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40화 (40/140)

EP.40 대수림 (1)

안나 크로이체프와 어색해지건 말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색해졌다, 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좋은 아침. 입니다.”

“간밤은 잘 주무셨는지요, 전하.”

라든가.

일견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변함 없는 태도였다. 어느 정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그 기저에 깔린 미묘한 감정을 눈치 챈 것이리라.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그녀를 만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안나가 회피를 택한 것인지, 아니면 정면돌파를 택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그녀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기에 나 역시 기껍게 그녀의 거의 변함 없는 태도를 받아들였다.

2주차.

1학년 강의 중 유이하게 지난 주에 이어 수강하게 된, ‘고대 마법’ 강의의 시간이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데이지를 대동하고서 맨 뒷줄로 향하자,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아이리스 황녀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역시 지난 주 앞줄에 앉았던 생도들이 이쪽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나, 황녀에게 다른 자리에 가라는 말을 할 수도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티나랑 염문이 퍼졌을텐데.’

아마 이쪽을 흘끔흘끔 모른 척 쳐다보는 생도들 역시 그것을 신경 쓰고 있을 터다.

누님과 데이지와 함께 다니는 것이야 뭐ㅡ. 누님은 가족이고, 데이지는 그 블랙우드다. 체페슈와 함께 다니지 않는 쪽이 이상한.

그러므로 내가 옆에 여자를 끼고 다녀도, 양 옆의 여자가 누님과 데이지라는 것을 알면 “별 거 아니네ㅡ” 하고 넘길 수 있었겠으나, 크리스티나와 나 사이에는 어떤 접점도 없지 않은가.

당연히 크리스티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이만큼 흥미로운 소재는 드물테니까.

그런데.

‘뭐라도 물어볼 줄 알았더니.’

황녀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었다.

할 말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황녀에게 말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 실례했습니다. 그저, 위명이 자자한 체페슈공이 이렇듯 저와 아카데미의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기에….”

무척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입학한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데다,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던 것도 아니면서.

아니면, 지난 주에 무슨 일이 또 있었나?

허나 그런 의문을 말하는 것도 눈치가 없는 짓이었다.

“음유시인의 노래란 언제나 과장이 있기에 마련이지요.”

“겸손하시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 하는 과거가 자꾸 남들 입에서 오르내려 봐야 불편하기만 했다.

‘기억을 찾긴 찾아야겠는데.’

내가 아는 거라곤 캐릭터 설정 뿐, 히든 피스가 어디에 있고 무슨 아이템이 어디에 있고, 그런 설정 따윈 하나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그나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캐릭터 설정조차, 네임드 대부분이 뒤바뀌어버린 이상 내가 아는 대부분 쓸모 없게 됐다.

즉. 나는 그냥 21세기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스칼렛 체페슈에 불과하다.

그 ‘스칼렛’이기에 망정이지, 다른 떨거지 엑스트라에 빙의ㅡ 아니지, 환생했었다면 솔직히 별로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스칼렛’이니까. 오직 그 하나만으로 환생자가 가지고 있을 법한 온갖 혜택 따위가 없어도 상관 없다고 느낄 정도다.

그나저나.

‘상태창.’

주르륵 눈 앞으로 올라오는 상태창을 넘기고, 이윽고 나타난 퀘스트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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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 살아남기

▶ 언젠가 몰락할 운명의 당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결말로 바꿔보세요!

보상: 결말의 난이도, 완성도에 따라 달라짐.

서브 퀘스트 - 미지의 1학년 1학기 (연계 퀘스트-미지의 1학년 2학기)

▶ ‘루나 테일러’가 입학하기까지 앞으로 1년. 그 전의 공백기간은 미지의 영역입니다. 루나 테일러가 입학하기 전까지, ‘아이리스 아르카디아’와 ‘안나 크로이체프’ 두 명의 주연과 적절한 친분을 유지하세요.

클리어 조건: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안나 크로이체프의 호감도 40 이상을 유지한 채 1학년 여름방학을 보내기.

보상: 진실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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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을 공략하라는 퀘스트 이후, 오랜만에 갱신 된 퀘스트창이었다.

클리어 조건이야 무난했다. 굳이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그 둘 없이 2학년으로 넘어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호감도만 적절히 유지하면 됐다. 안나와의 관계가 걱정되긴 했지만, 다행이게도 등락이 없던 것은 아니나 40 이상은 쭉 유지하고 있었다.

주목하는 건 보상이었다.

진실의 거울.

상세보기…로도 자세한 정보를 알 순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나온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이든 한 가지, 거울에 비춘 이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해 알려준다고 했다.

사용법은 무궁무진 하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나, 내가 기억을 잃은 이유라든가.

알고자 하는 게 오히려 너무 많아 고민일 정도다.

