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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30화 (30/140)

EP.30 북방의 여인 (2)

적지 않은 수의 생도수만큼 대련장은 꽤나 넓었다. 정확히는 수련을 위한 곳인데 대련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만.

마주 보고 선 나와 안나 크로이체프.

원 밖에서 심판을 맡기로 한 교수. 그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십수명의 생도들.

다행스럽게 다른 생도들에게까지 소식이 퍼지진 않은 듯 구경꾼은 함께 강의를 듣는 생도 뿐이었다.

교수 말대로 나와 안나의 대련을 교본 삼을 셈인 듯, 시선들이 다들 심상치 않았다.

경쟁자를 보는 시선도 아니고, 선망이 담긴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

‘기억이 안 나니 답답하네.’

체페슈 영지 내에 있을 때면 모를까, 이렇듯 내 과거를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상황이 되니 괜히 답답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이들 중 내가 뭘 하고 다녔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눈 앞에 있는 안나 크로이체프도 그렇고.

당장 누님도 내가 뭘 했는지 몰랐는데, 타인인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기쁘군.”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기쁜 듯 은은하게 미소 짓는 안나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뭐가 기쁜 건지 알 것 같았으니까.

내가 미소로 답해주자 안나도 만족스럽게 끄덕이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럼, 준비해주십시오.”

교수의 말에 안나의 기세가 변했다. 허당처럼 보이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드럽던 눈매는 어느새 사냥꾼의 그것이 되었다.

피어오른 투기,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실제로 그녀의 발 아래가 조금씩 얼어붙고 있었다.

빙결의 속성.

저것이 설원의 공주.

오글거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 하고보니 그리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ㅡ.”

교수의 입이 열린다.

나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만 발 밑에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ㅡ시작해주십시오.”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나 크로이체프의 신형이 튕겼다.

눈결정이 피어오른 새하얀 순백의 검이, 가장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어 내게 쇄도했다.

일반 생도의 수준이라면 이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상위권 수준의 생도였더라도, 반격은커녕 받아치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안나 크로이체프는 강하다. 여기 있는 어떤 생도보다도.

나를 뺀다면 그랬을 것이다.

파직!

발 밑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치솟았다.

검은 장막이었다.

마치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끌어내린 듯한 그것이, 쇄도하던 안나의 검을 집어삼켰다.

“큭!”

이미 빠른 가속으로 내게 달려오던 그녀였다.

이제 와서 몸을 뺄 수도 없었다. 가장 높은 수치의 내구 덕에 멈춰선다고 해서 반동에 몸이 상하진 않겠으나….

나는 그림자를 방패로 세워 막아내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라리 내가 막아버렸다면, 멈춰서서 물러선 다음 기회를 노리기도 좋았겠지만, 내가 반발력 없이 흘리듯 받아버린 덕에 안나는 스스로 멈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검은 이미 내 그림자에 먹힌 상태다.

나는 그대로 내 영역에 들어온 그녀를 삼키기 위해 그림자를 움직였다.

“…!”

안나 역시 내 노림수를 눈치 챈 듯 했다.

딱히 특출난 전략이랄 것도 없는 전개임에도 밖에서 지켜보던 교수와 생도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오오…!”

이세계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란 이런건가.

나는 어질어질함을 느끼며, 마치 용이 아가리를 벌린 듯 쫙 펼쳐진 그림자에게 한 입에 집어삼켜질 듯한 안나를 보았다.

그녀가 정말 미하일 크로이체프의 대신이라고 한다면, 이대로 당하기만 할 여자는 아닐텐데.

“쥬데카ㅡ!”

그녀가 어찌 대응할 지 유심히 지켜보던 그때, 각오를 굳힌 듯한 얼굴로 안나가 마력을 방출했다.

쩌적ㅡ.

그림자에 삼켜져 흔적도 없어졌던, 미미한 얼음조각들이 단숨에 크기를 불렸다.

꾸드드드득…!

돌로 만들어진 바닥이 깨졌다. 깨진 틈 사이사이로 냉기가 스며들어, 대련장 전체를 집어삼킬 듯 덩치를 불렸다.

‘흠.’

그림자를 퍼뜨려 얼음이 원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절했다. 보니까 강력한만큼 범위 조절이 잘 안 되는 듯 싶어서.

쩌적, 쩌적….

바닥 전체가 거친 얼음으로 뒤덮였다.

단순히 얼리기만 한 건 아닌지, 전개된 필드 위로는 눈결정이 대기 중에 끊임 없이 맺히고 있었다.

“필드마법이라 이건가.”

다 대 일 전투에서의 결전기 겸 버프 장판.

확실히 유용해 보이긴 했다.

다만,

“후욱. 후우….”

체력소모가 심한가.

범위조절도 안 되고, 체력도 상당히 깎아먹는 듯 했다. 내구와 함께 나름 독보적이라면 독보적인 수준의 체력 수치를 보유한 그녀가 이거 한방에 땀을 흘릴 정도니.

