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황녀 (1)
요망한 발언 탓에 크리스티나를 한계까지 몰아놓고 나서야, 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격한 정사에 한참 헐떡대는 크리스티나를 일으켜, 욕실에서 샤워까지 시켜주었다.
엉망으로 젖은 생도복은….
일단 클린을 사용해두긴 했으나, 직접 킁킁 냄새를 맡아본 크리스티나가 “냄새 배긴 거 아니에요?”라고 울상이었다.
그야 뭐.
방금까지 진득하게 놀아나서 그냥 몸이 잔향을 맡고 있는 것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저 잠옷 좀 꺼내주세요….”
“못 걷겠어?”
“네….”
“속옷은?”
“……. 그것두….”
첫경험의 후유증 탓에 허리가 빠진 듯 침대에 축 늘어진 그녀를 대신 해 짐가방에서 파자마와 속옷을 꺼냈다.
잘 때 굳이 브래지어를 할 필요는 없으니 팬티만 하나 꺼내주자, 이불을 확 들춰 제 위로 덮더니 그 속에서 꾸물꾸물 거린다.
부끄러운가.
이윽고 이불 위로 꾸물거림이 멎더니, 크리스티나가 슬쩍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잠옷 주세요.”
“입혀줄게.”
“주세요…!”
잠시 실랑이가 있었으나 당연히 승자는 나였다.
수치심에 얼굴 붉히는 크리스티나의 몸을 주물대며 천천히 파자마를 입혔다.
“으흑.”
중간중간 손장난을 치긴 했지만.
아무튼 파자마까지 입히고 나니,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앙앙 울어대던 음란한 여자는 온데간데 없이 상냥하고 청순한 여인만 남았다.
씻고 나와 뽀송해 보이는 피부와 머릿결, 거기에 얇아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파자마까지.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청순이랑은 거리가 멀지만, 특유의 아우라 덕에 음란한 느낌은 아니었다.
…자애롭고 청순한 아우라에 음란한 몸과 차림새가 더 야한 거 아닌가?
나는 괜히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불타올라서 앞뒤 재지 않고 덮치긴 했으나, 아직 듣지 못한 얘기가 남아있었으니까.
“크리스티나.”
“으응. 네.”
“테일러 남작의 독녀에 대해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줄래?”
“…많지는 않아요.”
“괜찮아.”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가문이어서인지, 크리스티나는 눈가를 살풋 찡그리곤 입을 열었다.
“음…. 갓 성인이 된 나이라고 들었어요. 테일러 가문 자체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딸인 루나 테일러 양에 대해서는 대륙에 은근히 알려진 편이에요. 저도 그래서 알고 있는거구.”
“잠깐. 유명해?”
“네. 십대 초반의 나이부터 종종 가출해 대륙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고 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음. 계속 말해줘.”
“나타나는 곳마다 화제가 됐다고도 해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요.”
“예를 들어?”
“마을 근처에 자리 잡은 몬스터 부락을 소탕한다거나, …나쁜 쪽으로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모셨던 토속 신앙의 신체를 망가뜨린다거나…, 그런 식으로요.”
오….
…히든 피스 찾기 아냐, 그거?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참기로 했다. 일단 잠자코 들어야 했으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 공적이 확실해서, 원래라면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예정 돼 있었대요.”
“그런데?”
“최근에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입학을 내년으로 미루고 현재는 영지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루나 테일러는 내년 입학이 맞다.
원작에서 루나 테일러가 굳이 내년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모르나, 아마 추측하기론 나의 도움을 받지 못한 크리스티나가 결국 백작가를 배다른 오라비들에게 빼앗기고…, 그 어미가 자신의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테일러 영지에 무언가 지원을 해준 게 아닐까 싶다.
원래라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던 루나가 지원을 받고 아카데미에 조금 늦게 입학했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으니까.
그런데 여기선 다르단 말이지.
“또 뭐 없어? 특징이라던가. 보아하니 모험가 행세를 하고 다닌 모양인데, 주로 사용하는 무기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그건… 죄송해요. 상세불명이래요.”
“죄송하긴. 네가 잘못한 게 뭐 있다고. 괜찮아.”
내가 원하는 대답을 못 해줘서인지 시무룩해진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처럼 살살 손바닥에 부비는 그녀의 턱을 슥슥 간질어주며 생각했다.
‘나 말고 또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 이거지.’
물론 최악의 가정이었다.
베스트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루나 테일러와 접촉해서 이것저것 챙겨줬다…일텐데.
그것 하나만을 믿을 순 없었다. 이미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 많이 달라졌으니까.
조심해둬서 나쁠 건 없겠지.
‘시간 날 때 한 번 찾아가보지 뭐.’
당장 호들갑 떨 필욘 없었다. 내년에 입학한다고 하니, 여름 방학쯤 찾아가 봐도 늦지 않으리라.
“고마워. 도움이 됐어.”
“정말이지요?”
“그럼.”
헤실.
부드럽게 웃은 크리스티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리서 일어섰다.
“가시게요?”
“슬슬 가야지. 시간도 늦었고.”
슬슬 밤이었다. 달이 뜬 듯 활기가 도는 몸상태를 보니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크리스티나는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붙잡진 않았다.
“한 달 동안 얼굴도 못 보고 애타게 기다렸는데, 이제 그보단 자주 볼 수 있겠죠?”
“그래. 같이 강의도 듣고 그러자.”
1학년 1학기는 아카데미에서 시간표를 임의로 짜서 편성해준다. 랭크별로 구분 돼 있는 강의가 아니라면, 아마 모두 같은 강의를 들을 거다.
나는 크리스티나의 뺨을 약하게 꼬집었다.
“으앙. 아파요.”
“내일 보자.”
