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29화 (29/140)

EP.29 북방의 여인 (1)

린네만 교수가 바라는대로 그 앞에서 몇 번이나 고대 마법을 시연했다.

현대 마법은 개개인의 마력 속성에 특화된 반면, 고대 마법은 마법진과의 감응만 잘 이루어진다면 속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말인즉 ‘감응’하는 방식만 보편적으로 보급할 수 있다면, 속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실현만 된다면 대륙의 마법계가 발칵 뒤집힐 업적이겠지.

린네만 교수의 눈이 뒤집힌 것도 이해가 간다.

‘나야 좋은 일이지.’

고대 마법 사용자가 없어서, 마법진만 보존 되어 있을 뿐 실제로 그게 어떤 마법식인지 제대로 해석조차 되지 않은 것들.

린네만 교수는 자신이 열람할 수 있는 고대마법진들을 데이터 베이스에서 잔뜩 긁어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이, 이것도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럼 나는 그것을 받아들어서, 고대마법「달의 은총」과 감응했던 때와 같이 반복한다.

사실 「달의 은총」만큼 유용한 게 하나라도 더 나왔으면 했기에 즐겁게 마법진들을 하나씩 감응했는데,

‘그나마 쓸만한 건「치유」인가.’

고대마법의 장점은 감응 방식만 보급된다면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단 것이고, 단점은 이렇듯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다.

농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마법은 내게 쓸모가 없고, 화염구 따위의 마법은 굳이 속성과 일치하지 않아도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초마법이다.

게다가 불사의 몸이라 치유마법도 다른 사람한테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치유하겠답시고 피를 먹일 필요는 없어졌으니 다행인가.

어쨌든 제대로 건진 건 달의 은총 하나 뿐이어서, 내심 기대했던지라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겨우 이런 마법들이라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졌다는 사실에 노인장이 주책맞게 방방 뛰고 있으니 웃기긴 했다.

그리도 좋은가.

“린네만 교수님.”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야! 마법진의 용도와 마법진끼리의 공통점을 묶어 연구하다보면 정보가 더 나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세기의 논문이 완성될지도 모르겠어…!”

안 듣고 있네.

“교수님.”

살짝 마력을 흘려 압박감 비슷하게 느끼도록 해주니, 그제야 린네만 교수의 초점이 돌아왔다.

추태를 보였다는 듯 멋쩍게 헛기침을 해도 말이지. 이미 이미지는 박살난 지 오래다.

“크흠. 험험…. 죄송합니다. 평생의 숙원이었던지라….”

“예, 뭐. 아무튼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신지?”

“예, 예. 오늘 알게 된 사실을 연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공작 전하께는 정말,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지….”

“다른 건 됐으니 다음에 새 마법진이 입수되면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일개 교수한테 뇌물따위 받을 필요도, 마음도 없으니 성의 표시 같은 건 사양했다.

필요한 건 새로운 마법이지 돈이 아니니까. 애초에 돈은 넘친다.

그러나 교수는 내 말이 다음에 또 연구를 도와준다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게다가 내가 감응이 이어진 상태에서 변화하는 기하학적 형태의 마법진을 대충 종이에 그려주자 밖에 있던 조교를 부르더니.

“이건 세기의 발견이 될 거야! 이 「농작물 성장 촉진」마법과 「늪 만들기」마법 사이 공통점을 정리해와라! 한시가 급해!”

어이쿠.

저게 정리가 될까 모르겠네.

‘감응’을 통해 이해하면 곧장 머릿속에 시시각각 변해가는 기하학적 마법진의 형태가 모두 그려지지만, 그걸 종이에 전부 그려줄 순 없으니 적당한 부분만 따로 그려준 것 뿐인데.

머릿속에서 형태변화의 패턴을 떠올리다가 그만뒀다.

감응 없이는 진짜 힘들텐데.

알아서 하겠지 뭐.

*

연구실을 나와서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걷던 와중, 나를 멈춰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걸어가던 길목 한복판으로 나와 내 앞길을 막아세울 수 있을 정도로 배짱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백색에 가까운 하늘빛 머리칼, 마찬가지로 하늘빛 눈동자.

그리 덥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노출도가 심한 짧은 옷차림.

새하얀 피부.

음.

“안나 크로이체프….”

북부의 공녀잖아. 아무리 봐도.

입학식 때도 못 봤는데.

“잘 아는군.”

….

내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감히 공녀님의 말씀을 통역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저희 공녀께서 아직 중앙의 말에 서투르십니다!”

아.

…. 원작 미하일은 딱히 그런 설정 없었는데?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고 싶었다. 까마귀.”

“제국 전역에 위명을 떨치시는 체페슈 공작 전하를 평소부터 몹시 흠모해왔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아…. 고맙, 습니다.”

그거 맞아?

