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안나 (1)
기념비적인 쓰리섬 이후.
다음날 아침에 되어서까지 침대에 파묻혀 새근새근 잠든 누님과 데이지를 두고 기숙사를 나섰다.
개인 단말기를 통해 학장의 호출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쨍하니 빛을 내리쬐는 태양에 눈가를 팍 찌푸리고 학장실로 들어가니, 입학실날 보았던 인자한 대머리의 학장이 나를 반겼다.
“안녕하셨습니까, 전하.”
나는 됐다는 듯 손을 저으며 학장이 권유한 자리에 앉았다.
다 늙은 노인네가 굽신거리니 부담스럽다.
실제 나이는 비슷할테지만.
겉보기에는 내가 훨씬 어리다.
“예의 차릴 필요 없다 했잖은가.”
“허허.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겠다는 거지.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도 아닌데다, 일전에 존댓말로 공손히 대해줬더니 기겁을 하길래 내 쪽에서 편히 말을 놓는 중이긴 하다만.
나는 학장이 내어준 찻잔을 들고, 허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이 노인네가 전하를 부른 이유가 다름이 아니오라….”
학장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교수들의 탄원서입니다.”
“탄원서?”
내 눈썹이 슬쩍 치켜올라가자 학장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예. ‘고대 마법’ 담당의 린네만 교수와, ‘결투학’의 마르코스 교수를 제외한 1학년 교수 전원입니다.”
“…으음.”
“아무래도, 다른 분도 아닌 체페슈 공작 전하를 가르친다는 것에 큰 심적 부담을 느끼는 듯 합니다. 2학년 이상의 과정이면 모를까, 1학년 과정의 강의는 대부분 전하께서 듣기엔 기초에 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즉, 쉬운 과목이니 교수진들 수준도 여타 상위 과목에 비해 높지 않다ㅡ 라는 뜻이기도 하며,
제국의 감찰관인 체페슈의 시선이 두려운 귀족 출신의 교수들이란 뜻이기도 했다.
2학년 이상으로 넘어가, 점차 수준이 올라가면 단순 영주 계승권 다툼에서 밀려나 한직에서 전전하던 귀족이 가르칠 수준은 넘어서니까.
상위 과목부터는 교수진의 구성원이 직접 전장에서 뛰었거나, 마탑 출신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 고대 마법과 결투학은 계속해서 수강하는 것으로 하고, 2학년의 강의 목록들을 가져와주겠나?”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학장이 건네준 강의표를 받고서, 누님이 듣는 강의를 골라서 내밀었다.
“이것들로 하지.”
“예. ”
“됐나?”
“예, 전하. 살펴가십시오.”
“다음에 또 보지.”
내가 내민 목록을 받아든 학장을 뒤로 하고 이만 일어서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주름진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허리 숙이는 게 부담스럽긴 했으나, 나름 사람은 착하니까….
*
《공작 전하!》
학장실을 나와서, 곧바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대신 뭐라도 좀 사 갈까 싶어 걷던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부의 말이라서 이해는 못 했지만.
예상대로 생도복을 줄인 듯 짧은 치마를 팔랑 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안나 크로이체프와 그 수행원인 사샤였다.
“영원 불멸의 체페슈 공작 전하를….”
“아, 됐어요. 그런 거 안 해도 됩니다. 여긴 아카데미잖아요. 그렇죠?”
“알겠습니다.”
여기서 예법대로 인사를 받았다간, 앞으로의 생활이 피곤해진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생도들이 한명씩 나와서 공손하게 인사한다?
씁.
아카데미니까 평범하게 해도 된다고 말해둬야지, 이럴 때.
“두 분은 여기 어쩐 일인가요.”
“마침 산책 중이었답니다. 그렇지요?”
“으음. 그렇다. 아니, 습니다.”
…?
내가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자, 그녀도 멋쩍은지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까지고 저한테 의지할 수는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렇구만.
“저 때문인가요?”
“아, 아니다.”
“공녀님. 여기선 아닙니다, 가 맞아요.”
“아닙니다.”
거 참.
“확실히 아이리스 전하도 계셨지요. 그럼 저와 황녀 전하 때문이겠네요?”
“으음.”
이건 아니라고 안 하는군.
하긴, 이 아카데미 안에서 공녀가 반말 좀 한다고 뭐라고 쓴소리 할 사람이 어딨겠어.
명목상 평등하니까, 이렇게 내가 친근한 사이처럼 인사를 생략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으로 인사를 생략하고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반대로 말 그대로 '명목상'에 불과한 평등이기에, 그 한계 역시 명확하다.
서열 따위는 뒤로 하고 정말 친해진다면 또 모를까.
“커피 좋아하니까?”
“합니까.”
“커피 좋아합니까?”
“아, 네. 뭐….”
적응이 잘 안 되는군.
그냥 난 상관 없으니까 반말 써도 된다고 할까.
“공녀님께서 이렇게 만난 김에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린다고 하십니다.”
“그러죠, 뭐.”
그녀의 안내를 받아 안나 크로이체프의 기숙사로 향했다.