…냉기 탓에 땀도 순식간에 식어버리는군.

“계속 하시겠습니까?”

묻기는 했으나, 여기서 멈출리는 없으리라 짐작했다.

애초에 내게 승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모든 것을 부딪치고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였으니까.

짐작대로.

“아직이다!”

“좋습니다. 오세요.”

안나 크로이체프가 도약했다.

체력적으로 지친 것과 별개로, 필드의 영향인지 한층 더 빨라진 채였다.

‘아까처럼 돌격하지는 않고.’

나름 특성으로 전투 센스를 타고 난 그녀다.

아무것도 모를때면 몰라 아까같은 경험을 하고 났으니 또 무작정 뛰어들진 않겠지.

빨라진 속도로도 내게 덤벼들지 않고 견제하듯 서성거리는 게 증거였다.

흠. 아무리 내게 시험받는 게 목표라지만 무모하게 덤비기는 싫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내 쪽에서 공격해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림자를 사용하거나 마법을 쓰며 상대했다간 뭘 어떻게 해도 금방 끝날 상황이었기에,

“읏!”

갑작스런 나의 돌격에 당황하면서도, 안나는 침착하게 내게 검을 휘둘렀다.

저것이 바로 천부적 전투감각ㅡ.

재빠른 대응에 감탄할 시간도 없이, 사선으로 내 어깨를 노리고서 검이 내리쳐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누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검붉은 피가 갑옷처럼 내 몸을 감쌌다.

누님만큼은 아무래도 안 돼서, 전신의 반절만이 감싸였을 뿐이나, 그것만으로도 굳어진 몸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카각!

손바닥을 들어 검날을 막아내니 쇠 긁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큭.”

“당황하셨나봅니다.”

챙!

결국 안나 쪽에서 검을 튕겨 물러섰다.

다만 마법사인 내게 접근전에서 밀렸다는 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곧장 나를 향해 검을 휘둘러 왔다.

물론 접근전을 위해 거리를 좁힌 건 맞지만, 딱히 무기도 없는 내가 손만 사용해 그녀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날카로움」과「단단함」을 부여해 마력으로 검을 하나 만들어 대응했다.

“못 하는 게 뭔가?”

“못하는 게 없어서 더 존경하게 됐나요?”

크그극.

챙!

합을 주고 받으며, 안나는 내가 이제 검까지 들자 황당하다는 듯 투덜댔다. 내 대답에 어쩐지 휘두르는 검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긴 했지만.

입으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확실히 검술에서는 내가 밀렸기에, 중간중간 손톱을 뻗어 견제하며 대련을 이어갔다.

그녀는 내게 전력을 다 해 부딪치고자 하는 마음에, 나는 일단 이게 생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고 있기에 대련이 오래 이어진 것도 있지만.

실제로 거의 두 배 차이 나는 스탯임에도 근접전에서 그녀와 나는 큰 차이가 없었기도 했다.

‘봐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순수한 기교에 있어서만큼은 그녀가 나보다 우위였다.

그래도.

“슬슬 이만하면 됐죠?”

“뭐라?”

칼, 창, 도끼, 메이스, 대검, 활.

천부적 전투감각으로도 감지하지 못 할 만큼 찰나의 순간,안나는 자신의 사각에 놓인 그림자 무구들을 보곤, 한숨을 쉬며 항복했다.

“갖고 놀았군.”

“근접전만으로 이겨보려 했는데 그건 어렵더라고요.”

그마저도 체력 수치와 재생력 때문에 시간만 오래 끌면 내가 이겼을테지만.

*

그 날 강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말 이게 도움이 되는 거 맞나? 싶어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전하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어 여한이 없습니다….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라고.

근데 다른 생도들은 딱히 안 그래 보이던데.

처음에나 조금 동경하는 눈빛이었지, 제대로 그림자랑 피 조종하면서 싸우는 모습 보고 다들 무서워하면 했지 감동 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나마 안나와 그 수행원인 사샤는 확실히 뭔가 감명 깊은 것 같긴 했는데.

기숙사로 돌아와 누님에게 물어봤다.

“아. 그러고보니 몰랐겠구나…. 권세 좀 있다 싶은 귀족들 중 체페슈를 무서워하지 않는 가문이 더 드물걸?”

“왜?”

“감찰관이니까.”

“누구의?”

“제국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인간의 제국에서 흡혈귀한테 그런 거 맡겨도 돼?”

“흡혈귀니까 맡긴거지. 딱히 친한 인간 없구, 밤의 주인이기두 하구, 정보수집 능력 좋구.”

왠지 설명을 들으니까 납득이 되기도 하고.

“배신 걱정도 없지. 우린 어디까지나 대표일 뿐이고, 우리가 없더라도 드라쿨레아나 노스페라투가 있으니까.”

누님은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스칼렛 너 아직 까마귀들 한 번도 안 불러봤겠구나?”

“까마귀?”

나는 체페슈란 이름값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소평가인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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