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악마, 부알 (2)
“….”
“….”
잠시간의 침묵.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짓는 황녀를 보며,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분명 체페슈 본성에 있을 놈을 데려오라고 했을 뿐이었는데, 황녀가 왜 따라 온 거지?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아이리스 전하?”
“아, 그, 저기. 마족이….”
황녀는 황녀대로 횡설수설이다.
결투의 날에 그 자리에 있었던 그녀이니만큼, 용사인 그녀가 악마의 힘을 알아보지 못 할 리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아이리스의 입장에서 나는 그녀가 용사라는 걸 모르는 상태다.
그러니 자신이 용사라는 것을 나한테 숨겨야 하는데.
그 와중에 용사로써 악마라는 단어에 헐레벌떡 쫓아오긴 했는데, 정작 자신이 용사라는 걸 밝히지를 못하니 결국 제대로 된 변명을 내놓지도 못하고….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신 듯 하니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찾아오신 일과 황실의 의사는 별개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네… 제 독단입니다….”
풀 죽었군.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마왕과 싸웠던 일에 대해 여신에게서 무언가 귀띔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게 보이는 기묘한 호의를 설명하기 어려웠으니까.
정작 나는 마왕과 어떻게 싸웠는지, 마왕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만.
아무튼 호의를 품은 대상에게 선을 긋다 못 해 경계 받는 듯 한 말을 들으니 한창 때의 소녀라면 기 죽을만도 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문제도 아니고.
“여왕.”
“…네, 스칼렛 님.”
옆을 지키고 있던 여왕을 부르니, 눈치 빠르게 나를 폐하가 아니라 스칼렛 님이라고 불렀다.
이 정도는 돼야 대수림을 통일한 군주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속으로는 흡족하게, 겉으론 무덤덤히 말을 이었다.
“방을 내어줄 수 있나? 잠시 황녀 전하와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네?”
“준비하겠습니다.”
당황하는 아이리스를 두고 여왕이 물러났다.
동공이 떨리는 황녀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황녀가 제 발로 찾아온 이상 부려 먹을 생각이었다.
나의 「부여」는 거의 만능이지만, 「부여」가 불가능한 속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우선 흡혈귀인 나와 거의 상극인 「태양빛」과 「신성」 같은 것들.
아직 내가 미숙해서인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 당장 불가능 하다는 게 중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를 완전 소멸시키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신성」을 품은 공격이었으니.
“전하.”
“네, 네?”
“이곳은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죠.”
파르르.
황녀의 입꼬리가 떨렸다.
“무, 무슨──.”
“신성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빽.
하이톤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튀어나오기 전에 말을 이었다.
뚝. 황녀의 입이 다물렸다. 바짝 굳어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허나 아이리스는 황녀이기 이전에 용사.
그녀는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는 단 둘이서 할까요.”
“예.”
부알을 소멸시키는 데에 실패하면 재기불능으로 만들어서 봉인이라도 해두려 했는데, 황녀가 잘 도와준다면 아예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었다.
부알 이 십새끼.
넌 뒈졌다.
착한 악마는 죽은 악마 뿐.
나는 오늘 부알을 착한 악마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여왕이 안내해준 방으로 아이리스와 단 둘이 남게 되자, 아이리스가 나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벽쿵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바짝 붙으니, 황녀의 체취가 확 풍겨왔다. 이름대로 꽃향기에 가까운 향기여서, 나도 모르게 슬쩍 코 끝을 찡긋거렸더니.
“체페슈공.”
“…아, 죄송합니다.”
새빨개진 얼굴로 황녀가 한 발짝 떨어졌다.
“크흠. …그래서, 어떻게 된 건가요?”
“제가 어찌 황녀 전하께서 신성력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에 대한 물음이신지요?”
“그것 말고 뭐가 또 있나요?”
“없습니다만.”
아이리스는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그 눈에 나를 향한 적의는 없었다.
다만 경계심이 엿보이긴 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경계심인지, 아니면 한창 때의 여인의 체취를 코 앞에서 맡은 것에 대한 수치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글쎄요. 계시라도 내림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체페슈공?”
흠.