“…응. 내일 봐요.”
나는 기숙사를 나섰다. 밤 시간에 여자 기숙사에서 나온 걸 들켰다간 난처해지니 그림자로 숨어서.
재빠르게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침대 위에서 네글리제를 걸치고 있던 누님을 보곤 픽 웃었다.
“언제 들어왔어? 많이 기다렸나?”
“조오금 됐어. 누나 안 보고 싶었니?”
“보고 싶었지.”
밤은 흡혈귀를 위한 시간이었다.
누님도 나도, 멈출 줄 몰랐다ㅡ.
*
아침이 밝았다.
짹짹ㅡ, 울어대는 새 소리는 어딜 가도 똑같았다. 순간 지구에서의 아침을 떠올렸으나, 이곳은 아르카디아 대륙이었다.
아ㅡ.
체페슈에서는 짹짹 거리는 새따위 없었는데.
문득 극심한 허탈감이 밀려들어왔다. 내가 왜 이곳에 있지ㅡ.
내 이름은,
….
스칼렛 체페슈지.
쯧.
“누님. 일어나.”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누님을 보자, 먹구름처럼 머릿속에서 피어나던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스칼렛이다. 적어도 레티시아 체페슈가 내 옆에 있는 한, 나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누님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잃어버린 자아 대신 나를 받쳐주는 기둥.
어느샌가 그렇게 됐다.
“으응….”
누님이 부스럭 대며 일어났다.
비몽사몽 몽롱한 얼굴의 누님이 귀여워 볼살을 주물거리고 있자ㅡ,
“주인님ㅡ. 아가씨ㅡ.”
문 밖에서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의 기숙사에서 누님과 함께 생활하는 데이지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누님이 없어 찾아온 거겠지.
문을 열어주자 심통 난 듯 두 손을 허리에 올린 데이지가 서 있었다.
“저만 따돌리시고!”
“들어오렴.”
“아이 정말!”
말은 그렇게 해도 순순히 들어온다. 아침잠에서 깨지 못한 누님을 능숙하게 일으켜 옷을 입힌다.
나더러 아침에 익숙해져야 하니 어쩌니 하면서 정작 아침에 제일 약한 건 누님이었다.
한때는 나도 비슷했는데, 진조가 되고 마왕의 저주까지 해주하고 나니 아침이 불쾌할지언정 누님처럼 약해지진 않았다.
나는 문득 누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데이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음.
어느샌가 데이지도, 크리스티나도 내 마음 속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게 새삼 느껴졌다.
누님이 내 안의 구멍을 메워주는 존재, 나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한다면, 데이지와 크리스티나는 내가 '스칼렛 체페슈'로 살며 남겨온 삶의 궤적이었다.
데이지와의 기억은 잃어버린 채라 정확하겐 모르지만.
아무튼.
내 시선을 느낀 데이지가 나를 돌아봤다.
“주인님.”
“응?”
“어제 얼마나 하신 거예요?”
“한 번?”
“거짓말! 한 번 한 냄새가 아닌데요!”
내 여자는 다들 개코인가.
“다섯 번.”
“으앙! 오늘은 저한테 다섯 번 해주셔야 해요.”
“그럼 나도 다섯 번.”
“아가씨는 어제 다섯 번 하셨잖아요!”
사이 좋게 누님은 다섯 번 데이지는 여덟 번 해주기로 했다.
*
채비를 끝내고 누님과 데이지를 대동하고 방에서 나왔다.
햇빛이 닿는 게 싫은지 양산을 든 누님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후아암….”
“나한테 적응해야 한다던 누님은 어디 가고 웬 양산이지?”
“….”
결국 밤중에 나를 따먹으려던 누님의 수작이란 걸 나도 누님도 이제는 알기에, 누님은 우뚝 멈춰서서는 내 정강이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표정을 보니 마구 노려보고 있었다.
“아파.”
“아픈 척 하지마.”
“아픈 지 아닌 지 어떻게 알아?”
“누나처럼 예쁜 여자가 차는 건 안 아파.”
“그럼 누님은 마물 토벌 못하겠네.”
“저는요? 저는요?”
“데이지도.”
그렇게 셋이서 도란도란 떠들었다. 누님은 나와 듣는 강의가 달라 중간에 갈라졌고, 데이지만 데리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 내부는 꼭 지구에서 대학 다닐 적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였는데,나는 데이지를 이끌고 맨 뒷줄로 향했다.
데이지는 왜 맨 뒷줄인가 의아해 하면서도 군말 없이 나를 따랐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생도가 아니라 나를 따라온 메이드 신분이었으니까.
블랙우드의 여식이 메이드인가.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까봐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듯 했다.
“데이지. 왜 백작가의 아가씨인 네가 생도도 아니고 메이드로 여기 있는데 다들 안 놀랄까.”
“그야 블랙우드는 이미 유명한걸요. 체페슈의 번견으로.”
“자랑스럽게 말할 유명세인가…?”
아무리 체페슈의 위세가 드높다지만, 백작 가문 하나가 통째로 다른 귀족의 집 지키는 개 소리를 듣는데, 되려 자랑스러워 하니 기분이 미묘했다.
그간 영주 대리와 데이지를 보며 블랙우드한테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세간의 인식을 들으니 상상 그 이상이라고 해야하나.
살짝 질려있던 그 때.
“옆에 앉아도 될런지요, 체페슈공.”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목소리.
뚝 멎아든 강의실 내 수군거림. 화들짝 놀란 데이지….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아이리스 황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깨달았다. 맨 뒷줄이라 강의실 내부가 모두 보인다고.
그런 맨 뒷줄에 공작과 황녀가 나란히 앉았다면,
…앞줄의 생도들은 어떤 심경일런지.