안나 역시 S랭크이니만큼 기숙사 내부에 어지간한 건 모두 있으니 어중간한 카페 같은 곳에 데려가기보다 그곳의 기구를 이용해 사샤가 직접 대접하는 것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예상했던대로 안나와 내가 마주 앉아 잠깐 침묵을 지키던 사이 커피를 타 온 사샤가 내 앞에 잔을 내려놓고 안나의 옆자리에 섰다.
“앉으시는 게 어때요.”
“그래. 앉거라.”
“저, 저는 괜찮은데….”
“어. 이거 명령 불복종 아닌가요, 공녀?”
“그렇군, 습니다. 앉거라.”
“그렇습니다예요.”
“그렇습니다.”
명목상 평등이란 결국 이런 것….
공작과 공녀가 나란히 압박하자, 지체 높은 아가씨일지라도 결국 굴복하고 만다.
사샤는 안나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는 그녀가 타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의 기대와, 반쯤은 불안함을 품고서.
“음.”
“어떤가. 요?”
“맛있네요?”
“후후. 사샤, 네 커피가 인정 받았다.”
솔직한 칭찬에 사샤가 기뻐했다. 대놓고 티 낼 순 없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북부엔 커피가 드문가요?”
“음. 다들 술을 마신니다.”
“마십니다요….”
부끄러워 하면서도 착실하게 가르쳐주는구나.
“마십니다.”
“술이라면?”
“설원은 추우니, 북부의 시민들은 항상 몸을 뜨겁게 해줄 술을 찾습니다, 전하.”
안나가 제대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자, 사샤가 옆에서 대답했다.
으음.
역시 이거 완전 그거지?
러시아잖아.
설정만 봤을 땐 몰랐는데.
“그래서 설원의 술이 유명한 거군요? 더욱 맛있는 술을 만들기 위해 다들 노력일테니.”
“그렇습니다.”
“잘하셨어요.”
사샤에게서 애엄마가 순간 겹쳐보였다.
아무튼 그런 얘기가 쭉 이어졌다. 대수로울 것 없는 잡담이었으나, 나는 물론이고 안나와 사샤 역시 나름 즐거워 하는 듯 했다.
안나와는 친분을 가지려는 내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이게 예전에 마음도 없는데 누님을 공략하려던 때와 뭐가 다른가ㅡ.
….
물론 그녀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사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도, 얼빵한 듯 싶으면서도 이따금 보이는 고귀한 북부의 공주로써의 자태도.
나는 앞으로도 그녀와 적절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며, 그렇게 그들과 헤어졌다ㅡ.
*
“사샤! 나 괜찮았지? 실수 안 했지?”
“말은 실수가 좀 있었는데, 이상한 말은 안 했어요. 잘 하셨어요.”
동경하는 체페슈 공작이 돌아가자마자, 능숙한 북방어로 방방 뛰기 시작한 안나를 보며, 사샤는 작게 웃었다.
처음엔 그토록 오기 싫어하던 아카데미였는데, 체페슈와 동기라는 소식을 듣곤 어느새 신나서 제대로 익히지도 않던 중앙말도 다시 익히려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스칼렛 체페슈가 같이 입학한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았을텐데.
어쩔 수 없었다. 이 커다란 대륙을 일통해버린 제국의 중앙과, 대륙 북단 끄트머리의 설원을 지배하는 북부 사이의 거리는 어마어마 했으니까.
정보가 오가는 단말기가 없지는 않으나, 북부에서 필요한 정보면 모를까 스칼렛 체페슈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북부에 왜 필요하겠는가?
결국 뒤늦게 알게 되어서, 그 전까지는 '반말 좀 한다고 뭐 문제 될 거 있나'라며 태평하던 대공에게서 '안나가 사고치지 않게 잘 돌봐주거라'하고 짐을 떠맡지 않았나….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는 공녀를 보니, 괜히 뿌듯해지는 듯 했다.
했다만.
“사샤, 사샤! 전하 너무 멋있으시지 않아?”
“그걸 전하께 직접 말씀해보는 건 어떠세요?”
“그걸 어떻게 말해!”
이건 꼭 사생팬이 아닌가.
하긴. 어릴 때부터 제 방을 스칼렛 체페슈를 다룬 신문 기사나, 삽화나, 사진, 혹은 그를 본따 만든 복장 같은 것으로 꾸미던 공녀였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감회가 남다를테지….
“전하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얼마나 멋있으셔!”
신난 기세로 열변을 토하던 공녀가 그대로 자세를 팟 잡고는,
“어둠 속 까마귀를 부리는, 피와 그림자의 주인, 밤의 왕. 영원불멸이란 체페슈를 부르는 말이니ㅡ.”
어릴 적 체페슈 공작에 대해 다루는 소설ㅡ지금은 발행 중지 되었다ㅡ에서 나온 대사를 읊조리는 공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사샤의 낯이 화끈거리는 듯 했다.
“대공 전하께서 보시면 슬퍼하실 거예요.”
“흥. 사샤 너는 아버지 편이야, 내 편이야?”
“저야 물론 공녀님 편이죠.”
“그럼 됐어.”
대공 전하….
사샤는 착잡해졌다.
“그럼 고백하시는 건 어때요?”
“어? 뭘?”
“흠모한다구요.”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내 순수한 마음을 흔한 사랑으로 치부하지 말아주렴.”
이 아가씨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