스의 등을 토닥였다.

“지금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진짜?”

….

이따금. 나를 오라버니로 부르기로 한 이후, 존대 대신 반말을 쓸 때의 아이리스는, 꽤 귀엽다.

지금처럼.

나를 슬쩍 올려다보며 묻는 아이리스의 등을 토닥거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늘어트린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로요.”

그때였다.

“공작 전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대수림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크리스티나의 일로 나와 어색함을 떨치지 못했던 안나 크로이체프가, 사샤를 대동하고서 나타났다.

내 팔에는 여전히 아이리스 황녀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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