저쪽에서 태연하게 말을 놓으니 나도 그래줘야 하나 아님 몰라서 그런다니까 상호존대로 치고 대접을 해줘야 하나 아리송하다.

배분만 따지면 당연히 내 쪽이 위이긴 한데.

“공녀께옵서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 표정이 미묘하다는 걸 알았는지, 통역해주던 수행원이 다급해졌다. 보니까 공녀의 최측근인 거 같고, 꽤 귀한 몸인 거 같은데 고생이다 싶었다.

노력이 가상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얘기해보세요.”

“결투를 신청한다.”

“…?”

“공녀니임! …저, 전하. 오해십니다.”

순간 표정관리가 안 됐다. 기겁한 수행원이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댄다만…, 결투는 함부로 입에 담을 게 아니다.

나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오해라면 똑바로 해명하셔야 할 겁니다.”

“…그, 읏, 평소 공녀님께서 전하를 무척 존경하시어, 언젠가 전하와 같이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무인이 되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샤.”

“계속 말해보세요.”

중간에 안나 크로이체프가 말을 끊었으나, 내가 말을 잇기를 재촉하자 사샤라고 불린 수행원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래서 늘, 중앙의 아카데미에서 전하를 뵙게 된다면 꼭 그간 단련해온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다고…, 전하께 한 명의 무인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안나 크로이체프는…, 얼굴이 붉어진 걸 보니 수치심 때문인가.

아니, 그나저나.

“지금 한 대화 다 이해하고 있는 겁니까?”

“모른다.”

이해하고 있잖아.

“공녀님께선 듣는 건 출중하신데 말하는 것이 서투십니다….”

뭐 그런 설정이 다 있어.

이상하게 나한테 호의적인 황녀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이젠 듣기는 되는데 말하기는 안 되는 북부 공녀까지 나타나?

이게 내가 알던 여성향 게임 맞나 정말?

“…대답은?”

“부끄럽긴 하지만 기왕 들킨 거니 어쩔 수 없으시답니다.”

“누가 들어도 그런 내용은 아니잖아요.”

“공녀님께서 친한 사람이라곤 대공 전하와 저 뿐이어서….”

“대화가 서투르다는 건가요?”

“네….”

“그렇지 않다만.”

안나 크로이체프가 새초롬하게 말하지만 별로 설득력은 없었다.

*

체페슈와 크로이체프의 대련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하더라도 아예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한 곳이 아니라면 입소문을 타고 구경꾼을 몰려오게 한다.

입학한지 이제 겨우 하루차인데 벌써부터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오전 강의 때 고대마법으로 주목받기도 했고.

안나 역시 주목을 받고 싶진 않은 지 내 설명을 듣자 납득해주었다.

“좋다.”

“전하와의 대련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적절한 때에 맞춰보도록 할테니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걱정 말도록. 북방의 주인은 설원에서도 살아남는다.”

“이미 전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시간만 십 년에 가까우니 그 정도쯤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거 맞아요 정말?”

“아니다.”

“맞습니다.”

이 정도면 아예 재창조 수준 아닐까?

얘네들 캐릭터 재밌네.

아무튼 말을 맞추고 그녀와는 헤어졌다.

언젠가 대련을 해주겠다고 했으니 날짜를 잡긴 해야할테지만, 언제가 좋을런지.

일단 돌아가서 시간을 살펴봐야겠다.

*

나는 교수가 보는 앞에서 안나 크로이체프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우리는 지금 아카데미 내에서 관리 중인 대련장 위였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운명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안나의 말과 사샤의 번역이 일치했다.

나는 그것에 감동을 받기 전에,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오늘은 안나 크로이체프와 만나고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약속을 잡고 바로 다음날 강의인 ‘결투학’에서 대뜸 교수가 내 얼굴을 보더니 온갖 찬양일색을 하며, 대륙의 음유시인들을 노래하게 만들었던 영광의 모습을 어쩌고 하며 나와 안나 크로이체프를 묶어버린 게 아닌가.

대련 조교로. 성적은 무조건 A+로 줄테니 이번 한 번만 딱 해주면 안 되겠느냐며 매달렸다.

“저 같은 늙은이의 강의보단 모두 전하의 위용을 보고 싶어할겁니다…!”

모두가 아니라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마치 아이돌을 바라보는 사생팬의 얼굴이었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 할 때에,

“좋다.”

안나 크로이체프가 싱글벙글 웃으며 수락. 교수만 아니라 이 여자도 내 사생팬이었지 참.

결국 이렇게 대련장 위에 올라서게 됐다.

참 나.

+++++

안나 크로이체프….

나이: 21 성별: 여

근력 ▶ 68

민첩 ▶ 72

체력 ▶ 94

내구 ▶ 91

마력 ▶ 63

특성: 「불굴(B)」「설원의 공주(A)」「천부적 전투감각(A)」

고유 특성: 「검성(A+)」

+++++

힘조절 어떻게 해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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