능청을 떨어봤지만, 역시 안 통하나. 하긴, 계시를 내려주는 여신이 저쪽에 붙어있는데 통하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선 조금은 솔직하게 정보를 까야겠지.
“신성력을 다루지 못 하는 용사가 어딨겠습니까.”
“역시 눈치 채고 계셨군요?”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오는 아이리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여기서, 내 정보를 어디까지 보여주느냐인데.
“오래 전의 계시를 아직까지 지키고 계실 줄이야…!”
…뭐라고?
“체페슈공. 저는 제국의 황녀이지만, 그 이전에 여신께 성검을 하사 받은 용사로써, 대륙을 구제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하셨던 체페슈공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답니다.”
…어?
“여신께서도, 요즈음 체페슈공이 기도를 올리지 않아 오랫동안 대화를 못 했다고 서운해 하십니다만, 그것도 다 사정이 있어서지요?”
“…아, 네.”
“역시….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새로운 정보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일단.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여신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 방식이 나의 기도로 이루어졌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정확히 어떤 식의 커넥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설정상 여신은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니 내가 이용당했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아마도 내가 마왕과 싸웠다는 것은 여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았다면 아마 여신이 황녀에게 진즉 알려줬을테니까.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고….
일단은 좀 더 숨기는 것으로 할까.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네.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체페슈공.”
“대신….”
“네?”
내 선택은 반반이었다.
모두 말해줄 필요는 없으나, 황녀의 조력을 받기 위해 적절한 정도의 정보는 내어주기로.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아이리스를 조금 애태우기로 했다.
“자세한 건, 일단 악마를 처단한 뒤에 얘기하도록 하죠.”
“앗. 아니. 네….”
별 다를 이유는 없고. 그냥.
예쁜 여자가 안달내는 모습 보기 좋잖아, 왜.
*
아이리스와 방에서 나오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놈이 악마에게 바친 제물들을 소각하는 것이었다.
그 제물들이 바로 현세와 악마를 연결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내가 「부여」를 통해 악마와 제물들 사이의 연결을 「단절」시키고, 악마의 잔재를 아이리스가 신성력으로 소각.
마기와 만나면 새하얀 불꽃처럼 마기를 불태우는 신성력이, 궁전 뒤뜰을 환하게 밝혔다.
“환하군요.”
“그만큼 마기가 짙게 뿌리 내렸다는 뜻이죠.”
아이리스의 말대로였다.
태울 것이 많을수록 불길이 거세지는 것처럼, 부알이 왕자를 통해 뿌린 마기의 양이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신성력이 끝 없이 그 크기를 불려가며 마기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놈을 소멸 시킨 이후에, 대수림을 돌면서 정화도 좀 해야겠습니다.”
“그러게요….”
작정하고 뿌린 마기는 숲을 오염시킨다.
이미 숲 곳곳이 오염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자는 이미 부알과 계약한지 오래 된 계약자였고, 숲 전체를 마계화 시키려던 놈이 숲을 오염시키지 않았을리도 없었다.
“할 일이 많겠습니다.”
“흐우.”
내 말에 힘이 빠진다는 듯 한숨을 폭 쉰 아이리스였으나, 금세 자세를 다잡곤.
“그래도 해야지요.”
“용사니까?”
“네. 용사니까.”
“멋지네요. 돕겠습니다.”
“동경하던 분이 도와준다니, 무척 힘이 나는걸요.”
기억은 없지만.
나는 하하 웃으며 아이리스의 말을 받아넘겼다.
아무래도 일을 끝내면 기억이 없다는 것부터 말해줘야겠는데.
*
모든 준비가 끝난 후.
걸레짝이나 다름 없는 몰골의 왕자가 끌려왔다.
지켜보던 스카디 여왕의 얼굴이 착잡해지긴 했으나, 다만 그 뿐이었다.
나 역시 아무리 미운 아들이라도 그렇지, 그래도 아들이 저런 꼴이 되니 기분이 심란하긴 한가보지, 하는 생각이 끝이었다.
이제 와서 그녀가 배신할 리도 없었다. 당장 아들 때문에 그녀가 이룬 모든 것이 하룻밤만에 사라질 뻔 했으니.