나는 슬쩍 옆에 앉은 황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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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나이: 20 성별: 여

호감도: 49

근력 ▶ 81

민첩 ▶ 71

체력 ▶ 55 (80)

내구 ▶ 59

마력 ▶ 80

특성: 「공주기사(B)」「천부적 전투감각(A)」「황실의 꽃(A)」「신성력(A)」

고유 특성: 「용사(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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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과 내구가 터무니 없이 낮은 것을 제외하면, 안나를 압도하는 스펙이었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맞붙었을 때, 낮은 체력을 고유 특성 「용사」와 「신성력」이 순간적으로 80까지 올려준다는 것을 고려하면, 십중칠팔 정도로 황녀의 승리이리라.

나머지 이삼의 확률은….

아마도, 안나의 「불굴」 특성이 맹렬하게 발휘 되었을 때?

더 이상 「용사」와 「신성력」이 체력을 뒷받침하지 못 할 정도로 장기전으로 이어지면, 괴물 같은 수치의 체력과 내구를 지닌 안나가 이길테지.

그 전까지 버티지 못 한다면 아이리스가 이길테고….

…확실히 나와 누님 정도가 아니라면, 안나도 아이리스도 지금 세대를 넘어서 인간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괴물이다.

조금 더 완숙해진다면, 대륙을 통틀어 적수가 얼마 되지 않게 성장할테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나와 누님 수준의 상대에게 아이리스와 안나는 아직 미숙하다는 것.

…….

….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의식하게 된다.

‘뭐 했다고 호감도가 49야?’

모르는 사람은 호감도 0, 부정적인 대상은 마이너스….

즉, 호감도는 0부터 100까지가 아니라 -100부터 100까지.

일전에 악마가 어쩌니 저쩌니 얘기를 한 것도 그렇고, 내가 황녀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성검에 깃들어있는 여신이 무언가를 귀띔해준 거 같은데.

‘빨리 기억을 찾아야지 원.’

아는 게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

“스칼렛 체페슈!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길쭉한 귀와 푸른 눈동자, 금발.

멀대 같이 큰 키. 누가 봐도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법한 미남 엘프가, 내게 장갑을 던졌다.

내 가슴팍에 툭 맞고 떨어진 새하얀 장갑을 슬쩍 내려다봤다.

“…….”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말 없이 멀뚱멀뚱 남자를 쳐다봤고, 경악한 누님과 데이지, 구경 중이던 생도들이 모두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ㅡ 하는 내 표정에,

“누, 누난 말렸다? 누나는 싫다고 했다?”

누님은 안절부절 못하는 중이고.

금발남은 가슴을 펴고 말했다.

“레티시아에게서 네놈을 쓰러뜨리면 정혼자로 받아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아.

그렇게 된 거군.

그야 싫다고 말한 거나 다름 없겠지, 그건….

“고귀한 밤의 주인이라고? 하찮은 흡혈귀들조차 제대로 통일하지 못해 왕조차 되지 못 한 놈이, 대수림을 통일한 왕가의 핏줄인 이 몸보다 뭐가 고귀하단 말인가!”

음. 그렇군. 왕자라.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 유일무이의 통일 인류 제국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엘프들의 몇몇 수림과, 드워프 광산 등을 제외한 영토의 얘기일 뿐, 아직 대륙 곳곳에 인간의 영역이 아닌 곳은 꽤 넓었다.

그러니 인외종의 왕족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캐릭터 설정으론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엑스트라인가?

아무튼 이 정도면 망언이다. 특히 제국과 인외종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체페슈에게는 더더욱이나.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데이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누님은 아예 기절할 기세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생도들에게도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나저나.

“그 말은 내 누님도 하찮은 흡혈귀라는 겁니까?”

“하! 그녀는 예외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우리 대수림에 걸맞아. 고귀한 숲의 핏줄을 잇게 할 것이다.”

….

흠.

뭘 해?

“밤에나 기어다니는 지저분한 흡혈귀 따위가 어찌 우리 엘프를 대표한단 말인가! 나는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ㅡ.”

“시끄럽다. 귀쟁이놈. 결투라 했을테지. 좋다. 결투 시간과 장소는 이번 주말, 태양의 날, 태양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시간으로 하마.”

나는 놈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대수롭지도 않은 얼굴로 말이 끊겨 분노하는 놈을 무시한 채.

“뭐, 뭐라고? 태, 태양이 가장 높게 떴을 때? 태양 아래에서 가장 약해지는 흡혈귀가? 이놈! 대수림의 왕자인 나를 모욕하는 거냐!”

글쎄.

진짜 모욕이 뭔지 아직 보여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나저나. 기억이 없으니 이런 것도 짜증나는군. 대수림의 왕자라?

아니.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한 짜증을 느꼈다.

지금껏 기억이 없어 불편하다는 정도에서, 지금은 가슴이 답답하고 분노가 치솟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를 알았다. 놈이 감히 누님을 건드렸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놈을 뒤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스칼렛…. 미안해. 알아들었을 줄 알았는데….”

누님과 데이지는 내 뒤로 졸졸 따라왔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픽 웃었다.

“그게 어찌 누님 잘못이야. 괜찮아.”

다만.

“까마귀를 불러야겠어.”

기억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정보를 긁어모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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