게다가.
“어머니…! 어머니, 구해주십시오… 어머니…!”
놈이 발악하며, 있는 힘껏 쥐어짜내 스카디 여왕을 불러도 그녀는 눈을 피했다.
새하얀 목덜미에 박힌 붉은 문양. 시간이 촉박해 급하게 새기느라 약식에 불과하나, 그녀가 나의 소유물임을 뜻하는 맹약의 증거였다.
그녀는 자신의 왕국을 지킨다는 사명 하에, 그 외의 모든 것을 내게 바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를 그런 상황에까지 몰고 간 것이 바로 그 아들이니.
스카디 여왕은 언제 흔들렸냐는 듯 제 아들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찌 죄인이 감히 여왕의 자식일 수 있단 말이냐.”
“…!”
노기 서린 목소리로 뱉은 절연 선언이었다.
아마 놈이 마지막까지 믿은 것이 바로 제 어미였는지, 어미에게마저 버림 받은 왕자는 망연자실 하여 고개를 푹 처박고 있었다.
“시작하지.”
“네.”
물론 나는 놈의 멘탈이 깨지건 말건 아무 상관 없었으므로,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차라리 악마놈들이 차원문을 넘어 현세에 강림했다면 이런 복잡한 작업도 필요 없었을텐데.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악마를 소멸시키는 것 자체가, 나와 황녀가 있기에 가능한 편법이었다.
나는 총 다섯 가닥의 「선」을 펼쳤다.
소환, 분리, 속박, 약화, 치명.
각각 다섯 개의 속성을 부여해둔 선이 왕자를 꿰뚫었다.
소환.
놈의 몸에서 지저분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놈과 계약한 악마, 부알의 본체다.
본래라면 계약을 통해서 저 너머의 차원에서 힘만 전해주었을 부알이, 내 손으로 억지로 현세에 끌려나온 것이다.
분리.
어디까지나 계약의 매개체를 통해 소환한 것이기 때문에, 왕자 놈의 몸에 깃들어 있을 뿐인 부알의 몸을 놈과 분리시킨다.
“끄으아아악!”
분리를 당하는 왕자의 비명인지, 아니면 억지로 끌려나오는 부알의 비명인지 모르겠으나, 썩 듣기 좋진 않았다.
세 번째, 속박.
분리 당한 부알이 난동을 부리기 전에 악마의 거체를 선이 휘감았다.
밧줄보다 얇은 선이었으나, 한 번 구속 당한 몸은 반항하지 못 했다.
네 번째, 약화와 치명.
아직 용사로써 제대로 개화하지 않은, 봉오리에 가까운 아이리스의 신성력으로도 놈의 몸을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게 만드는 준비물이다.
놈의 내구와 재생력을 약화시키고, 아이리스의 일격에도 치명상을 입게끔 만들었다.
이쯤 되니 부알 역시 심상 찮음을 느낀 듯 했다.
「속박」의 법칙에 묶인 채로, 억지로 몸을 비튼다.
“이놈들! 이 하찮은 놈들! 이 몸이 누군줄 알고오오오오!”
뿌드드드득.
놈의 몸이 찢어진다. 놈이 반항할수록 「속박」의 힘이 강해져 놈을 억제한다. 놈이 발악해봤자, 돌무더기 하나 제대로 부수지 못 한다.
나는 잠시 놈의 발악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전하.”
대답은 없었다.
다만, 아까 마기를 불태우며 피어오르던 새하얀 불꽃보다도 더욱 환한, 눈이 부실 정도의 빛무리가 피어오름을 느꼈다.
─.
“폐하!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이 부알을! 폐하의 충선스런 이 부알을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죽음을 직감한 놈이 마왕을 부르짖었다.
나는 픽 웃었다.
“당장 자기 몸 요양하기도 바쁠 놈을 왜 찾아?”
“────!”
마지막 순간.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눈을 부릅 뜬 부알이 나를 보고 뭐라고 소리 치는 듯 했으나.
글쎄.
성검의 일격에 묻혀버렸는지 들리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